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
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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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과 악이, 그리고 앞과 뒤가,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구분되는 세계를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끝없이 알아가고자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서 벌어지는 많은 상대적인 현상들을 감당해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갈 때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정돈되고 질서 있고 정해진 길, 잘 닦인 길을 가는 마르그레트( 주인공 니나의 언니)와 슈타인박사( 니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인물)와 그 반대편에 놓인 강하고 순수하며 용기를 가지고 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살아가는 니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주인공들은 1930~1940년대 혼란의 독일에서 살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역사의 중요한 사건의 주인공이기보다는 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으며 그 삶의 모든 것이 역사와 맞물려 있지는 않다. 하지만 언니 마르그레트와 슈타인박사는 현실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며 현실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쪽을 택했지만 니나는 슈타인박사의 사랑을 이용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택할 수 있음에도 고통 속에 있는 쪽을 선택한다.

이 소설은 언니 마르그레트를 '나'라는 화자로 내세우며 오랜만에 만난 두 자매가 38살 니나의 생일에 맞춰 보내온 이미 세상을 떠난 슈타인 박사의 일기와 편지, 메모를 바탕으로 '니나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슈타인 박사가 38살에 만난 니나는 그의 삶의 의의가 된다. 오직 한 여인을 통해서 생의 의의를 느끼는 슈타인 박사의 일기와 편지는 서로 다른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니나의 진술과 엇갈린다.


너는 이 여자아이를 간직하기가 힘들 거다.

그 여자는 너의 엷은 공기 속에서는 살 수 없을 거야.

열과 동요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여자니까.

그 여자는 많은 위험을 감행할 여자다.



아테트 아주머니의 이와 같은 말처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은 비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슈타인 박사는 무감각하고, 저항성이 없고, 생의 의의를 오직 한 여인에게만 두고 있으며, 명확하게 정돈된, 일정하고 질서 있고, 뚜렷한 경계가 있는 생을 지향한다. 하지만 니나는 강하고 순수한, 용기와 패배하지 않는 생에 대한 호기심을 지닌, 결단성을 가진 그런 여인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아무런 경계도 없는 공간을 갖고, 미래로 열린 생이라는 한가운데에 선 니나는 그녀의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은 그걸 결코 알 수 없고, 그것을 한번도 묻지 않는 사람은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라는 말처럼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슬픔도 감내하면서 살아간다. 고통의 한복판의 고통도 닿지 않는 피안 지대에 있는 그 기쁨, 승리에 넘친 긍정을 니나는 본 것일까?


이 소설 속 니나는 소설가다. 그녀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에 이 소설이 끌고 가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 담겨있는 듯하다.

독자는 질서 정연함을 원한다. 그러면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결혼도 죽음도 다만 외관상 결말에 불과해. 생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그렇게도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고 모든 게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생은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논리도 없다. 우리는 그저 살아낼 수밖에 없는지도. 그렇지만 또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삶이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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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폭탄이다
박웅현.TBWA 주니어보드와 망치.TBWA 0팀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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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Create라는 말은 라틴어 creare에서 나왔다. 그 말은 make, produce 즉, 만들다, 생산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왠지 창조의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창조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일.(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create는 신이 만든 것을 훔쳐오는 일이 될 것이다. 알게 혹은 모르게. 그래서 이제 창조는 편집이 되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남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지만, 같은 것을 보더라도 혹은 듣더라도 무심히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평범이 비범이 된다.

그 평범을 비범으로 만드는 과정, 바로 그것이 이 책에 들어있었다. <책은 도끼다>와 <여덟 단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광고계의 대부, 박웅현 그가 속해 있는 TBWA의 O 팀이 만든 <사람은 누구나 폭탄이다>는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주인공들(14명의 청춘들)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고, 여행하고, 스펙을 쌓고, 고민을 한다. 이런 그들에게 같이 고민할 수 있는 7명의 멘토가 주어졌다. 이 멘토들은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찾을 수 있게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었다. 사소하고 하찮은 아이디어를 짓밟지 않고 그 아이디어를 더욱 풍부하게 디테일하게 만들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창의성이란 과정을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는다. 잘하는 것은 칭찬해주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는 것. 디즈니와 픽사처럼.

