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유명사로 산다는 것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이다. 마냥 겨울일 것만 같았던 날씨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풀려버렸다. 잎을 다 떨구고 냉혹한 한파를 견디던 나뭇가지에 움이 트고 이른 봄꽃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어제와 오늘은 불과 몇 시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어제는 겨울이었던 듯하고, 오늘은 완연한 봄인 듯하다.

'봄날 얼음 풀리듯이 하라.' 이는 노자의 말씀이다. 경계가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어제는 겨울이었고, 지금부터 봄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사실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 꽃이 피었을까? 그 시점이 명확히 드러날 수는 있는 걸까? 이 세상은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가 모호한 것, 그 자체가 세계의 실상이다. 세계는 경계가 계속 중첩되는 모호한 상황의 연속이다. 이 모호함을 분명함이나 명료함으로 개선하려는 순간 우리는 실상과 멀어진다. 하지만 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명확한 진리를 배우는데 온힘을 다 쏟아부었다. 자연의 법칙, 사회의 규칙,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념, 혹은 세상의 기준 등을 배워왔다. 하지만 그 기준이 어쩌면 잘못된 인식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일 수도 있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경우 그 시점은 마흔을 넘기는 그 어느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동안 뱉어놓았던 많은 말들이, 옳은 길이라 여기고 행동했던 많은 일들이 모두 부끄러운 기억이 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한 적이 없었던 거였다. 나의 기준은 배운 대로 혹은 남이 옳다고 말한 데 있었다. 흔들리는 나를 잡아 세우는 것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그것 또한 남의 기준을 따르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시류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이론들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노자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뜬구름 잡는 격이었다. 아직 노자의 철학을 이해할 만한 내공이 쌓이지 않았음을 한탄하다가 최진석 님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만났다. EBS 인문학 특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라고 하지만 그 방송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나에게는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교수의 강의를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노자 <도덕경>의 몇 구절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특히 <도덕경>의 제1장의 다음 구절은 너무나 유명하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우리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저자인 최진석 교수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선 명名은 '이름'이라는 뜻이다. 명칭, 개념, 명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명可名은 '명칭화할 수 있다', 즉 '개념화할 수 있다' 내지는 '정의 내릴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어떤 대상에 대한 명칭을 개념화하거나 정의를 내리게 되면' 그것은 그 규정된 의미에 갇혀버려서 진정한 이름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정의 내리거나 개념 짓는 작업을 통해서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낼 수 없을 뿐이 아니라, 관계론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노자가 볼 때 이런 규정은 기준이 돼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왜 사랑을 정의 내리고 시작하려고 하느냐. 사랑하라. 그것이 너의 사랑이다. 너의 사랑을 하라.' 이 말은 노자가 지금 살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던지는 사랑의 충고일 것이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말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하거나 도피의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어떤 이념이나 기준을 근거로 하며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이념이나 기준을 밟고 선다는 뜻이다. 노자가 열린 철학자란 생각이 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영원히 보편타당한 철학은 없다. 각 시대에 맞는 어떤 유형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 이 시점을 살고 있는 나에게 노자의 철학은 깊은 울림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 자전거 타기에서 첫 키스까지, 학교에서 이사까지 내 인생의 20가지 통과의례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지음, 남경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태어났고,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하다가 말이라는 걸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까지는 내 기억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내 인생의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까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의 삶을 고찰한 한 철학자가 있다.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는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중요한 20가지의 순간에 여러 철학자의 견해를 들어 인생의 의미를 찾는 법을 말한다.


스포츠카를 받은 즉시 열쇠를 잃어버린 것(태어남), 걸음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말로써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걸음마와 옹알이), 처음으로 나 자신을 타자로 느끼는 곳(학교), 아빠가 자전거를 잡은 손을 놓을 때, 의심과 믿음의 갈림길에 선다(자전거), 선생님이라는 버팀목을 치우고 혼자 만나는 최초의 심판(시험), 키스는 침묵이며, 단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밀이다(첫 키스), 우리는 순결을 잃을 때 종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순결의 상실), 처음 만나는 신선한 자유, 그러나 동시에 통제를 받아들이다(운전면허), 한나라가 나를 가장 진지하게 대하는 순간(첫 투표), 제대로 취직을 하면 일하는 동물에서 일하는 인간이 된다(취직), 사라질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영원을 믿는 고백(사랑), 서로의 운명을 소유하기로 결정하다(결혼), 격렬한 낭만적 사랑에서 소중한 현실적 사랑으로(출산), 바로 그날까지 타인이 살던 불확실함 속으로 뛰어들다(이사), 결국 이디에도 올바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다(중년의 위기), 사악해질 수조차 있는 불행한 관계를 끝내는 정직한 수단(이혼),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아직 늙지 않은 모호한 순간(은퇴), 제3의 인생, 스스로를 신선하게 바라보다(늙어감), 우리의 사망은 다른 사람을 살게 한다(죽음), 죽음 뒤를 상상할 때 현재가 바뀐다(내세) 이렇게 20가지의 순간에 대한 감각적인 어휘의 뒤에 숨은 철학적 의미를 찾아내어 나의 삶의 의미 찾기를 도와주고 있다.

