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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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조지 산타야나

​얼마 전 장이머우 감독의 '난징의 13소녀'를 보았다. 아름다운 화면의 너머로 보게 된 것은 자국의 국민들이 대학살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 국민을 지키려는 군인이나 지도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힘없는 국민이 스스로를 지키거나 외국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이리스 장이 쓴 이 책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벌여져 온 국토에 일본군이 물결칠 때 조선의 왕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 그는 망명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에서 또 되풀이 된다.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서울에 있어도 안전하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다리를 파괴하면서.

이 책은 일본의 난징대학살에 대해 고찰한 것이고 왜 일본군이 이렇게 잔인하게 대학살을 벌였는지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지만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국민을 버린 정부였다. 정부가 버린 국민을 일본군들은 잔인하게 짓밟아버렸고 그 이후 일본과 미국과 중국 정부의 이해관계때문에 이 이야기는 묻혀지고 말았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대학살이 일본이 주장하는 일시적인 군기문란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6주간이나 계속된 대학살은 중국에 공포를 주기 위해 공식적으로 저지른 일이며 더욱 문제가 되는 부분은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당시 일본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사회,문화적인 배경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대학살이 벌어지고 난 뒤 지금까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데에는 중국과 일본과 미국의 정치적인 부분에 더 큰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난징의 대학살이 시작되기 전 떠난 장제스와 지도부,냉전체제 아래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외교적 타협 등으로 히로히토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았고, 왕좌를 유지할 수 있게 했으며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관료들이 여전히 전쟁 후에도 살아남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은 다시 되풀이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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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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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지독한 침묵이었음을.    - 마틴 루서 킹 Jr.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문장에 의문이 생긴다. 역사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을 기록한 적이 있던가?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 양심에만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의 양심을 울리는 무서운 책 한 권을 읽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눈알사냥꾼>. 이 책의 그의 먼저 책인 <눈알수집가>에 뒤이은 책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책을 읽지 못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작가 또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책을 전개하고 있으니.

눈알 수집가에서 경찰청 출입 기자인 알렉사더 초르바흐는 유괴된 아이들을 구했지만 용의자인 프랑크 라만은 새로운 희생자로 다름 아닌 초르바흐의 아들 율리안을 골랐다. 그는 초르바흐의 부인 니키를 살해한 후 율리안을 납치했다.

이야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에 갇힌 정신병자가 같은 방법으로 희생자에게 아픔을 주고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이코패스로 보이는 이 살인마를 뒤쫓는 초르바흐와 앞을 볼 수 없는 알리나의 활약은 힘겹게만 보인다.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추적이다. 여기에서부터 독자는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사뭇 다른 전개를 보게 된다.

기존의 추리소설이 위기의 순간을 간발의 차로 잘도 벗어나서 범인을 쫓아가는 구도라면 이 작품은 위기의 순간에 주인공들은 어김없이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기껏 벗어난 듯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부딪쳐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렇게 숱한 희생을 치르며 잡게 된 범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살인자는 언젠가는 붙들려 법정에 세워지지요. 그러나 그전에 도움을 제공하지 않은 죄인들, 그 무수히 많은 공범들은 어떻게 되나요?"주커가 물었다.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초르바흐 씨. 나는 악한이 아니에요. 단지 정의를 세우자는 겁니다. 가해자들에게 자신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보여주자는 것뿐이에요."

"그들의 눈꺼풀을 잘라내고 그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말인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남들이 자신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정확히 돌려받도록 하는 거죠."

모든 살인자에게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동기가 있다. 소설 속 범인은 침묵으로 죄를 방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처단하고 있다.

우리가 겪는 현실에서 아름다운 장면은 없다. 결국은 잔혹한 살인 끝에 죽은 참혹한 시체와 절망만이 나귕굴 뿐이다. 그런 것처럼 이 소설 또한  할리우드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범인으로 오해했던 프랑크는 죽고, 구하고자 하던 니콜라는 눈을 잃었고, 약간의 감정이 싹트던 알리나와는 만나지 못하고 있고, 목숨 걸고 구해낸 아들 율리안과는 말도 섞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악은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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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박힌 못 하나 - 곽금주 교수와 함께 푸는 내 안의 콤플렉스 이야기
곽금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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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유난히 멀미를 많이 했다. 엄마와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엄마도 나도 둘 다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엄마는 '네가 날 닮아서 그렇다'라고 하며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곤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는 귤이며 사탕이며 하는 것들을 준비해서 조금이라도 멀미를 덜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어느 날 버스 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앞자리로 오라고 하고서는 멀리 차가 달리는 방향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기사 아저씨의 말을 따라 멀리 차창 밖을 바라보며 가는 길은 울렁거림이 덜했다. 차가 지나가며 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멀미가 진정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곽금주의 <마음에 박힌 못 하나>를 읽다 보니 어렸을 적 멀미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렇지만 외면하고 싶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 콤플렉스가 멀리 신화나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발생을 알게 되고 그 과정을 보게 되니 사실은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구나 하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시선을 멀리하면서 멀미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예를 발견하면서 아픔이 덜어지는 것이다.

18가지 콤플렉스를 읽으며 '바로 나의 경우네' 혹은 '아~~ 그분이 이런 콤플렉스를 가졌구나'하는 이해의 순간이 찾아온다.