픽사의 애드 캣멀은 신뢰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사람이 없으면 아이디어도 없다. 사람이 아이디어보다 중요하다. 망치의 멘토들은 이들 젊은이들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적극적 시선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지도했다. 그 순간 멘티들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뒤로 숨겨두었던 진실을 찾아내고 '나'를 찾아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친구들의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들이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책 중의 한 멘토가 답을 해주었다.

'백지 같은 아이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다 백지예요. 망치한다고 갑자기 백지가 까맣게 될 리는 없는 거다.'

그렇다. ​20대 초반 사소한 차이는 있겠지만,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사소한 차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소한 차이에서 발견되는 가치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학생들의 삶이 거기서 거기지만 그 사소한 차이가 가치를 만든다.

책 속 밑줄 긋기​

창의성, 내 안에 있거나, 어디에도 없다.

기준점을 안으로 옮기자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뻗어 갔다.

내 이야기니까, 내 안에 이미 답이 있으니 과정에 대해 융통성이 생긴 거다. 기준점을 어디에 찍느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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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작가의 옮김 1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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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누구일까? 아침에 일어나 눈을 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주방으로 들어가 싱크대에서 쌀을 씻는 나인가? 길에서 느닷없이 자전거의 가격을 물어보고 대답해주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어른을 보며 '저 어르신은 대답을 해주지 않는 아이가 버릇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 아이는 전혀 모르는 자신에게 갑자기 자전거의 가격을 묻는 저 어른이 황당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나인가? 검은 머리에 약간의 어두운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동그란 얼굴이 나인가? 레깅스와 면티를 즐겨 입고, 운동화를 주로 신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이 나인가?

이 책은 읽는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갑자기 낯선 형식의 문장들 속에서 독자가 길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문장은 마냥 건조하기만 하다.
나는 해외에서 3년 3개월을 보냈다.
나는 내 왼쪽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는 나를 배신하고 떠난 친구가 있다.
이런 유의 문장을 맥락 없이 마구 연결해놓았다. 아니 연결하지 않고 늘어놓았다. 이 문장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설명도 없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원인과 결말은 이 작품에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 그저 작가인 에두아르 르베가 한 것, 하지 않은 것, 좋아한 것,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문득문득 읽는 독자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적어도 한 부분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작가가 이 작품 안에서 진술한 것처럼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변명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 나의 가족은 이러저러하다 등으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그저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러티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개되는 예술은 시간을 정지하는 예술보다 즐거움을 덜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사진을 찍는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이 작품은 작가가 좋아하는 딱 그의 스타일대로 쓰였다.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인의 시도보다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의 중립성과 익명성이 더 흥미롭고, 사실적인 보고서가 가장 아름답게 비(非)시적인 시로 보인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백색의 글쓰기(주관적 판단과 평가가 배제된)를 꿈꾸는데 이 작품이 그런 시도로 보인다.
계획을 가지고 설계도를 그려서 형상화한 기념물보다 생활의 흔적인 유적을 더 좋아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보다 친절한 자서전과 같은 형식의 글보다는 읽는 독자가 상상하고 찾아내는 유적과 같은 자화상 같은 글쓰기로 독자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품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해가며 읽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보다 잠자리에 드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작가가 <자살>이라는 작품을 낸 뒤 열흘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이 작가의 작품에 환상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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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
에드워드 크레이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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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철학을 공부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말해 준다. 철학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쭉 훑어보는 철학사부터 공부해라, 혹은 한 사람의 철학자의 저서를 통독해서 그 사유를 따라가라, 그리고 요즘 많은 철학에 대한 책들이 하고 있는 방법인 현재 내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방법들이다. 요즘 많은 철학 책들이 하고 있는 내 현재 내 삶의 고민들 즉, 청춘, 사랑, 우정, 결혼 등의 물음에서 출발하는 철학적 공부는 책을 읽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지만 다시 삶의 단편들에 부딪쳤을 때는 평소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왜 나는 책처럼 사고할 수 없을까? 왜 철학자들처럼 논리적으로 고민을 해결할 수 없을까? 그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나의 철학 책에 대한 순례는 계속된다.

