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운스 백 - 공처럼 다시 튀어 오르는 사람들의 비밀
김현중 지음 / 김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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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이는 성공하고, 어떤 이는 실패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실패, 혹은 도전조차 하지 않아 그저 그런 인생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실패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 해답이 '바운스 백'이라고 말한다. 즉, 공처럼 다시 튀어 오르기, 거기에 답이 있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가 <안티프래질>에서 말한 복원력이나 강건함의 의미를 뛰어넘는 안티프래질과 비슷한 개념이다.  깨지기 쉬운을 뜻하는 프래질(fragile)의 반대라는 의미에서 안티(anti)를 붙여 만들어낸 나심 탈레브의 신조어 안티프래질은 복원력이 있는 것은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오히려 충격이 가해지면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니라 외상 후 성장하는 것, 무작위적인 사건, 예상하지 못한 충격, 스트레스, 가변성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활용해 시스템이 스스로 끊임없이 재생하는 매커니즘을 말한다.

 

<바운스 백>이라는 '안티프래질'과 유사한 이 개념도 그러하다. 현대는 실패가 일상화된 사회다. 그렇지만 실패 위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성공의 발판이 되는 실패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히 이 책에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누가 바운스 백 할 수 있는가?'이다. 나심 탈레브가 사회 전체적인 안티프래질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이 책의 저자는 개인적인 리더십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AQ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바운스 백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련, 역경 앞에서 사람들은 포기하는 사람(Quitter)이 있다. 이들은 유리처럼 깨어져버리는 사람이다. 그냥 머무르는 사람(Camper)가 있다. 이들은 진흙처럼 그냥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도전하는 사람(Climber)가 있다. 이들은 공처럼 튀어 오르는 사람이다. 역경을 이겨내는 지수의 요인에는 유전적이고 가정적인 요인도 있지만 신앙이 주는 믿음의 힘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 같은 독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자는 바운스 백 리더십을 많고 다양한 예시를 들어가며 말하고 있다. 저자가 들었던 예시들은 리더십, 혹은 경영, 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책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는 않는다. 저자는 <일리아드>,<오디세이>라는 문학작품까지 언급하며 바운스 백의 예를 들고 있다.

 

저자가 문학작품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문학성이 높은 소설을 읽으면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발달한다는 2013년 사이언스의 논문에 근거를 둔다. 대중소설은 인물을 평면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묘사하지만 문학성 높은 소설에는 현실처럼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작용의 능력을 키우는데 문학작품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의 리더십에 대한 조금은 다른 시각의 글이라 충분히 읽을 만하기는 하지만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을 읽은 뒤에 만나는 이 책은 철학적인 면에서나 예화에서나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예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으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을 깨는 날카로움은 많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지만 어렵고 두꺼운 책을 읽어내기 힘든 독자라면 가볍게 읽을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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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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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 특별히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한순간이 있다. 감정의 물결이 가장 거세게 일어나는 듯한 순간,  나에게 그런 순간은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현실이다. 나는 아직도 본능적으로 전쟁의 공기 속에서 살아가고 생각한다.'

<분리된 평화>속 주인공 나, 지은 이렇게 고백한다.  학교를 졸업한 후 1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걸어보는 학교의 교정에서 그는 15년 전 자신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매혹적인 글 솜씨로 풀어놓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6살의 나이로 다녔던 학교, 그 학교에서 위 학년은 전쟁터에 갈 실질적인 수업을 받고 있고, 잠깐의 유예 시간을 가진 이들 학년에 주어진 상대적인 '자유'와 '평화'는 그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나이로나 시대적 상황에서나 '경계'에 서있는 청춘들은 근거 없는 폭력성과 어리석은 행동, 그리고 후회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직접적인 전쟁터는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왜곡되게(어떤 부분을 과장되게 혹은 과소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청소년이 흔히 겪을 수 있는 호기 어린 대담성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무 위에서 멋진 다이빙을 선보이는 피니와 두려움을 느끼지만 억지로 자존심을 지키려 따라 뛰는 나의 이야기는 청소년들의 통과의례다. 이 소설 속 피니는 교칙을 태연하게 위반하면서도 선해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학생이며, 학교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한다는 걸 드러내지만 교칙을 어겼을 때 제일 그렇게 보이는 학생이다.  모범생이면서도 구석에서 땡땡이를 칠 때 제일 편안해 보이는 녀석이라고 나는 서술한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나, 진은 좋은 성적으로 졸업도 하고 싶고, 피니어스처럼 만능 스포츠맨으로 인기가 높은 친구의 미움을 받고 싶지도 않다. 피니에 대한 질투를 품고 있다. 그는 피니가 힘들게 고백한 '너는 그런 단짝 친구야'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못한 것이 이성이 아니라 깊이 숨겨진 감정, 지나치게 진실된 그런 감정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뭇가지에서 강으로 다이빙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 그 사고로 피니는 불구가 된다. 그 사고의 원인은? 나도 피니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었는데.