일 년에 한 번 만나서 하는 봉사활동이 있다. 그 모임에 '투덜이 스머프'처럼 모든 일에 툴툴거리며 짜증을 내고 불만을 표시하는 분이 계시다. 오죽하면 우리가 정말 '투덜이 스머프'라고 불렀을까? 그런 투덜이 성향을 케츠 드 브리 교수는 트롤 콤플렉스(Troll Conplex)라 이름 붙였다. 트롤 콤플렉스는 스칸디나비아 민속 신화에서 비롯되었는데 트롤은 동굴과 언덕에 사는 신화적 존재로 나쁜 짓을 일삼는 종족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인간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그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내기를 한다. 이야기 속의 트롤과 같이 이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괜히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불화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인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띠며 늘 불평하는 사람이며 매사 '안 될 이유'만 생각하다 결국 고립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런 성향은 아동기 시절 부모와 아이 사이의 권력 분쟁에서 촉발되며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지배하거나 반대로 아이를 방치하는 경우, 또는 편애하는 경우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반항하거나 겉으로 순종하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위계질서와 권력에 생래적인 반감을 가지고 적응하지 못한 채 냉소로 일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동기의 경험뿐 아니라 회사에서 경험하는 고용을 위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불만이 불만으로 끝날지 아니면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지는 본인의 태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저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서 계속 다른 이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살게 될지, 생각하는 문제점을 고치며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중요하다.

리가 만나는 많은 장애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될지 성장이 될지는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자세로 대안을 만들어 가는지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콤플렉스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정도가 서로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렇지만 그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 상처를 끌어안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조금 멀리 보자. 문학 속에 다른 이의 삶 속에 우리의 콤플렉스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보니 내 콤플렉스는 가시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너무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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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이별 영이별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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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소설과 영화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소재가 슬프거나 아픈 사실일 때에는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게 된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광해,왕이 된 남자>의 경우 광해를 새롭게 재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알았던 광해군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사에서 유독 많은 전설이 생겨난 사건이 있다.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서 쫓겨난 비운의 왕 단종의 이야기다. 그 당시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많은 이야기들, 생육신과 사육신의 이야기, 단종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의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그 당시의 민초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은 작가 또한 작품에서 언급했듯이 '믿는 마음보다 믿고파 하는 마음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소문을 넘어 전설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민초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을 때 이야기는 다시 변주되어 현재의 우리의 마음까지 울리는 것이다.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어린 단종과 권력에 대한 탐욕에 붙들려 있는 수양대군(세조)는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아니며 과연 옳았는가를 되풀이해서 물어야 할 사건이기에 이렇게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이리라.
 
​김별아 작가에 의해 다시 쓰인 단종의 이야기는 화자를 열다섯 살에 혼인하여 열여덟 나이에 남편을 잃고 여든두 살에 세상을 떠난 단종의 비, 정순왕후로 하였다. 자식도 없이 65년을 외롭게 귀신같이 살았던 그녀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 
<영영이별 영이별>은 그렇게 김별아 작가의 상상력에 다시 살아난 정순왕후가 부르는 가슴 저미는 애사다. 그녀의 넋이 남편 없이 보낸 긴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남편의 곁으로 가는 순간 그 긴 세월을 돌아보며 남기는 회환과 분노를 담은 가슴 절절한 슬픔의 시다. 그녀는 작은 아버지에 의해 쫓겨나 가난과 굶주림을 몸소 겪으며 백성의 마음과 삶 곁으로 다가갔다.
김별아 작가의 <영영이별 영이별>의 아름다움은 그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잊힌, 혹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이 정순왕후의 말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것이다. 그녀가 불러낸 단어들은 정순왕후의 심정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작가는 잊힌 역사 속 인물만을 불러낸 것이 아니라 잊힌 우리말 또한 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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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페의 어린 시절
장 자크 상뻬 지음, 양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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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그의 <영혼의 미술관>이란 책에서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상뻬의 이 책을 보기 전에 나는 상뻬의 그림을 먼저 만났다. 그의 그림은 재미있는 한 장면을 잘 포착해서 그린 유머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장난끼가 넘쳐나는 아이들, 그로 인해 곤란에 빠진 어른들이 있는 우리들의 어린시절을 불러내는 그림들로 우리는 빙긋이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트있고 재기발랄한 그림을 그린 상뻬의 어린시절은 부모님의 싸움에 헛간에서 이틀을 보내야 하고, 가난과 결핍 속에 살았던 불행해도 너무 불행한 어린아이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어린시절과 가정 속에서 상뻬는 라디오와 신문을 읽으며 희망을 꿈꾸었다. 그의 운명은 그런 희망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현재의 삶과는 다른 삶을 꿈꾸었고 그래서 재킷, 손등 키스, 넥타이와 넥타이 핀과 같은 격이 다른 물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커프스단추는 가난과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말벌, 나비, 개미와 같은 작은 생명체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감수성과 따뜻한 감성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난 아직도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상뻬는 혹독한 어린시절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동심을 잃지 않고 있는 상뻬는 자신의 어린시절과 많은 괴리를 보이는 즐겁고 낙천적인 그림으로 여전히 그 자신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고단할수록 아름다운 그림은 우리를 더 깊이 감동시킨다. 특히 요즘과 같이 동심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점점 줄어들고 어울려 노는 일이 적어지는 때 그래서 상뻬의 그림은 역으로 더욱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뻬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성일 것이다.

그래서 상뻬의 그림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어린시절이 기억나느냐고, 그리고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느냐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찾아주고 싶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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