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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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무척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다. <이미테이션 게임>

하지만 이래저래 바쁜 와중에 영화는 내려졌고, 결국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 했다. 앨런 튜링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접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보트라는 잠수함과 애니그마라는 암호로 꼼짝없이 지게 된 전쟁에서 앨런 튜링이라는 수학자가 그 암호를 해독해 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지만, 이 이상한 수학자는 성격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 동성애자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 당시 범죄로 여겨졌던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지만, 본인은 에스트로겐을 주사하는 방식의 화학적 거세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사과를 베어먹고 자살해버렸다는 어느 모로 보나 앨런 튜링의 이야기는 어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애플의 로고가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아니겠는가.


스티브 잡스의 답변으로는 애플의 로고는 앨런 튜링과는 전혀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앨런 튜링과 컴퓨터계의 강자 애플, 그리고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빛깔의 애플의 로고와 동성애자였던 앨런 튜링, 세상을 바꾼 사과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앨런 튜링이 마지막 자살의 방법으로 택한 독이 묻은 사과 한 입은 애플의 적극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더 흥미를 끌어들인다.

이 책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은 얼마 전 상영된 <이미테이션 게임>의 원작은 아니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인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는 작가의 죽음으로 중단된 <밀레니엄>시리즈의 4부 작가로 공식 선정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잘 알려진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는 앨런 튜링의 자살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의 시각에서 기술하기 시작한다. 레오나드 코렐이라는 28세의 윔슬로우 범죄수사과 경장은 말보로 칼리지를 졸업한 수학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자살과 이모의 동성애로 인해 세상과는 동떨어진 채 숨어살 듯하는 사람이다. 그는 앨런 튜링이 약을 냄비에 끓이고 천장에서 전선을 뽑고 사과를 반쪽 내는 등 호들갑을 떨고 자살한 이유가 궁금하다. 앨런 튜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는 수수께끼 풀이는 정보를 감추려는 쪽과 파헤치려는 형사와의 관계를 엇갈리게 서술하며 극적인 방향으로 몰로 가려 한다. 하지만 이미 앨런 튜링이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고 훈장을 받았으며 동성애자로 재판을 받고 화학적 거세를 당한 사실이 있음을 알고 있는 독자의 흥미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했다. 오히려 앨런 튜링이 암호를 해독하는 긴박한 과정이라든지, 숱한 수학자와 언어학자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다루었다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예측 불가능한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가치는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와 이론이 힘을 얻게 될 때 앨런 튜링의 말은 오히려 생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앨런 튜링을 자살로 끌고 간 것들에 대한 뻔히 알고 있는 사실 말고는 더 이상 밝혀진 내용이 없어 조금 실망스러웠다. 1930년대 세상을 예전처럼 보면 안 되던 시기, 시간도 공간도 절대적이지 않았던 때,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들 대부분이 잘못이거나 진실의 일면에 불과하다고 밝혀졌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혼란의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앨런 튜링도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돌발적이고 위험한 일을 했고, 역설과 모순이 지배하던 시기에 죽음을 택했다. 우리는 앨런 튜링의 죽음으로 인해 그 당시의 혼란과 격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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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0 English 하루 30분씩 30일이면 중학교 교과서가 들린다 3030 English 듣기 시리즈 1
김지완.김영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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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다짐은 새해가 되는 즈음에는 언제나 하는 다짐과 계획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는 일은 드물다. 이유는?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딱히 취직할 일도 없고, 아이가 다 커버려서 공부할 일도 없는)
항상 생각에만 존재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 나에게 30분씩 30일이면 중학교 교과서가, 고등학교 교과서가 들린다는 교재가 왔다.
물론 듣기 교재는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가 된다.
이제 두 달간 영어 공부 시작이다~~


우선 이 책은 중학교 고과서 듣기와 고등학교 교과서 듣기가 나와있다.
이제 곧 영화가 들린다와 뉴스가 들린다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 전에 이 두 책을 열심히 공부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생긴다.

 

 

 


우선 오로지 하루에 30분 다른 생각 다 버리고 영어 듣기에만 몰입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페이지를 만난다.


