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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에 관하여 - 숭고하고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단상들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미디어윌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고르는 눈이 아직 없을 때(물론 지금도 책을 보는 눈이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과서에 나온 적이 있는 책의 제목을 따라다녔다. 일명 고전이라고 불리는. 물론 지금도 고전을 간혹 읽기는 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이 모두 걸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걸작이라는 의미가 과연 무얼까?- 샤를 단치는 이 책에서 바로 이것에 천착하고 있다) 적어도 실망은 시키지 않는다에 만족했다.
과연 우리가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쳐들만한 걸작이란 무엇일까? '걸작'이라는 단어는 18c 중반 문학에 등장했다. 그 뒤 300년에 걸쳐 걸작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걸작에 대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그래서 작가 샤를 단치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부정확하고 깨지기 쉬운 '문학의 걸작'이라는 개념에 감히 도전하는 용감한 책이다. 그래서 많은 논란 속에 빠질 만하다. 어떤 이는 샤를 단치가 걸작이라고 치켜세운 책에 대해 감히 '쓰레기야'라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고, 걸작이란 의미는 그게 아니야 하고 부정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는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단호함과 신랄한 말투처럼 그런 소리쯤은 아무것도 아닌 양 거침없이 내달린다.
샤를 단치는 걸작의 기준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 했다. 왜냐하면 걸작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이 걸작 하나하나를 절대적으로 보이게 하기까지 한다. 걸작들은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걸작도 과거의 걸작과 다를 것이다. 걸작은 평범함과의 단절이다.
걸작에는 특정 주제가 없다. 걸작은 어떤 신념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걸작은 증명하지 않는다. 문학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걸작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책을 찬양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책을 문학의 영역에서 빼내어 방법, 맹신, 미신이 지배하고 심판과 취향이 부재하는 세계로 편입시킨다. 사람들은 풍문으로 듣고 풍문으로 읽은 것을 가지고 말한다.
걸작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으로 세상을 완성시켜준다.
걸작은 새로운 영토의 정복자이고 우리의 영토를 넓혀준다. 협소한 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덜 편협하게 하고, 덜 경직되게 하고, 덜 메마르게 하고, 덜 무미건조하게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광대하다.
프루스트는 자신이 게이임에도 자신을 게이라고 암시한 기자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와이드는 자신을 남색가로 취급했다고 연인의 부친을 고소했다. 사람이 인물보다 덜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와일드와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 걸작을 썼다. 그런데 걸작은 걸작을 쓴 작가들에게조차 인생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샤를 단치의 걸작에 대한 論을 듣고 있다 보면 과연 걸작은 많은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걸작에 대해 뭐라 말하든 걸작은 잘 견뎌냈다. 하지만 샤를 단치의 말처럼 독자도 걸작과 마찬가지로 잘 견뎌야 한다. 강요당한 진부함을 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직접 판단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 아니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평가해야 한다. 독자는 걸작을 지키는 보초병이다.
프루스트를 읽으면 프루스트가 된다.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되고 푸시킨을 읽으면 푸시킨이 된다. 그들의 인물이 되고 그들의 배경이 되고 그들의 감정이 되며, 그들이 된다.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걸작! 그런 걸작을 만나고 싶은 독자는 많다. 그리고 그런 작품에 목말라있다. 많은 걸작이 계속해서 탄생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