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읽다, 이탈리아 세계를 읽다
레이먼드 플라워, 알레산드로 팔라시 지음, 임영신 옮김 / 가지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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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쾌한 냄새를 대비한 코담배와 향기 나는 손수건, 구충제, 보온용 덧신, 전대, 물 끓일 주전자, 휴대용 변기 시트. 이것은 무엇을 위한 준비물일까?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물건들은 17세기에서 19세기 영국의 귀족 자제들 사이에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를 위한 준비물이다. 그 당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곳곳의 유적과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피렌체, 피사,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와 고전예술을 공부하여 높은 지적 소양을 쌓으려는 귀족들의 필수 교육과정이었다고 한다.

이런 여행에 대한 동경은 시간이 흐른 뒤 그랜드 투어를 할 정도의 재력은 없었던 이들이 걸어서 유럽의 곳곳을 다니던 프티 투어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여행사의 잘 짜인 스케줄에 따라 이동하는 패키지여행과 아니면 혼자서 배낭을 메고 다니는 배낭여행 등으로 보다 다양해졌다. 게다가 휴가의 하나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 여행이 직업이 된 사람도 있고, 일정 기간 돈을 모아 세계의 각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기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이제 여행과 일상의 구분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럽여행은 여전히 로망으로 자리한다.


여행을 별로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남들과 다른 여행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여행서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보 말고 조금은 다른 정보를 여행서에서 얻기를 바란다. 유명 여행지 중심의 관광정보와 먹거리, 쇼핑거리가 아니라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 예법 그리고 역사까지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반갑다. 낯선 곳에 던져진 충격에서 오는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한 정보를 주겠다는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이탈리아의 지리와 역사, 사회, 문화예술과 언어 배우기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살아보기 위한 집 얻기와 일하기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다.


이 책 속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제7장 이탈리아의 문화예술이었다. 특히 예전 그랜드 투어시대의 많은 문인들의 여행기는 이탈리아가 그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열등감을 늘 갖고 있다."

"베네치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그것에 무엇을 보태려는 것은 경솔한 일인지 모른다." 헨리 제임스


여행은 한 장의 사진 때문에 떠나기도 하고, 한 줄의 문장 때문에 짐을 싸기도 한다. 현실 때문에 당장 떠날 수 없다면 여행서를 읽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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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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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두 번 읽게 되면 좀 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에 읽은 책처럼 한 작품에 대한 다시 쓰기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일 년 전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었다. 어려웠다. 그저 재미로 읽기에는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남아있었다. '참 괜찮은 책이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를 이렇게 재미있게 다르게 쓸 수도 있구나.' 이 책을 읽은 뒤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은 후 <로빈슨 크루소>는 대학교재를 읽다가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재미는 있네, 하지만 이것이 주는 교훈은 너무 뻔히 보이고 한정적이며 자칫 위험할 수 있겠는데'였다. 그리고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은 철학서 덕분에 다시 읽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더욱 재미있었고, 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전에는 보지 못 했던 인간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타자의 존재란 어떤 것일까? 자연과 동물과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일까? 하는 보다 많은 질문을 내게 던지게 되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는 다이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가 회고적이고, 대영 제국의 가치 체계에 근거한 하나의 세계를 무인도에 재현하려고 애썼으며, 로빈슨이 백인이고, 서구인이고, 영국인이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말이 진리가 되고 권력이 되는 데 충격을 받아 전혀 다른 로빈슨을 창조하려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두 로빈슨은 난파되어 한 무인도에 살게 되고 처음에는 이 섬에서 오로지 '탈출'만을 꿈꾸기도 하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무인도에서 느끼는 고독의 시간 속에서 비인간화의 공포를 느끼며 무인도에 과거를 재구축한다.
하지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로빈슨은 자신이 구축하는 세계에 대해, 자신이 매일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하는 노동의 목적에 대해 회의한다. 무인도에서의 고독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끌고, 타인이 없음으로써 생기는 언어능력의 상실 등에 고민한다. 하지만 섬의 절대자인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물시계를 멈추면서 생긴 시간의 지배로 인해 '무죄의 순간'에 원초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고독으로 인해 생긴 자신 속 폐허를 독창적으로 해결해나가며 오히려 인류의 진화 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때 등장하는 타자인 원주민, 그에게 로빈슨은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방드르디(로빈슨 크루소에서는 프라이데이)는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방드르디로 인해 로빈슨의 심각한 가면 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발견한다. 방드르디는 천성에 따라 행동하고 어떤 의지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오로지 현재의 순간을 사는 인물이다. 그로 인해 그동안 구축해 놓은 문명의 모습은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고 이제 이 둘은 방드르디처럼 이 섬에서 살아간다. 로빈슨은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타자의 존재가 그리고 문명의 세계가 탐욕과 폭력을 내재한 조직된 이미지로 중력처럼 그를 붙들어 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의 원소가 되어 가볍게 살아가고자 한다. <로빈슨 크루소>에서처럼 이들을 구출해 줄 배가 나타나지만 로빈슨은 섬에 남기로 한다. 그렇지만 그가 우상처럼 생각했던 방드르디는 거꾸로 섬을 떠난다. 몰래.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던 고독의 시간과 타인의 부재, 그리고 방드르디라는 타인의 존재로 인해 달라진 로빈슨은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이 교육에 의해 강요된 것은 아니었는지,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어떤 것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답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혹은 어떤 선택의 순간에 전과는 다른 고민을 해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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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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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할아버지 코스트1세 낚싯바늘에 찔려 죽음. 그의 아내 갑자기 죽음. 그 할아버지의 첫째와 둘째 아들도 역시 사고사. 그의 두 딸과 결혼한 두 형제 중 작은 딸과 결혼한 남자는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그의 부인은 아이를 낳다가 죽음. 이들이 사는 저주받은 영지 '폴란드의 풍차'를 떠나던 또 다른 딸의 가족 넷이 모두 기차 사고로 죽음. 엄마가 죽으면서 태어났던 아이도 급사 그의 누이는 버찌씨가 목에 걸려 죽음. 어떻게 한 가족에 닥친 불행이 이렇게 지독할 수 있을까? <폴란드의 풍차>는 이런 지독한 비극적인 운명 속 가족들의 이야기와 그 가족과 얽힌 사람들 그리고 그 운명 속에 뛰어든 한 남자의 이야기다. 

