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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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문득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왜 이 인물을 등장시켰을까?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물론 독자는 궁금하다고 해서 작가에게 물어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나름대로 해석만 할 뿐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서 혹은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바를 통해서. 그렇게 나름의 독법으로 본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간 읽었던 소설들과는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책 속에 언급된 것처럼 무지의 상태에서 혹은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 저지른 행위의 잘못으로 파멸에 이르며 그 파멸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그동안의 주인공과는 달리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 살인범이라는 주인공은 파멸 속에서 살았고, 망각으로 이어지다 무지로 생을 마감한다.

25,26년 전 살인을 멈춘 노인네인 주인공의 살인을 추동한 힘은 아쉬움이었다고 한다. 어떤 아쉬움? 그것은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문득 살인을 멈춘 이유는 그런 희망이 사라져서였다고 한다. 살인을 멈춘 그가 기억력이 점차 쇠퇴해지며 살인 과정의 기록, 일지를 쓴다. 그렇지만 그는 살인 과정에서 느낀 희열과 안타까움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걸 힘들어한다. 그는 또한 문화센터에 다니며 시를 쓴다. 시와 살인, 시인과 연쇄살인범 그가 갖는 두 모습은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데서 만난다. 하지만 또 그것을 마음속, 머릿속에만 두지 않고 글로 표현한다는 아이러니를 갖고 있는 존재다. 차라리 다 잊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존재.

그렇지만 그가 기억해내려 애쓰는 그 기억조차 잘못된 기억일 수 있다. 자신이 딸이라고 여겼던 여인이 자신을 돌보는 도우미였고, 자신이 죽인 희생자의 딸을 자신이 입장해서 딸로 키운 줄 알았는데, 사실은 벌써 죽였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그 기억마저도 망각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화려했든, 혹은 얼마나 비참했든 또는 얼마나 위험했던지 간에 우리는 공(空)이 되어 사라진다.


 

책에 나온 한 줄의 글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키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라는 말에 답이 있을까? 결국 죽음이라는 것은 망각과 무지로 진행하는 삶 앞에서 숱한 연쇄살인도 시시한 술자리의 발광으로 끝나는 건가? 아니면 오이디푸스처럼 깨달음을 얻었지만 무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죽는다는 그것밖에는 없지 않은가? 空 공으로 돌아감? 그 말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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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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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한 책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를 다소 곡해하고 강요처럼 느꼈던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를 읽으며 그랬던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랬던 나는 중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가 권해 준 이책을 오랫동안 밀쳐두고 읽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읽었다. 아직도 내가 청춘인 줄 착각하고 사나보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음을 기본으로 장착한 인간, 프로메테우스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에피메테우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이렇게 청춘을 낭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 책을 읽으면서 청춘은 청춘이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오히려 나머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꿈들! 언제나 꿈들을!"이라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 맞는 양의 천연적 아편을 자신 속에 소유하고 있는 법. 이 끊임없이 분비되며 새로워지는 아편을"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였습니다. 그 아편의 대부분은 스무 살 무렵에 만들어집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슬퍼하고 더 많이 갈망하시길. 자신의 인생에 더 많은 꿈들을 요구하시길. 이뤄지든 안 이뤄지든 더 많은 꿈들을 요구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당신들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그러니 지금 스무 살 이라면, 꿈들! 언제나 꿈들을! 더 많은 꿈들을!

그런데 위에서 말한 다량의 아편을 우리의 아이들은 가지고 있을까? 꿈이 없는 아이들, 누구나 비슷한 꿈을 꾸는 아이들, 그래서 문득 걱정이 앞선다. 특히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이.


지금 당장 내게는 한 권의 책이면 충분하니까요. 제게는 미래라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당장 바로 앞의 시간이 미래인 거죠. 지금부터 30년까지, 이런 식으로 집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집합적인 미래를 대비하자면, 지금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얼마나 벌어야만 하는지 계산이 안돼요. 그래서 당장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 일단 돈을 버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집합적인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장 눈앞의 순간, 지금뿐이에요.


​그들에게 김연수의 위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집합적인 미래를 생각하지 말자고. 지금 바로 눈앞의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그들은 모호한 미래를 꿈꾸며 찬란한 현재를 담보로 매달려 있다. 하지만 진짜 청춘은 남는 시간 따져보지 않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은 그들이어야 한다. 빈둥거리며 탐색하는.

