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다케모도 고노스케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읽은 <우동 한 그릇>의 원제는 '一杯のかけそば', 우동 한 그릇이 아니라 따뜻한 메밀국수(카케소바) 한 그릇이 옳은 번역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메밀국수 한 그릇'보다는 '우동 한 그릇'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기에 아마 이렇게 제목을 바꾼 듯하다. 아무튼,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이 일본에서는 섣달그믐에 '年越し蕎麦'(토시코시 소바: 해넘기기 소바)를 먹는다고 한다. 따뜻한 카케소바(온메밀)를 우리가 국수를 먹는 의미처럼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와 한 해를 모두 넘겨버리는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 전통 풍습처럼 우동집 '북해정'은 매년 섣달그믐날에는 가장 바쁜 날이다. 이 날 이 우동집에 한 여자가 두명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우동 한 그릇만 주문한다. 여주인은 난로와 가까운 2번 테이블로 안내하고 식당 주인은 우동 일 인분에 우동 반 덩어리를 더 얹어서 한 그릇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매년 이 북해정에 12월 31일이면 이 가족이 찾아오고, 매번 같은 테이블에서 우동 한 그릇을 놓고 나눠먹는다. 몇년 후 일 인분을 주문하던 가족은 이인분을 주문하고 아이들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해가 지나 또 그날이 오면 가게 주인은 테이블을 예약석으로 만들어두고 가족을 기다린다. 이 행복의 테이블은 손님들에게 널리 퍼지고 이 가게의 인기는 올라간다. 몇 년이 흘러 가족은 더 이상 가게를 찾지 않는다. 하지만 더 시간이 흘러 이들은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 다시 이 가게를 찾아 '우동 삼인분'을 시킨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았던 나도 역시 이 이야기의 대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남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나는 별다른 감동 없이 읽었다. 이 책에 함께 있는 다케모노 고노스케의 '마지막 손님'도 너무나도 익숙하고 어디서나 들어볼 수 있는 감동이 있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의 이름이 없었다면 한 작가가 쓴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음식을 소재로 한 눈물이 솟는 감동의 에피소드. 일본에서는 '혹시 정말 울지 않고 견딜 수 있는지 한 번 시험해보십시오.'라는 문구까지 등장했다고 하는 이 책은 일본의 1억명이 눈물을 흘리며 봤다고 한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 저명인사들이 등장해서 눈물을 흘리며 낭송을 하고 조금은 웃기는 이야기지만 '눈물 흘리기 콘테스트 특집'까지 있었다고 하니 한 권의 책이 던져준 파장이 결코 작지는 않았나 보다.

음식은 특히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음식에는 희로애락이 들어있다. 특히 명절날 다들 먹는 한 그릇의 우동을 맘껏 먹지 못하는 슬픔과 함께 그런 슬픔을 티 내지 않게 배려하는 상점주인의 마음씨는 진한 감동일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작에 관하여 - 숭고하고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단상들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미디어윌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고르는 눈이 아직 없을 때(물론 지금도 책을 보는 눈이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과서에 나온 적이 있는 책의 제목을 따라다녔다. 일명 고전이라고 불리는. 물론 지금도 고전을 간혹 읽기는 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이 모두 걸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걸작이라는 의미가 과연 무얼까?- 샤를 단치는 이 책에서 바로 이것에 천착하고 있다) 적어도 실망은 시키지 않는다에 만족했다.

과연 우리가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쳐들만한 걸작이란 무엇일까? ​ '걸작'이라는 단어는 18c 중반 문학에 등장했다. 그 뒤 300년에 걸쳐 걸작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걸작에 대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그래서 작가 샤를 단치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부정확하고 깨지기 쉬운 '문학의 걸작'이라는 개념에 감히 도전하는 용감한 책이다. 그래서 많은 논란 속에 빠질 만하다. 어떤 이는 샤를 단치가 걸작이라고 치켜세운 책에 대해 감히 '쓰레기야'라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고, 걸작이란 의미는 그게 아니야 하고 부정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단호함과 신랄한 말투처럼 그런 소리쯤은 아무것도 아닌 양 거침없이 내달린다.

