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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평점 :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시와 소설이 작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시적 화자, 혹은 소설 속 인물이 작가와 동일인물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시인 혹은 소설가는 그런 인물을 그려놓는 것일 뿐, 자신을 전부 드러내어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와 사람이 같은 시인이라는(이 책을 엮어 낸 시인의 후배들이 서문에 밝힌 것처럼) 느낌이 드는 시인이 있다. 도종환 시인이 그렇다.
그의 시를 읽으면 이 분이 이 일을 겪었구나, 이런 일에 마음이 아팠구나, 이런 삶을 꿈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배 시인들의 평처럼 지조가 있으나 편벽을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과 안온에 갇히지 않으며, 성격이 원만하여 선후배들을 두루두루 잘 살펴서 신망이 높고, 한 가지에 편견이 없는 전인적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군자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나 자신도 조심스러워지며 주위를 살피게 된다.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은 없는지, 나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이번 시선집은 도종환 시인의 갑년(甲年)과 등단 30년을 맞아, 네 사람의 후배가, 그동안 시인이 펴낸 10권의 시집에서 각각 10편 내외를 뽑아 99편으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굳이 100편을 채우지 않을 것은, 시인이 마지막 한 편을 더하여 자신의 시적 생애를 채워주실 것을 바랐기 때문이란다.
도종환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마음 따뜻한 사랑과 연민이 드러난다. 그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간 아내에게 못다 한 사랑을 안타까워한다거나 교실을 바꾸기보다는 아이들을 바꾸려 했던 것에 대한 반성,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과 각오 등이 절절하다. 그의 시가 그의 삶이듯이 우리의 말도 우리의 삶이었음 좋겠다.
이 시선집에서 마음을 흔들었던 시 몇 편의 감상을 덧붙여 볼까 한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아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은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짜기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는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얼마나 아프고 깊은 사랑을 한 뒤일까? 시인은 한 번 사랑하고 난 뒤 노을처럼 변해버린 가슴이 사랑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사랑은 쉬지 않고 흐르는 작은 물처럼 그렇게 흐르기 마련인데도 시인의 사랑은 버려진 채 얼어있나 보다. 지나간 아픈 사랑도 슬프지만,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안타까움이 더욱 가슴 아프다.
<배롱나무>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 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랜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게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유홍준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사랑하면 보이게 마련이다. 이제 시인의 사랑의 대상은 길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배롱나무다. 그저 사물처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배롱나무가 문득 마음에 들어오고 나서 꽃그늘도 보이고, 외로운 시인의 동반자처럼 같이 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도 항상 우리 곁에 따라와 머물러 우리를 돌아보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며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죽음을 앞 둔 친구를 만났을 때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다. 그 친구로 인해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단풍이 들어 아름다운 나무가 그렇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가장 아름답게 불타는 나무를 보면서 생의 절정이라고 말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아름답다.
<연필 깎기>
연필을 깎는다 고요 속에서 사각사각 아침시간이 깎여나간다 미미한 향나무 냄새 이 냄새로 시의 첫 줄을 쓰고자 했다 삼십 년을 연필로 시를 썼다 그러나 지나온 내 생에 향나무 냄새 나는 날 많지 않았다 아침에 한 다짐을 오후까지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문을 나설 때 단정하게 가다듬은 지조의 옷도 돌아올 땐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연필을 깎는다 끝이 닳아 뭉툭해진 신념의 심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깎는다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 중언부언한 슬픔 실제보다 더 포장된 외로움 엄살이 많았다
연필을 깎는다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걸 안다 내가 내 삶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내 마음을 믿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람이 그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모순어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시각 얇게 깎여져나간 시선의 껍질들을 바라보며 연필을 깎는다
기도가 되지 않는 날은 연필을 깎는다 가지런한 몇 개의 연필 앞에서 아주 고요해진 한 순간을 만나고자 연필 깎는 소리만이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제 뼈를 깎는 소리와 같이 있고자
연필을 깎는 일을 기도처럼 하고 있다. 다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일, 지조있게 보내지 못한 하루, 지키지 못할 말들을 내뱉었던 일, 포장된 외로움과 엄살, 이런 반성의 시간이 연필을 깎는 시간이 되고 있다. 시인의 단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두려워하면서 떠나는 길, 누구나 처음 가는 그 길,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그 길,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순탄하게 걷고 싶은 이들이 많다. 하지만 시인은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을 동경한다. 낯설고 절박한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온몸으로 넘어가고 싶은 시인의 뜻이 느껴진다.
한 편의 시를 읽었다기 보다는 한 사람의 생을 읽어낸 듯 마음이 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