가장 재미있고 신선했던 부분은 자전거 타기였다. 어른들에게 자전거는 목적지까지 가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아이들에게 자전거는 특정한 목적지가 없이 달리는 장난감이다. 그 자유분방한 행동에서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 즉 '목적론'적 의도가 없다. 아이와 어른의 여러 가지 차이들 중 하나는 아이에게 목적론적 의도가 없는 것이다. 아이는 골을 넣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당면한 목표를 넘어 어디로 가거나 무엇을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는 구체적인 결과에만 집중하는 데 만족한다. 그래서 자전거 타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의 은유가 된다. 즉 자전거 타기는 유아성의 상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반대 방향, 즉 어른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유아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정복해버린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은 획득한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자전거라는 기계에 대한 기술적 정복이다. 이를테면 핸들을 조작하고, 브레이크를 너무 급히 밟지 않고, 페달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는 기술이다. 두 번째는 자아의 정복이다. 자전거 배우기의 특징은 처음에 자전거를 잡아주던 사람이 얼마 안 가 손을 놓는다는 점이다. 자전거 타기를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아도 그것은 순전히 의심과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잡아주던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타는 상태까지 가려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연속적인 궤적을 그리며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존재 질서 사이의 협곡을 뛰어넘어야 한다(즉 종속에서 독립으로, 안전에서 자기 결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혼자서 방향을 결정하고 자전거 위에서의 침묵을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와 닿았었던 주제는 '중년의 위기'였다.

저자는 중년의 위기는 그 세계를 끌어안고 그 기대와 절박함을 따져보는 시점이라고 했다. 중년의 위기가 새로운 것이 사라진 삶에 대한 반응이며, 아무 일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무슨 일이 생기게 하려는 악의 없는 시도다. 수명이 늘어나며 정의하기도 어렵고 문화적으로 정해진 형태도 없는 인생이 40퍼센트나 남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수명을 늘려주면서도 그 삶을 잘 이용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정년퇴직자 주택을 건설하면서도 부수 시설인 상점이나 영화관은 짓지 않는 부동산 개발자들과 같다. 최선의 치유책은 예방이다. 예방의 핵심은 '자아'에 있다. 그동안 바깥의 사건들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내 안의 종이 울리면서 아직 성찰하지 않은 내부를 성찰하라고 촉구한다. 중년을 비극이 아니라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 길을 찾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의미없는 시기라도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나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 시기였는지, 그리고 그 시기를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지나쳐버렸는지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내가 겪는 이 모든 시간들에서 의미를 느껴보려고 노력해보리라 다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가제본 형태의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목을 달고 나올지 저조차 궁금한 책입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인 면도 그렇고, 가제본의 형태의 책이기도 하고, 게다가 제목부터가 비밀스럽기도 한 (남편의 비밀이라니 결혼한 부인들의 입장에서는 상상력이 마구 작동하게 되는) 책이라 기대감에 얼른 펼쳐들었다.

우선 이 작품은 영화적이다. (당연히 영화화하기로 되어있다고 한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기승전결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문체에서 드러나는 밀도나 세밀한 정서의 묘사보다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드러나는 긴장감, 묘사되는 이미지에서 풍겨나는 정서, 그리고 대사와 대사 사이에 넘쳐나는 긴장감면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 소설은 세 명의 인물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를 줄기로 뻗어나간다. 우선 제목에서 나오는 남편의 부인인 세실리아의 이야기와 테스라는 여자의 이야기 그리고 레이첼의 이야기다. 다른 줄기로 보자면 베를린 장벽의 해체라는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이슈와 결혼이라는 문제와 부활절로 향해 가는 날들이 부여하는 죄와 구원의 문제로 상징되는 이야기들의 병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세실리아는 잘 생기고,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존 폴 피츠패트릭이라는 남자를 만나 세명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잘 나가는 여자다. 어느 날 베를린 장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베를린 장벽의 조각을 사 온 기억을 더듬어 그 조각을 찾다가 남편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 편지를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의 말이 적혀져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판도라처럼 세실리아는 이 편지를 열고야 만다. 그렇게 남편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펼쳐지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종결되지 않은 어떤 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으며,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는 있을지 염려된다.

또 다른 여인 테스는 펠리시티라는 쌍둥이 같은 사촌과 사랑하는 남편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변했다는 것을 알고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자니라는 딸이 어떤 남자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겪은 레이첼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체육 선생님인 코너를 의심하고 그 증거를 찾고 있다. 이야기는 성금요일을 거쳐 부활절에 이르는 일주일간의 시기에 일어나는 변화를 그렸다. 독자는 작품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인물이 악행이 아니라 악의는 없는 중대한 '과오'때문에 불행해져야 하는지, 남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를 벌주며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결말은 상당히 개운하고, 깔끔하다. 그래서 더욱 영화 같은 결말이 된다. 이 작품은 저변에 흐르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신이 인간의 일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숙제를 던져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가공하지 않은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참된 이치나 참된 도리, 또는 철학에서 말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지만 사실과는 다른 개념이라 한다.