​샤를 단치는 걸작의 기준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 했다. 왜냐하면 걸작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이 걸작 하나하나를 절대적으로 보이게 하기까지 한다. 걸작들은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걸작도 과거의 걸작과 다를 것이다. 걸작은 평범함과의 단절이다.

걸작에는 특정 주제가 없다. 걸작은 어떤 신념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걸작은 증명하지 않는다. 문학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걸작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책을 찬양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책을 문학의 영역에서 빼내어 방법, 맹신, 미신이 지배하고 심판과 취향이 부재하는 세계로 편입시킨다. 사람들은 풍문으로 듣고 풍문으로 읽은 것을 가지고 말한다.

걸작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으로 세상을 완성시켜준다.

걸작은 새로운 영토의 정복자이고 우리의 영토를 넓혀준다. 협소한 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덜 편협하게 하고, 덜 경직되게 하고, 덜 메마르게 하고, 덜 무미건조하게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광대하다.

프루스트는 자신이 게이임에도 자신을 게이라고 암시한 기자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와이드는 자신을 남색가로 취급했다고 연인의 부친을 고소했다. 사람이 인물보다 덜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와일드와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 걸작을 썼다. 그런데 걸작은 걸작을 쓴 작가들에게조차 인생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샤를 단치의 걸작에 대한 論을 듣고 있다 보면 과연 걸작은 많은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걸작에 대해 뭐라 말하든 걸작은 잘 견뎌냈다. 하지만 샤를 단치의 말처럼 독자도 걸작과 마찬가지로 잘 견뎌야 한다. 강요당한 진부함을 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직접 판단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 아니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평가해야 한다. 독자는 걸작을 지키는 보초병이다.

프루스트를 읽으면 프루스트가 된다.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되고 푸시킨을 읽으면 푸시킨이 된다. 그들의 인물이 되고 그들의 배경이 되고 그들의 감정이 되며, 그들이 된다.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걸작! 그런 걸작을 만나고 싶은 독자는 많다. 그리고 그런 작품에 목말라있다. 많은 걸작이 계속해서 탄생해주길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영화와 함께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냥 소설만 이야기할까 많이 망설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배우인 하정우의 감독으로 <허삼관>이 개봉되었고, 책과 함께 영화를 본 뒤라 이래저래 영화와 책이 오버랩이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한쪽에 치워두고 글쓰기가 힘들어 일단 간단하게 영화와 책을 함게 이야기해보고 책에 대한 리뷰를 계속하기로 했다.

우선 위화의 소설인 <허삼관 매혈기>는 서사가 무척 강한 소설이다. 그의 작품이 대개 그랬듯이 (내가 읽어 본 작품으로는 가랑비 속의 외침, 제7일이 있다) 마치 사진처럼, 풍속화처럼, 그리고 영화처럼 장면이 머릿속에 크게 부각되어 그려지기도 하고, 작품 속 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아마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로 한 듯하다. 하지만 위화의 소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분히 '중국적인' 작가의 토속적인 작품이라 우리나라의 한 시대의 한 곳으로 데려와 영화를 만들 때는 그런 점이 충분히 고려되었어야 했는데, 그 부분에서 크게 공감을 얻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게다가 위화의 작품 속 문장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썼기에 그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많은 실망을 안겨 준 영화 감상과는 별도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작가 특유의 글 솜씨로 슬프고 아픈 이야기지만 너무 심각하게 혹은 너무 깊이 있게 파헤치지 않고 그저 툭툭 던져버리는 말투로 재미있게 그려냈다. 자칫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만 매력적인 인물, 허삼관이 살아가다 겪게 되는 독특한 에피소드는 중국이라는 환경이 너무 궁금하게 만든다. 허삼관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더 좋아한다. 그는 이면에 숨은 의도를 계산하고 따지는 것보다, 내 피가,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순박한 인물이다.