남는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나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탐닉했죠. 심지어는 빈둥거림까지도 탐닉했어요. 중년이 되면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해지죠. 그러다 보면 점점 고전 쪽으로 관심이 기울게 돼 있어요. 독서를 통한 치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됐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청춘이란 시간이 아주 많이 남은 상태, 그래서 뭔가에 그 시간을 쏟고 나면,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시간만 흐른다면 저절로 끝나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생각해요. 해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때는 청춘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노랫말처럼 젊을 때는 젊음을 몰라요. 인류가 계속되는 한, 청춘의 무지는 반복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청춘의 문장들>을 읽는다고 해서 젊은 독자들이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야겠다, 뭐,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건 무리겠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 대충 살아도 됩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기도 하고, 그냥 시간만 보내기도 하고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너무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잖아요. 젊었을 때는 천 년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으면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요. 하지만 그런 낮을 보낸 날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밤에 대개 우리는 혼자겠죠. 그런 밤이며 아마 시간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청춘은 무거워요. 빨리 늙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그럴 때 저는 저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장들에 줄을 그었죠.


젊을 때는 젊음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다시 나오는 10년 뒤 그때에는 알겠지.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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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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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로 다시 돌아와 그림을 유심히 보게 된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보이는 길을 따라 떠나는 여인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속죄>의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는 이제 막 결혼한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불과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 때문에 어긋나 버린 사랑의 이야기다. 1960년대 영국의 잘 배운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은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며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에게 말하기 힘든 고민이 있다.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에 대한 뜨거운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만, 연애의 긴 과정 동안 플로렌스가 고귀한 모습을 보이며 신체적인 접촉에 대해 거부 의사를 보임으로써 자신 또한 순결을 유지하고 있다가 결혼 첫날밤 의식을 치르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처음 겪어야 하는 일이라 두려움을 갖고 있다. 반면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접근이 두렵고 심지어 구역질이 나기까지 한다. 하지만 막상 에드워드의 손길은 더 많은 것을 갈구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할 수 없었다. 작가는 이들의 문제가 비단 개인의 의식의 문제만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피로연은 성대했고 시간도 어지간히 연장되었던 터라 그들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니 음식을 포기하고 와인을 병째 든 채 해변으로 뛰어내려가 신발을 벗어던지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이론적으론 그랬다. 호텔에서 그런 그들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성인이고 신혼여행 중이니까 뭘 하든 자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그들을 붙들었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단둘이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수천 가지의 비공식적인 관습들이 적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성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준비한 식사를 먹지도 않고 가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저녁식사 시간이었고, 철이 없으면 존경받지 못하며, 그런 사람이 드물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시대가 원하는 도덕을 가지려고 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그런 주인공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일, 그리고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게 어긋난 그들의 인연을 에드워드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본다. 그때 그녀를 잡았더라면, 그녀를 소리쳐 불렀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나중에야 이해가 되는 말과 행동과 상황들. 우리가 그런 이해를 그때 할 수는 없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달라져버린 삶. 그렇다면 무언가를 했더라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에드워드가 체실 비치에서 플로렌스를 큰 소리로 불러 그녀를 붙잡았더라면 그들은 오해를 풀고 사랑과 이해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의 목소리가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오해의 늪으로 빠져버려 혐오의 감정이 더 생겨버렸다면 어땠을까?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사랑이 어긋나버린 것, 나중에 그 사랑이 문득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그 뒤에 만난 사랑이 그들의 사랑을 뛰어넘지 못할 그저 그런 만남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끝났을지도 모르는 사랑은 아쉽게도 더 안타까운 후회를 남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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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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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농협의 창구에서 한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직원에게 '그러니까 공인인증서를 주라니까~'라며 끝도 없이 반복되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직원이 인터넷뱅킹을 하시면 돈이 안 들고 할 수 있고 어쩌고 하면서 안내를 하자 어르신이 그걸 하시겠다고 하셨고, 그렇게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직원이 계속 설명을 하면 어르신은 알았다고 하시고선 마지막 말은 '그러니까 그 공인인증서라는 걸 달라고~'였다. 공인인증서는 인터넷에서 신청해서 다운로드해 쓰시는 거라고 다시 말하는 직원과 모든 말을 다 듣고서 다시 그 공인인증서를 달라고 또 반복하는 어르신 때문에 기다리는 우리들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마치 그때의 그 노인처럼 오베라는 사브를 모는 59세의 남자는 컴퓨터​가게에 가서 아이패드를 휘두르며 컴퓨터냐고 묻는다. 점원은 그것이 태블릿이라고 불리는 거고 인터넷 서핑도 가능하다고 하지만, 오베는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컴퓨터'냐고 묻는다. 직원은 그렇다면 랩톱을 쓰시라고 말하지만, 오베는 '랩톱을 원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를 원하다고 말한다. 키보드도 없는 이상한 그 물건을 컴퓨터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분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처음은 이렇게 '지금'을 이해하지 못하는 앞뒤가 꽉 막힌 오베를 만나게 해준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꼰대를. 컴퓨터와 늦잠을 자는 것 등 다른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남자인 오베는 자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이고 그의 부인은 온통 색깔로 이루어진 여자였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사브를 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물건을 스스로 고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규칙을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을 반듯하게 둘로 나눠 생각하는 오베는 오직 부인만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부인이 죽고 나서 그는 세상과 말 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로지 죽겠다는 목적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이웃들, 운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웃​과 볼보를 BMW로 바꿔버린 이웃과 걸핏하면 거주자 지역에 차를 끌고 들어오는 흰 셔츠를 입은 자들, 오베에게 세상은 짜증스러운 곳이고 얼른 사랑스러운 부인의 곁으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원이다. 하지만 오베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자꾸 늘어난다.