 

<폴란드의 풍차>를 지은 작가 장 지오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와 세탁소 다림질공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 탓에 그는 16세에 은행 점원으로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문학을 섭렵했고 적극적인 반전 활동으로 투옥되기까지 한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질서와 평화를 해치는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지만, 특이하게 이 작품은 죽음, 운명에 맞서는 인간을 그린다.

장 지오노의 다른 작품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작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다. 그 작품에서는 자연이 주는 삶의 충동과 힘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폴란드의 풍차>는 어쩜 이럴 수가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비참한 한 집안의 운명을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한 가문의 비극적인 운명의 한가운데 뛰어든 '조제프'다. 이 사람의 정체는 그저 추측 속에 있다. 그가 이 작은 도시에서는 '미치광이'로 규정된 코스트가의 여인과 결혼을 선언하고 코스트가를 그 사회의 중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두가 꿈꾸는 그런 곳으로. 그래서 이 가문은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도 과연 작가가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승리를 그린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싸워봐야 결국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각을 그린 것일까? 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오랜 시간 생각해봐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해설은 운명에 저항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 뒤에 그가 만들어 놓은 지상낙원은 더 이상 지상낙원이 아니기에. 책을 덮고 난 뒤 오히려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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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경제학과 심리학으로 파헤친 행복 성장의 조건
폴 돌런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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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일까? 가끔 '행복하니?'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화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뭘까?'라는 질문도 받는다. 진정한 행복이라니? 누가 거짓으로 행복을 말하기에 '진정한'이란 수식어가 붙어야 했을까?

진리를 탐구했던 철학자들이 '행복'을 연구한 걸 보면 그냥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 혹은 '진리로서의 행복'이 있기는 있는가 보다. 사실 난 진리를 잘 믿는 편은 아니지만.


행복은 저 하늘의 별이 아니라, 내 안의 별이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연구한 철학자다. 그는 우선 행복의 조건으로 좋은 출신 성분, 일정 정도의 부와 공적 활동에 대한 참여 등 조건이 필요하다고 믿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가 더욱 중점을 둔 쪽은 지적인 탁월함과 성격적 탁월함이었다. 교육을 통한 지적 성장, 그리고 실천과 습관을 통해 도덕적으로 탁월해져 중용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너의 올바른 행위가 너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듦과 동시에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가는 도덕률이다.