결국 내가 군복을 입기 전에 전쟁은 끝나버렸지만, 나는 학교에서 군 복무를 한 것처럼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적을 죽였다.'

전쟁의 눈앞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무턱대고 대들며 덤벼드는 사람도 있고, 부주의하고 일반화된 분노를 키우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감싼 모호한 구름 속에서 나왔다가 오직 공포만을 자신이 항상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형체를 맞닥뜨리고 나서 맞서 싸우기를 완전히 포기해버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피니어스는 결코 두려워하지도 어떤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피니어스만을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적에게 맞서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그들이 전선 너머로 보았다고 생각한, 그러나 결코 전선에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던 적에게. 정말로 적이 그들을 공격하긴 했다면, 아니, 그것이 정말로 적이기는 했더라면.

이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위와 같이 전개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주인공 내가 서술한 대로 두려움에 적으로 오인한 어떤 이를 죽인 인물일까?

청춘의 언어는 모호하다. 생략과 오해와 불안이 함께 한다. 또 거기에는 과도한 믿음과 거기에서 오는 호기로운 단정도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청춘의 시간을 보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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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
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 이세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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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처럼 감성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저자인 프레데리크 시프테는 프랑스의 철학교사이며 작가라고 한다. 그는 이 책으로 2010년 데상브르 상을 수상했다고도 하는데, 작가가 이 글의 소재로 데려온 철학자, 아니 에세이스트들의 무게와는 달리 이 책은 유려한 글 솜씨로 오랜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니 짧은 독서의 시간이 아쉽고 문장 속에 빠져들고 싶어서 또 한 번 읽어야 했다.

 

작가인 프레데리크 시프테는 현실의 인물들, 즉 살과 뼈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들, 심지어 호감 가는 사람들과도 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즐거움을 얻는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놀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전문가가 애호가의 입장에서 학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딜레탕트'임을 밝힌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는 강단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몽테뉴 같은 에세이스트에 매력을 느끼며 그가 좇는 철학을 통해 쾌락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귀찮은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어야만 할 때는 최고의 '형이상학적 자리 비우기'수법을 쓴다. 그건 바로, 어딜 가든 항상 소지하는 소설책이나 에세이집에 몰두하는 것이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도 지루해지면 이런 식으로 훌쩍 딴 세상으로 가버린다. 설령 펼치지 않더라도 책을 가지고 있으면 안심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깊게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독서는 낯선 세상을 찾는 게 아니라 그에게 가장 친밀한 거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언어, 몸짓을 할 수 있지만, 그건 꽤나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고 차라리 책으로 도망치는 것이 가장 편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프루스트나 쇼펜하우어처럼 다소 염세적인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수다쟁이들한테 권태를 느끼고 세상은 질서 있는 우주(cosmos)가 아닌 혼돈(chaos)이며, 그 세상 속 삶은 곧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은 일관성이 없고 부조리하며, 인간은 최악의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르고 있는 유예 상태에 놓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깨어있는 자이다.

 

그래서 그는 전도서의 말처럼 '모든 것이 티끌에서 왔으니 모든 것이 티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드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가 몽테뉴에게 느낀 것처럼 '자기를 잘 따라오는 자보다 어슬렁대다가 자신과 잠시 어울리는 자를 더 좋아할 것 같다. 독자가 더 좋은 읽을거리를 찾아 떠난다 해서 마음이 상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몽테뉴가 츠바이크의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였듯이 이 작가는 이 열 명의 사상가들이 '절친'이 되어주고 있다. 이 사상가들의 말에 기대어 사는 작가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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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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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책을 골라 읽는 습관은 조금은 병적인 데가 있다.

