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미스터션샤인에 푹 빠져 있다.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다. 탄탄한 각본과 보석 같은 배우들의 연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게 한다.

어젯밤에는 13회를 봤다. 요셉이라는 선교사가 나왔다. 주인공인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한 미 공사대리 최유진 대위는 노비 출신으로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군이 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를 살려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이가 요셉이라는 선교사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유진 대위는 여전히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은인인 요셉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속히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요셉 선교사가 살해당한다. 요셉 선교사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청나라에 밀서를 전하려다 이를 미리 눈치챈 친일파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마침, 이 책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라!를 다 읽은 차였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총칼로 일본과 싸운 군사적 영웅은 아니다. 세력을 이끄는 결사체의 지도자도 아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1895년 을미사면 직후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선 이래 필봉으로, 민권운동으로, 밀사 활동으로, 언론 회견과 기고로, 집회와 강연으로 반세기에 걸쳐 일본 침략주의에 맞서 싸운 한국 독립운동의 횃불이자, 어떤 결사체 못지않은 대일항쟁의 화력이었다.” (p.363)

 

미스터션샤인의 각본을 쓴 김은숙 작가는 분명 헐버트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도 헐버트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조선을 사랑한 사람

 

헌사에 이은 머리말에서 이 책은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 시달림만 받을 뿐 올바른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쓴 사랑의 열매(a labor of love).’라고 하였다.” (p.224)

 

헐버트는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대한제국의 종말>이라는 책을 국외에서 출간한다. 국외 출간의 이유는 한민족의 역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을사늑약의 억울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p.222) 그는 어떻게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겪는 불의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혼자서 동분서주했다.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다니고 기고를 했다. 일본의 침탈에 분노하여 분연히 일어선 조선인이야 내 나라니까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헐버트는 이방인이다. 고종의 청으로 학교를 만들어 신식교육을 하러 온 교사였다. 교사 생활만 하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왜 조선을 위해 힘쓰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는 조선을 너무 사랑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전심을 다 하고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 말고는 헐버트의 생애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조선 사랑은 조선인과 조선 문화 조선의 글자인 한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조선어 공부는 의무라고 여겼다.” (p.50)

조선 사대부들은 한자를 많이 안다는 우월감에 취해 한글 쓰기를 거부하였다. 실학의 대가로 지칭되는 박지원, 정약용도 한글 서적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p.72)

 

한국의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원어민 강사가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만 써도 불편한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여 년 전 헐버트는 그러지 않았다. 한글 공부를 당연시했다. 스스로 한글을 깨우치는 데 힘썼다. 또한, 최초로 <훈민정음> 서문을 영어로 번역해 발표했다. 나아가 한국어와 태평양 국가 언어·대만 토착어와의 유사성을 비교 연구하여 발표하고 한글 소설·희곡도 직접 쓰기에 이르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헐버트의 조선과 조선의 글, 조선의 문화에 대한 헌신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검프는 미국의 굵직한 역사에 매번 등장한다.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사건이 매번 역사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한철호 교수는 서재필이 단시일 내에 한글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헐버트의 삼문출판사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p.134)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주시경은 삼문출판사에서 밤에까지 일하며 학비를 보탰다.” (p.160)

 

헐버트가 운영했던 삼문출판사를 통해 역사적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비록 주권은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했지만, 우리 글로 된 신문을 창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한, 삼문출판사에서 학비를 벌어 공부한 주시경은 역사적인 국어학자가 되었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주시경을 국어학자가 만들어 내기 위해 출판사를 운영한 건 아니겠지만 결국 헐버트의 출판사를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완성된 것이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미국의 선교본부는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정치와 종교는 불리해야 한다는 원칙을 시달하였다. (중략) 헐버트는 미국 선교본부에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내 개신교의 침묵은 한국인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p.234)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구한말 열강은 조선의 편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손쉬운 먹잇감을 가운데 두고 게걸스러운 침을 흘리며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꿨다. 일본의 조선 침탈은 어쩌면 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선교를 위해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 미국 본토의 선교본부는 동상이몽이었을 테다.