역시 위화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갖는 따스한 시선은 그들이 비록 지적이지도 못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냄으로써 여전히 민중을 사랑하는 작가임을 드러낸다. 나약하고 소외된 존재지만 서로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위화의 위트와 해학이 담긴 이 소설은 그래서 위로가 된다.

키득키득 웃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맨 마지막에 와 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진하게 남아있는 이 감정은 감정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의 해부 - 위대한 석학 22인이 말하는 심리, 의사결정, 문제해결, 예측의 신과학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3
대니얼 카너먼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지식의 최전선에 닿는 방법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정교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한 방에 몰아놓은 다음, 스스로에게 묻곤 했던 질문들을 서로 주고받게 하는 것이다. 그 방이 바로 엣지다."


"열린 공간으로 자유로우며 지적으로 신바람 나는 ...... 호기심의 즐거움을 꾸밈없이 나눌 수 있는 공간이고, 생물계와 무생물계의 경이로움을 모아 놓은 곳이며......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 살아 있는 토론장이다." 소설가 이언 매큐언


오늘날 세상을 움직이는 석학들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 학문적 성과와 견해를 나누고 지적 탐색을 벌이는 비공식 모임인 엣지는 1996년 존 브록만에 의해 출범했다. 현대 과학이 이룬 지식의 첨단에 다가서기 위해, 과학과 인문의 단절로 상징되는 '두 문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지식과 사고방식, 즉 '제3의 문화'를 추구하려는 모임이다. 엣지의 사람들에는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빈 서판>의 스티븐 킹커, <총, 균, 쇠>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생각의 지도>의 리처드 니스벳, <몰입의 즐거움>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등이 있다.


⁠이 책은 그다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독자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이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도덕적 판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하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탐색해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엣지의 석학들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책의 원제(Thinking)처럼 생각, 즉 뇌에 대한 질문과 탐색이 주를 이룬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글은 우리에게 설명하는 강연처럼 쓰여 있어 한편의 이야기가 한편의 강의 같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고 다른 이의 행동 뒤에 숨은 의도 혹은 감정을 파악해낼 수도 있다.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깨지면 오랫동안 불행할 거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원상태로 돌아간다. 이혼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시간은 예측보다 짧다. 왜 사람들은 번번이 잘못된 예측을 하는 걸까? 대니얼 길버트는 인간에게는 사건을 보는 관점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며, 하나의 심상은 한 사건의 특정한 한순간을 차지하고 그 사건이 있고 1년 후의 정서는 사건 자체보다 훨씬 많은 것에 영향을 받기에 다른 요인들에 의해 영향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영향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이 실제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예측한다. 이것을 영향력 편향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사건을 보는 관점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어떤 사건은 원래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우리의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차가운 음료수 잔을 쥔 채 누군가를 판단할 때보다 따뜻한 커피 잔을 쥐고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을 더 훈훈하고 우호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시몬 슈날은 인간이 도덕적 행동을 하는 이면에는 치밀하게 짜인 생각과 추론 대신 이렇게 느낌과 직관 같은 우발적 요인이 끼어든다고 말한다. 감정이 도덕적 판단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계발 서적을 또 샀는가? 그 사람은 18개월 전에도 유사한 책을 샀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것이 자기계발 산업계에 있는 18개월 법칙이다. 티모시 윌슨은 자기계발 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기계발 서적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것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희망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방향으로 포장돼 있어, 복권과 비슷하다. 그는 자기계발 산업계를 무시하는 방법, 즉 더 행복해지고 개인적인 문제를 더 잘 극복해내는 방법으로 '글쓰기 훈련'을 추천한다. 사나흘 동안 계속 하루에 15분 정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간단한 방법으로 심신의 건강과 행복에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도모할 수 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예측을 하는 많은 정치전문가 경제전문가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의 글들도 보인다. 필립 테틀락은 많은 정치 전문가가 우연보다 더 높은 확률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해하며,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도 원래의 의견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삶은 되돌아볼 때에야 이해되지만, 앞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키에르 케고르의 말이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치도 경제도 그리고 나 자신도 되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보면서 살 수는 없다.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인간이란 존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아니 적어도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자 하는 책을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연거푸 두 번 읽고 정혜윤 PD는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무릎을 쳤다. 어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헤세가 쓴 서평 하나하나 (물론 그가 쓴 서평 모두에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가 언급한 책들 중에는 내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알기 힘든 책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서평조차도 책과는 별개로 삶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쓴 어떤 에세이처럼 잘 읽혔다.) 가 너무나 주옥같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서평을 읽고 나서 다음 서평으로 건너뛸 생각을 못하고 그 서평을 또 읽게 되는 것은 그의 문장이 자꾸 나를 잡아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의 서평 한 편을 그대로 블로그에 옮겨 적고 말았다.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헤세의 서평을 다 옮겨 적고 싶지만 몇 문장만 적어본다.