​자연에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오로지 인간의 인식 체계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술어라고 한다. 진리는 '맞음, 진짜임'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타난 현상(appearance)와 실재(reality)의 일치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고 할 때, 정확히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벌어진 사실과 우리의 말 사이에는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들어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름발이 인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며 살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기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 보니 신뢰할 만한 사람이나 미디어에 의존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극단적인 절름발이 인식(자신의 생각과 다른 관점이나 정보는 배제하고 일치하는 내용만 받아들여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성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인간은 어떤 사건이 있으면 분명한 원인이 있을 거라고 믿는 쪽이다. 음모론은 벌어진 일로 인해 혜택을 얻을 누군가의 고의적 행위의 결과로 보려는 경향 때문에 호소력을 얻는다. 음모론은 나쁜 결과가 특정인의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결과나 단순한 우연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을 꺼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사건을 누군가의 고의적인 행동 탓으로 돌림으로써 지지를 얻는다. 즉, 음모론의 바탕에는 의도적인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있다.

특히, 정보 창출 기관이 체계적으로 감시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편향되거나 왜곡된 사회의 시민이라면, 예컨대 자유 언론이 부재하는 독재 정권 치하의 국민이라면 그들이 듣는 모든 공식적인 발표를 전부 또는 대부분 불신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안전장치가 부재하는 상황에서는 음모론이 사실일 확률도 높아진다.)

우리나라는 작년 4월에 이런 경험을 했다. '세월호'

음모론이 판을 쳤다고 말하지만, 이런 현상의 뒤에는 민주주의의 안전장치의 부재, 자유 언론의 부재 등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의 저자 캐스 선스타인은 이런 음모론에 대한 일차적인 대응책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꼽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음모론에 대한 인지적 침투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이전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민주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저자의 여러 편의 글 중에서 이 음모론에 대한 글이 가장 재미있고, 읽기 쉽지만 또한 눈여겨봐야 할 글이 있었다. 바로 최소 주의와 중간 주의에 대한 글이다. 명확히 선과 악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에는 이 두 가지의 입장이 다소 불명확하거나 혹은 회색주의자로 보이거나 심지어는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게 충동하는 두 개의 의견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분열하기보다는 작은 걸음이나마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견이 엇갈리는 추상적인 사안,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수준으로 한 단계 내려감으로써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 또한 중간 주의자들은 상충되는 의견들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강렬하게 느껴지면, 가치 있는 것을 찾아 지켜가고자 할 것이다.


이 책은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낯선 용어와 문장 사이에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잘못된 건가 하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번역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의 투덜거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가 아니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굴었는데,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기분,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이 작품은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니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교육과 삶의 현장을 그렸다. 하지만 특히 더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교육 1번지(사실은 사교육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마땅하다)인 대치동의 바로 옆에서 부와 성공에 대한 노골적인 욕망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잠실동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만약 대치동의 이야기라면 '너희들의 이야기'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실동이라면 '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적인 읊조림이라도 해 볼 수 있겠다 싶다.

대출을 받고 친정의 도움을 등에 업고 잠실의 리센트 아파트에 전세집을 마련한 지환 엄마, 유학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며 아이들 교육에만 올인하는 해성 엄마, 남편이 벌어오는 알 수 없는 돈을 바탕으로 아이들 교육에 힘쓰는 태민 엄마 그리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잘 나가던 의사의 길을 잠시 놓고 페이닥터로 일하며 손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훈 엄마, 잠실동에서 학습지 교사를 하는 이, 초등학교교사, 지방대를 나와서 영어 과외를 하지만 자신의 학교와 경력을 속일 수밖에 없는 과외교사, 힘든 집안 형편이지만 몸을 팔아서 학배를 벌 수밖에 없는 대학생 서영, 이들이 연주하는 욕망과 불안의 변주곡은 독자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아프게 한다. 

왜 이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아이들은 미래다. 부모들은 아이를 가질 때 아이가 실현해 줄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미래를 사랑한다. 자식을 앞세워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 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여전하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 저급하게 부모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한다. 어느 책에서 곤궁한 부모는 자신의 곤궁을 해소하기 위해 자식을 착취한다고 했다.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부모들은 현재의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아니 적어도 자식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아이의 미래를 기획하고 만들어가려고 한다.

해성 엄마, 태민 엄마, 지환 엄마 그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누구세요? 아이들을 배제하고 나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나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내'가 해야 한다. 왜 우리는 욕망하는가?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있을까? 문제는 시스템에, 사회구조에 있는 것이다. <잠실동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꿔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