독자는 오베의 입장이 아니라 이웃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이웃에 이런 할배가 산다면 그건 좀 힘들겠다에서 시작된 입장이 점차 '이분 은근 매력적인 분이네~'로 발전하다 오베의 죽음을 만나고서는 코끝이 찡해진다. 그건 왜일까?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금의 시대가 잊고 있던 그 무엇을 오베라는 인물에게서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인물이며 오히려 오베라는 인물이 독특한 색을 지닌 인물임을 발견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감동을 그리고 후회를 느끼게 된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밀려나 버리고,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하며 눈 감았던 일들이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낯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돌아보게 된다. 이제까지 내가 꼰대라고 불렀던 그들이 혹시 오베의 다른 버전은 아니었는지.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어 오히려 다양한 색을 지닌 그들을 흑백의 단조로운 사람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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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일의 시간 - 삶의 끝자락에서 전하는 인생수업
KBS 블루베일의 시간 제작팀 지음, 윤이경 엮음 / 북폴리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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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이 책의 리뷰를 시작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2년 전 친한 친구를 암으로 잃었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리 찍어둔 영정사진, 남편과 함께 써 내려가고 있던 노트, 그렇게 마시고 싶어 하던 커피를 향기만 맡으면서도 행복해하던 모습, <블루베일의 시간>을 읽으며 모두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몇 달 전 아버님 같던 큰시아주버님 가시는 모습을 또 봐야 했다. 며느리 같은 제수씨들 좋아한다고 싱싱한 회와 고기를 꼭 준비해주시던 모습, 술마시기 싫다는 우리에게 큰시아주버님이 주는 술잔을 거부하는 게 어디 있느냐며 안 받으면 삐쳐버릴 거라고 반협박하시던 모습을 또 떠올렸다.

<블루베일의 시간>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 언젠가는 가야 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우리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갈바리의원이라는 수녀들이 세운 한국 최초의 호스피스 병원을 KBS블루베일제작팀이 봉사활동과 촬영을 겸하며 취재해서 방영한 것을 글로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이 읽힌다. 카메라의 눈을 따라가는 것처럼 병원 안의 환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목소리, 그들을 간호하는 블루베일을 쓴 수녀들이 모습과 또 그들의 목소리,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이별 파티와 환자와 보호자가 주고받는 편지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상처럼 펼쳐진다. 책을 읽으며 친구와 큰시아주버님이 생각나 울컥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로 해서 내가 알게 된 삶의 환희와 소중함도 함께 떠올랐다.

삶이 중요하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아니?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해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을 옆에서 한 번 지켜보니 우리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고마운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죽음을 넘나드는 아픔과 죽음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온 가족이 함께 살며 아픔과 죽음을 바로 옆에서 지키던 때에는 굳이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조언을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서 죽음은 장례식장에서 치러야 하니 병과 죽음이 우리의 삶과는 분리된 채 저 먼 곳에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위에 있는 그림은 바니타스 정물화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림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의 자리를 의식하고 현재 주어진 짧은 생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으라는 말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현재를 맘껏 살고 즐기라는 말의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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