 

 

 


우리말은 잘 들지지 않는가?

영어만 안들리는 귀는 없을 것이다.


귀에는 이상이 없단다.ㅎㅎ


 


하루에 공부할 분량이다. 듣고 풀기


 


해석해 보기, 또 듣고 풀기


 


다시 듣고 해석하기, 듣고 풀기

 

 

 


세 번째로 다시 듣고 해석하기, 이제 듣고 받아쓰기 


 

 


그리고 바꿔 말하기가 마지막 과정이다. 자 이제 공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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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꿈결 클래식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이병진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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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무척 잘 읽히는 책이다. 간결한 문체와 다소 말장난 같은 별명 짓기, 무모해 보이기만 하는 주인공 나의 돌발행동 등이 마치 청소년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 예를 들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많은 독자들이 읽다가 포기한 작품이라고 한 것과는 다르게.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그의 대표작이지만 끝까지 읽는 데에는 많은 집중력과 인내를 요한다. 하지만 <도련님>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세키의 입문서로 제격이다.


<도련님>의 주인공 나는 무모함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인물이다. 나는 무모함으로 인한 실수로 이어진 삶을 산다. 그가 특히 싫어하는 것은 남몰래 자신만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이런 그가 한 시골학교에 수학 선생으로 가게 되며 겪는 이야기가 바로 <도련님>이다. 여기서 도련님이라는 말은 주인공 '나'를 하녀가, 혹은 조금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임과 동시에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비아냥거리며 일컫는 의미도 된다. 아무튼 이런 '나'라는 인물이 시골학교에서 만나는 여러 인물들은 그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의해서 너구리, 빨간 셔츠, 끝물 호박, 아프리카 바늘두더지 등의 닉네임으로 불린다.


문학사 학위를 가진 교감은 묘하게 여자같이 상냥한 목소리에 여름인데도 모가 섞인 빨간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어 빨간 셔츠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상냥한 척 교활한 인물로 끝물 호박(영어 선생)의 약혼녀인 마돈나를 가로챈다.

얼굴색이 몹시 안 좋은 영어 선생인 고가​는 끝물 호박을 먹어서 창백하게 부은 듯 보여 '나'에 의해 끝물 호박으로 불린다. 그는 약혼녀를 빼앗기고도 성인군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다.


<도련님>의 주인공 '나'는 1900년대 초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요즈음의 인물이라는 편이 맞겠다. 어느 면에서는. 그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며, 지위의 고하에 따른 불공평에 분개한다. 그는 차라리 하녀, 기요가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요는 비록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분도 낮지만 인간적으로 대단히 고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난 학교라는 사회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차라리 그는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범이라든가 남을 이용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고 비웃는다.


기회주의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일삼는 근대사회의 인물상에 대한 해학적 꼬집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장기인 듯하다. 그가 내건 정직과 단순함의 '나'라는 인물이 아름답고 용기 있어 보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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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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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1926년에 지베르니라는 마을에서 수련을 그리다 죽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수련은 자그마치 272점에 이른다고 하니 죽기 전 27년간 오로지 수련만을 그린 듯하다. 인상파의 문을 열었던 모네는 다양한 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평생 화폭에 담지 않은 색, 결단코 사용을 거부한 색이 있다고 한다. 그 색은 '색의 결여'이자 '모든 색의 혼융'인 색, 즉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1926년 12월 초 죽음을 며칠 앞둔 모네는 자신이 떠날 것을 알고 검은색의 수련을 그렸다고 하는데 단지 전설일까? 과연 <검은 수련>은 무엇일까?

​미셸 뷔시의 <검은 수련>은 제목에서 위와 같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이 책은 처음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단서로 주면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정원 지베르니에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첫 번째 여자는 심술쟁이 방앗간에 산다. 미망인이 될 예정인 84세의 여인이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두 번째 여자는 복층의 관사에 사는 32살의 스테파니 뒤팽이고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곧 남편을 배신하고 사랑을 찾아 떠날 예정이다. 세 번째 여자는 모든 남학생의 선망의 대상인 이기적인 11살 소녀로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아버지를 찾고자 하며 곧 떠나려고 한다. 