얼마나 이상하고 마음을 흥분시키는, 경이로운, 그야말로 기쁨을 주는 작품인가!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이것은 가장 섬세한 꿈의 실들로 직조한 것으로, 매우 순수한 기법을 동원하여 강력한 환상의 힘으로 만든 꿈 세계의 구조물이다. 덕분에 섬뜩한 오목거울 방식의 가짜 현실이 생겨나는데, 처음에는 악몽처럼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운 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문학작품의 비밀스러운 의미가 독자에게 드러난다. 그러면 카프카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작품에서 구원의 빛이 나온다.


그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문장인가! 헤세는 카프카의 작품이 마음을 흥분시키는 경이로운, 기쁨을 주는 작품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 말을 그대로 헤세의 이 서평에 되돌려 주고 싶어진다. 이런 서평을 읽고서 카프카의 <소송>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당장 카프카의 <소송>부터 주문하고 말았다.


⁠2 주 전부터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헤세가 들려주는 토마스 만의 작품에 대한 서평은 얼마나 달콤하던지.

여섯 편의 작품들은 대부분 벌레스트와의 경계선에 닿아 있으며, 이따금은 어딘지 낡은, 저 정신 나간 '우스꽝스런 노래들'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터무니없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요, 역겨운 얼굴은 역겨운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만 우연일 뿐, 실은 고도로 계산되고 상세히 연구된 조명이다. 램프의 각도를 조금만 바꾸면 그 유령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친구들, 형제들, 사촌들, 이웃들을 알아볼 수 있으며, 이따금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게 된다. 이 사실을 발견하면 절반 경악과 절반 안도하는, 절반 만족과 절반 실망하는 느낌을 얻는다.


토마스 만의 단편집 <트리스탄>에 대한 헤세의 서평이다. 헤세는 이 책이 그 해 나온 가장 섬세한 진미로 꼽을 만하다고 평한다.


헤세의 서평집을 보는 재미는 헤세가 읽은 책과 그 책에 대한 헤세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그의 유려한 문장에 취하는 데 있기도 하지만, 헤세의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를 읽는 데도 있다. 헤세의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상을 받기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나중에 이 작품이 헤세의 작품이라서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에 대한 헤세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사람들이 익명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하도 하다 보니 헤세도 뭔가 할 말이 있었나 보다. 그는 '평론가는 멋대로 작가를 분석할 권리를 지니며, 또한 작가에게 중요하고 거룩한 것을 멍청한 짓이라고 선언하거나 공개토론의 장으로 끌어낼 권리도 있다. 하지만 평론가의 권리는 여기까지다. 평론이 꺼내지 못하는 비밀들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작가에게도 혼자서만 아는 작고 소중한 비밀을 지킬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헤세만이 알겠지만 평론가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헤세의 강단 있는 모습이 멋지다.


헤세의 서평집 뒤에 있는 동양 서적에 대한 서평들은 서양인이 동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한편, 그가 동양의 서적이 서양에 알려지기를 얼마나 소망했는지, 또 동양 서적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2015년의 시작 즈음에 너무 좋은 책을 만났다. 올해 이 책과 더불어 책 여행을 하게 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