우선 베스트셀러를 별로 읽지 않는다. 남들 다 읽는 거 말고 나만 읽고 감동받은 '나만의 책'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자문해 본 적은 있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어쩌면 독서의 즐거움보다 교양을 쌓기 위한 의무감으로는 책을 읽지 않겠다는 똥고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모두가 다 읽는 책은 사서 읽지도 않고 읽는 경우가 있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많은 이들의 이러저러한 평을 다 듣고 난 뒤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편이다. 그리고는? 맘에 들면 무조건 산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남들은 다 읽었다고 하는', 한국에서만 2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사지도 읽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책을 읽고 '왜 이제야 읽었지?' '나의 이 이해 못 할 고집을 바꿔야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와이즈베리가 내놓는 도서들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안티프래질부터 시작된 와이즈베리에 대한 나만의 애정은 ㅎㅎ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라 시작하기에 두려운 감이 있지만,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끌어당기는 글솜씨(혹은 강연의 말솜씨)가 느껴진다. 다채롭고 논란이 될만한(여러 가지 다른 의견을 예상할 수 있는) 에피소드와 공리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여러 철학 이론까지 저자는 놀라운 솜씨를 부리며 독자에게 '정의'에 대해 고민해보길 유도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적용되는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무심코 옳다고 혹은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던 일들에 대해 그 뒤에 숨어있는 정책 입안자들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 그로 인해 예상되는 문제는 무엇인지 우리가 더욱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클 샌델이 인용한 미국의 징병 제도에 대한 글을 읽다가 문득 요즘 우리나라의 군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군대에 제기되고 있는 군기강 해이, 도덕성의 상실, 징병제도로 인해 자격이 없는 군인이 양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논란,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 우리나라도 모병제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제안까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다.
미국은 모두가 알다시피 자원군 제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민간 기업체 소속 군인도 존재한다. 이라크에 주둔한 병력 가운데 실제 미군보다 민간 기업체 소속 군인이 더 많다고 한다. 배심원 제도는 의무로 규정하고 있으면서 군 복무는 왜 시장에 맡기고 있는가? 실제 미군의 대다수는 학력도 낮은 편이고 가정형편도 중하위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의 한 국회의원은 정책을 담당하는 의원들의 자녀가 참전 부담을 가졌다면 전쟁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군 복무는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일까, 힘든 직업처럼 일의 하나라서 노동시장의 원리에 따라야 마땅할까? 공리주의자들은 서로 만족하는 거래를 했기 때문에 좋은 제도라고 할 것이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서로 간의 자유로운 거래이기 때문에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는가?
마이클 샌델은 이런 문제에 칸트의 정언명령과 존 놀스의 이론을 들어 "정의"를 이야기한다. 정의는 도덕적 미덕이며 중용이 필요하다. 그것의 밑바탕에는 올바른 판단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실천적 지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결국 샌델은 정치가 도덕에 적극 개입하라고 요구한다.
왜 이 책이 다시 이 시점에 읽혀야 하는가는 지금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며, 정치를 하는 이들이 '정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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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요, 어느 날 - 사랑도, 일도, 행복도
이윤용 지음 / 김영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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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은 '싱글세'라는 말로 뜨거웠다. 보건복지부 고위 간부가 기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싱글세라도 내게 해야 혼인도 하고 애를 낳을까?'하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 즉 싱글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싱글세는 취직도 힘들고 결혼하기에도 돈이 없는 젊은이들의 분노만 자아내고 말았다. 게다가 전 경기도지사이며,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인 김문수 씨는 서강대 강의에서 "요즘 돈 없다고 결혼 안 하는데 혼자 사는 사람들은 외로우니까 개하고 산다.","결혼하면 돈이 생긴다."라고 말해 강의를 듣던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40년째 결혼도 안 하고, 유학 한 번 간 적 없고, 16년째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별이 빛나는 밤에>, <심심타파>,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의 작가 이윤용은 이런 뉴스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윤용의 일기 같은 솔직, 담백, 유쾌한 책 <생겨요, 어느 날>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그녀는 아마 분노에 분노를 곱해서 싱글인 친구들을 모아 모아 술자리에서 이들을 씹을 것이다.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짜장면 하나 시켜 혼자 먹고 혼자 먹었다는 것이 맘에 걸려 젓가락 두 개를 꽂아 내놓는 판에, 우리더러 세금을 더 내라고?''돈 없어서 결혼을 안 한다고?, 결혼하면 돈이 생긴다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라!' 뭐 이러지 않을까?

결혼과 관련된 정부 관계자들의 뉴스는 실소를 자아낼 만큼 허탈하게 웃기지만,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하는 나이에 인생의 전환점을 꿈꾸는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작가의 에피소드는 읽는 내내 즐겁기만 하다. 오히려 혼자 사는 작가가 부러울 지경이니......

 

주변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로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가끔 만나면 '외롭다, 연애하고 싶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20년째 하고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자유로운 그들이 부럽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도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아이와 남편의 뒤치다꺼리에 지쳐 남편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혼자 만세를 부르는 나는 혼자 밥을 먹는 그리고 하루가 온통 그들의 시간인 그들이 부럽다. 그리고 끝없이 둘이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가진 그들의 감성이 부럽다. <생겨요, 어느 날>의 작가처럼 마땅히 둘이 사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의 시선과 사소한 말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열도 받겠지만 혼자 즐길 수 있는 그 시간이 소중함을 둘이 되면 아니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늘어나면 더욱 느끼게 되겠지.

싱글세 도입이 답이 아니듯, 둘이 사는 것도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며 살기, 나를 그리고 그대를.

그대는 어떤 것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살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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