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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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다. 삶의 모든 것이 정치인데, 정치 뉴스는 머리가 아프다. 지지율이 30%도 되지 않는 대통령은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언론이라 일컫는 것들은 입을 닫고 삐에로가 된 지 오래다. 정치가 우리의 모든 일상은 지배하고 있는데, 제대로 알려주거나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뭘 걸고 싸우지 않으니 죽어나는 건 우리들뿐이다.

연일 교권 추락에 대한 뉴스로 가득하다. 교권 추락이 오늘내일 일도 아닌데, 유독 보도가 많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치원교사 어린이집교사에 의한 폭행 학대, 부모(의붓부모를 포함한) 아동 학대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진작부터 가득했던 이런 일들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 파악과 현실적이고 대담한 입법이나 행정조치가 있어야 했는데, 그저 떠들어댈 뿐이다. 매번 반복되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세대 간, 성별 간 갈등은 첨예해진 지 오래고 현실적인 삶으로 내화 되었다. 이젠 늦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언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런 문제들만 생각하면 나의 일과 내 가족의 일, 내 주변의 일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환상에 빠진다. 나도 그만큼 힘들고 슬프고 우울한데, 쏟아지는 소식들은 입을 다물게 한다.

이럴 때 김혜진의 글을 읽는 건 적잖은 위로가 된다. 그의 이전 작품들도 그랬고 이 작품 또한 그렇다.

 

얼마든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 늘 어떤 결론에 이르러야만 소설이 끝난다고 믿었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가능성을 품은 채 그대로 둘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들을 쓰면서 배웠다.” (p.8)

 

결론을 지을 수 있는 일상과 작품이 얼마나 될까. 작가의 솔직함이 묻어난다. 단편을 묶은 것보다 장편을 좋아하지만 이 책 완벽한 케이크의 맛은 모든 작품의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너의 모습이다.

 

펜데믹이 극성이던 시기, 작은 재채기에도 모든 신경과 눈길이 쏠렸다. 갑작스런 사례에도 죄인이 되고는 했었다. “국어 쌤 말인데요. 재채기를 자꾸 해서 너무 신경 쓰여요, 원장님.” (p.22, <강사의 자질>)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주인 여자는 노인이 다니는 복지 센터가 몇 주간 문을 닫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했고,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했고” (p.51, <재택근무>) 현 인류가 동시에 겪은 갑작스러운 변화는 일상을 침범하고 유린했다. 감추고 닫아놓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시스템으로 겨우 막아놓았던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펜데믹 시기 이전보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대화시간이 늘어나거나 행복지수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불화와 다툼, 학대와 방기가 폭증했다. 극우주의자들에게만 겨우 남아있을 거라 기대하던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공동체를 지탱하던 신뢰는 의심과 불안으로 치환되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불분명한 혼란의 시대를 겪었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다가 모두가 다 보는 SNS에는 회사 사람들이 싫다, 괴롭다, 미치겠다, 죽고 싶다는 긴 글을 올린 이유가 뭘까.” (p.59, <모르는 일처럼>)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젊은 직원이 누구보다 맹렬하고 난폭한 키보드워리어였다. 또래가 게임으로 엮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로그아웃하지 않은 채 공용 PC를 켜놔 누군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가관이었다. 사무실의 거의 모든 상사의 이름이 실명으로 내던져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인턴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어떤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p.57, <모르는 일처럼>) 작품 속 인턴보다는 훨씬 우리가 가깝고,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고, 집안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도 많이 들어줬었는데. 그래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라고 했었는데. 뒤에서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협동하고 힘을 합쳐야 사냥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인간이 사냥하던 시기가 수만 년 훨씬 이 전일 텐데, 진화가 덜 된 걸까?

 

밀 베이커리 이야기 들으셨죠?” (p.32, <밀 베이커리>)

엄마, 밀 베이커리 아저씨 정말 나쁜 사람이래.” (p.33, <밀 베이커리>)

빵이 이상하던데, 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 ‘우리 애 담임이 글쎄.’라는 말 한마디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배달 앱의 악성 리뷰로 식당 문을 닫아야 한다. 첨예한 대립은 상처를 후벼판다. 더 아프게 한다.

그저 이해하고 조금만 상대의 처지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불가능한 일인가?

그제야 희나는 자신이 또다시 내부의 어떤 버튼을 겁 없이 눌러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들렀다 오지 뭐. 다 살아 있는 것들인데 말려 죽이면 안 되니까.” (p.119, <극락조>) 희나의 버튼은 오지랖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래도 감수한다. 수연의 집을 찾아가서 극락조를 살펴야 하는 불편을.

다만 가게가 문을 여는 동안에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와 함께 좋아하는 빵을 사러 그곳에 종종 들를 생각입니다.” (p.41<밀 베이커리>) 주변 엄마들이 모두 종용해도 아이와 함께 좋아하는 빵을 사러 갈 거라는 판단. 그것이 그나마, 이만큼이나 이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이다.

 

사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도 뭔 말 하는지 모르겠다. 책 한 권 읽은 리뷰에 뭘 그렇게 의미를 담겠다고.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p.128, <극락조>)

다만, 희나의 오지랖으로 인해 수연의 사려 깊음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들의 일상에도 도둑처럼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가득했으면 싶다. 사는 게 마냥 악다구니에서 발버둥만 치다가 끝나기에는 삶이 너무 길다. 그러면 너무 재미없다. 힘만 들이고 애만 쓰며 살 순 없지 않나.

보고 싶은 작가의 책 보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가족과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 시답잖은 일에도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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