고유서가에서 낸 첫 단추 시리즈의 첫 권이 <철학>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크레이그는 철학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철학에 접근하게 한다.


보통 칸트의 네 가지 물음이라고 하는 철학의 고유한 문제들이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 그것이다. 그것은 인식론과 윤리학, 미학 그리고 사회철학의 문제다. 대개는 여기에 모든 것을 맞추어 서술하는 방식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올바름과 덕에 대한  플라톤의 고민이 들어있는 <크리톤>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보게 한다. <밀린다 왕의 마차>라는 무명 승려의 자아에 관한 성찰이라는 텍스트로 나는 누구인가에 독자를 고민에 빠뜨린다.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은 흄의 <기적에 관하여>라는 텍스트의 도움을 받게 한다.


이렇게 철학의 주요한 문제들에 대해 한가지 저작을 들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만이 사유하지만 모두가 의견을 가질 것이다를 믿는 작가의 선택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주제에 대해 가장 올바른 사유를 한 문제의 책을 들어 철학적 사유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고자 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지어 자신의 사진을 넣은 책의 한 부분에 전문직 철학자를 경계하라는 경고의 문구를 넣고 있다. 그의 충고 한 가지는 이렇다.

'여러분 자신의 분별력을 기르는 동안에는 오랜 세월을 견딘 훌륭한 고전들만 읽어라.'

철학이 문제를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할지, 그리고 나의 삶의 지도를 크게 바꿀지, 세상이 변할지, 내가 변할지 모든 것이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나의 삶의 지도가 보이는 환상도 경험했다. 이렇게 내가 변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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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 - 현대의학이 가로챈 행복하게 죽을 권리
브렌던 라일리 지음, 이선혜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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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전 시아버지와 같았던 큰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셨다. 폐암 말기 선언을 받으시고, 항암치료를 하고 계시던 중 6개월을 조금 더 사시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그보다 1년 전 가장 친한 친구를 위암으로 잃었다. 그 친구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위암이 온몸에 퍼져버린 상태로 암을 발견했고, 2년의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두 사람 다 결국은 병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큰 시아주버님은 병원을 떠나보지도 못하고 아니,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집에도 못 가보고 세상을 떠나야 했고, 내 친구는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필요에 따라 잠깐 입원을 하고 아니면 병원에서 진통제만 맞고 집에서 지내는 식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세상을 뜨던 날 새벽은 병원 응급실에서 있어야 했다.

둘의 삶과 죽음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더 존엄하고 덜 존엄한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이 올바른 치료를, 아니 적절한 치료를 받았는지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감히 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왜 우리는 모두 집이 아닌 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권리는 없는 것인지, 또는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 그리고 연명치료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과연 환자의 생명의 존엄성에 받쳐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얼마 전 존엄사를 예고했던 미국의 20대 여성이 작년에 자신이 예고한 대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스스로 죽을 권리와 생명의 존엄성, 안락사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흔히 '보라매 병원 사건'이라고 불리는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던 환자를 경제적인 이유로 퇴원하기를 원했던 부인과 그것을 허용했던 부인이 검찰에 의해 살인 혐의로, 의사 3명이 살인죄의 공범으로 기소된 사건과 폐암 말기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던 '김할머니'가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의 상태에 빠지자 가족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지만 병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소송을 제기했던 '김할머니 사건'이다.  

이런 문제가 시장논리에서 비롯된 것일까? 의사소통의 문제일까? 아니면 불합리한 시스템의 문제일까? 자칫하면 의사들은 목숨을 잃을 상황에 빠진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으로 법적 처벌을 받으며 살인자로 내몰릴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환자의 주장 사이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에 대해 <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의 저자인 브렌던 라일리 박사는 자신의 경험을 마치 의학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마치 카메라의 눈이 되어 병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 들여다보고, 때로는 환자가 되어 또 때로는 의사가 되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인간으로서 살면서 지켜야 할 아니 지키고 싶은 마지막 권리, 행복하게 죽을 권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해답은 '환자 중심'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생명 연장과 생명 연장을 위해 감수해야 할 고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은 생명 연장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불편과 고통을 감수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수명을 희생할 용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옳은 답도 틀린 답도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답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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