다음​ 이야기는 첫 번째 날,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라는 마을에서 제롬 모르발로라는 안과의사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는 칼에 찔려 물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발견된다. 이런 식으로 칼에 찔리고 물에 빠져 사람이 죽었던 방식은 1937년에도 있었다. 그때 죽은 사람은 11살 된 알베르 로잘바라는 남자아이였다. 이 두 사건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일까?


로랑스 세레낙과 실비오라는 형사들은 누군가 던져 준 것 같은 단서를 토대로 살인사건을 쫓아간다. 혹시 이것은 단서를 던져 준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독자는 궁금해진다.


<검은 수련>은 방앗간에 사는 늙은 여인인 '나'의 1인칭 독백과 3인칭 시점의 글이 서로 교차되며 전개된다. 또한 세 여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묘하게 얽히며 시간을 뒤섞어 버림으로 해서 독자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독자는 이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내야 답에 도달할 수 있다. 게다가 독자는 사랑의 광기라는 인간의 저 밑바탕에 숨어있는 욕망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광기를 찬양한다. 성당을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 이것만 보더라도 결국 이 성당에 관한 허황된 꿈을 가졌던 사람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광기! 사랑도 광기를 포함한다. 이 광기로 똘똘 뭉친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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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인문학 -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시드페이퍼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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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라는 뜻을 지닌 관觀이라는 한자는 부엉이 환雚자와 볼 견見자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두 눈이 특징적인 올빼미나 부엉이류의 새 혹은 그러한 눈을 가진 새는 뛰어난 평형감각으로 어두운 밤에도 나무 사이를 다니며 먹잇감을 잡는다. 그래서 관觀이라는 한자에는 '양쪽을 대비해서 균형감각을 가지고 본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관찰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견해나 목적이 배제된 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임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매일 남편과 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묻곤 하는데 서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나는 너무나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가게를 남편은 그런 가게가 어디 있느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물론 똑같이 남편이 본 것을 나는 전혀 본 기억이 없기도 하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내가 이미 볼 거라고 예상했던 대상들만 보았던 것이다.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밖의 다른 것을 무시하고 있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관찰의 인문학>은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들에 주목한다. 저자는 자신과는 다른 시선과 생각을 가진 서로 다른 직업과 전문분야를 가진 이들과 산책을 하면서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기도 하고 지겨웠던 것들이 이야기를 담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은 모두 '직업적 왜곡'이라는 특정한 편향성이 존재한다. 바로 모든 상황을 자신의 직업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경향인데 그렇게 서로 다른 전문가들에게 배우는 관찰은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아들과의 산책은 걷기가 때로는 걷지 않는 것임을, 산책은 버려진 물건, 잊힌 물건을 발견하는 고고학임을 느끼게 해준다. 지질학자와 함께 하는 산책에서 저자는 소위 인공물이라는 것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료들을 해체하고 조합해 사람의 목적에 맞게 다시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질학이다.

타이포 그라퍼와 함께 한 산책에서는 글자들이 펼치는 향연을 보게 된다. 곤충박사와 함께 하는 산책은 생각지도 못한 벌레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사실 즐거움은 발견하는 행위 자체에 있다. 곤충을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은 탄생에서 폭력적인 살해,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환 주기의 비디오를 빨리 감기로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을 관찰하려면 한 곳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 한 곳에 더 오래 서 있을수록 더 많은 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보게 될지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대로 인해 시야는 어느 정도 제한된다. 어떤 의미에서 기대는 집중의 잃어버린 사촌과 같다. 둘 다 '외부 세계'에 대해 처리해야 하는 분량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집중과 기대는 우리가 코앞에 두고도 무언가를 놓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를 부주의 맹시현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도시에서 동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을 보지 못한다. 저자는 야생동물 전문가와의 산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쥐와 새를 만난다.


마치 여행을 떠나 낯선 장소에 있을 때 온몸의 감각기관이 활짝 열리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 걷는 길을 낯선 장소처럼 바라보고, 여행자처럼 걷는다면 조금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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