헐버트는 참지 않는다. 자신의 신앙과 그에 기반 한 정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도 그러했다. ‘선교본부에서 명령했으니 따라야지.’가 아니었다.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내고 개신교의 침묵을 비판했다.

비판과 회개 없이 양적 성장에만 함몰되어 온 지금의 한국교회에 울리는 경종이 크다.

 

 

일본에는 악몽이었던 사람

 

을사늑약을 전후한 한미일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 조치대학교 나가타 교수는 일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헐버트의 반일운동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헐버트의 특이한 한국을 향한 열정은 일본인들에게는 악몽이었고, 한국인들에게는 희망이었다.’라고 헐버트를 평가했다.” (p.317)

 

일본은 개방 이후 막후에서 외교에 온 힘을 쏟았다. 드넓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구미 열강의 청나라와 러시아에 대한 견제 야욕이 일본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헐버트의 꾸준한 기고와 서신, 강연에도 미국 본토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쩌면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제국주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야금야금 조선을 먹어 들어가며 대륙진출을 꿈꿨다.

다만, 헐버트만은 일본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국외에 알려진 인사를 드라마에서처럼 쉽게 처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악몽이었던 만큼 조선에는 희망이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

 

헐버트는 조선 말기 1886년에 내한하여 63년을 한민족과 함께했지만, 그의 유품은 많지 않다. 변변한 사진도 없다. (중략) 그가 남긴 저술이 그의 일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p.12)

 

수많은 기고와 강연을 한 사람의 유품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의문이다. 사진조차 몇 장 없다니. 안타깝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 상당수는 선친의 위대한 업적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죄인처럼 궁핍한 삶을 살았고, 반민족행위자들의 후손 중 상당수는 부와 명예를 누리며 아직도 기세등등해 살고 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인 김동진 선생은 학창시절 헐버트의 저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을 읽고 헐버트의 한국사랑, 학문적 기품, 가치관적 삶에 매료된 김동진은 국제 금융기관에 근무하면서도 끊임없이 헐버트를 탐구하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헐버트라는 존재를 알게 되어 읽고 공부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김동진 선생은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이끌며 헐버트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헐버트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1999년 이래 매년 추모식 거행, 후손 초청, 학술회의 개최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해방 70년이 훌쩍 지나 이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은 제대로 된 역사를 세우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도 역사의 그늘 아래 감춰져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찾아내어 제대로 된 감사와 예우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의 자세다.

더불어 어린 학생들의 교과 과정에도 반드시 헐버트와 같은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 팬더믹 시대를 겪으며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현실이다. 아프리카 어느 국가, 남미의 어느 국가, 동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비리·침탈과 전쟁에 대해서 눈감지 않을 가치관을 가르쳐야 한다.

헐버트가 조선을 위해 한 숭고한 사랑의 생애는 그런 교육에 더욱 적절할 것이다.

 

헐버트의 죽음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헐버트가 장기간 여행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내한 7일 만에 서거하여 전혀 증언을 남기지 못한 점이다.” (p.418)

 

해방 후, 이승만은 헐버트를 초청한다. 이미 고령이던 헐버트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80이 넘은 나이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뱃길은 무리였다. 내한 7일 만에 서거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굳이 왜 초청을 했나? 라는 의문은 쓸데없다. 헐버트는 해방된 조선의 산과 들, 땅과 공기,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을 사랑하고 아낀 조선을 자신의 생애 끝자락에 온몸으로 새겨 넣고 싶었을 것이다.

 

좋은 책을 통해 훌륭한 독립유공자를 만나 뵙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7살 딸아이에게도 알려 줄 것이다. 나도 절대 잊지 않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 것이다.

 

헐버트 선생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계신 곳에서 영면하십시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