<행복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의 저자 폴 돌런 교수는 이런 거대한 철학적 주제를 행동과학과 심리학으로 접근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진다고 하는데 그는 바꿔야 할 것은 오히려 생각이 아니라 행동과 환경이라고 말한다.그는 행복은 추구하거나, 재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환경과 행동변화를 통해 설계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한다. 행복은 마음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행동과학의 견지에서 행복을 설계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차근차근 다양한 사례와 행동과학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임인데, 그 자신이 어린시절 심한 말더듬증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가 그 결함에 온통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과 행동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방향으로 주의를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과 생활습관의 설계에 노력한다.  

그는 행복이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즐거움과 목적의식을 경험하는 것으로 본다. 이 책을 통해서 만나는 행동과학의 여러 용어들은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하게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초점효과(좋든 나쁘든 무언가의 영향을 생각할 대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문하다. 그러면 그것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투영편향(현재의 감정을 미래에 느낄 감정에 투영하는 실수) 확증편향(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주는 정보와 증거를 찾아 나서면서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를 무시한다 ) 기본적 귀인오류(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평가할 때 그들의 근원적인 성향을 과대평가하고 맥락의 효과를 과소평가한다. 자신의 행동은 전후사정때문이고 남들탓이다. 하지만 남들의 행동은 정반대로 그 사람탓이다) 인지부조화(자신이 불완전하고 실수을 하기도 하고 영원히 살 수 없는 피조물임을 받아들이면 좋다)

대부분의 사람이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최대한의 즐거움과 목적의식을 경험하는데 방해되는 방식으로 주의를 할당하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에서 동기와 행복을 찾으며 잘못된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첫 충격에 바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그 여파를 신중하게 관찰하면, 우리가 익숙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측보다는 경험을 신뢰하는 것이 좋다. 경험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은 경험에 돈을 써야 한다. 물건보다 경험을 더 많이 소비하면 결정을 내릴 때 참고 대상으로 삼을 준거집단이 바뀌게 되고 그래서 더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된다. 이는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 물질적 소비가 아닌 경험적 소비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이렇게 단지 개인의 삶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개인적 자기 실현의 삶을 완전히 현실화하는 것은 적절한 제도적, 정치적 단위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 우리 국가가 그렇듯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없는 외부적 조건이 존재한다. 이 외부적 조건,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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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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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로 시끌벅적한 날,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었다. 이 소설이 작년,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뒤에 쓰였고,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이 작품은 또 말을 걸고 있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세 주인공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모두 상실의 아픔을 지닌 존재들이다.

소라와 나나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만 잃은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마저도 내팽개쳐버린 어머니의 보호도 받지 못 했다. 이들은 부모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그래도 가족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이사 간 집(도저히 우리는 상상하기 힘든 구조의,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그려보기 힘든)에 같이 세 들어 사는 나기의 어머니로부터다. 이들의 도시락을 싸주고, 같이 김치를 담고 여름이면 묵은 김치로 만두를 빚어 같이 나눠주던 나기의 어머니. 그녀 또한 부모로부터 친척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였다. 그리고 나기, 나기 또한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그리고 그는 같은 반 남자애를 욕망하는 남자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책상과 의자처럼 보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나나의 임신과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엇갈아 배치하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것들을 돌아보라고, 우리가 하찮다고 무시했던 바로 그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나는 아이의 아빠인 모세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 거기에서 화장실에 놓은 요강을 본다. 그 요강은 모세의 아버지가 쓴다고 하는데 씻는 일은 모세의 어머니 몫이다. 자신이 쓴 요강을 다른 사람, 아내가 씻는 문제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서 나나는 모세와 결혼을 하지 않기로 한다. 요강. 그것은 그의 가족들에게는  잘 모르겠다는 점. 불가사의한 구멍, 미스터리 홀이다.  애초에 생기기를 모르게 되어 있도록 생겼는지도 모르는. 작가는 나나의 입을 통해 그저 스쳐 지나가도 될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로 다가오게 한다.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게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 아무도 제대로 생각해주지 않으니까 그런 게 거기 있는 거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거잖아.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야지, 제대로.


사랑하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백모의 통곡을 보고,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나나는 생각한다. 자식을 잃은 사람. 그 압도적인 고통이 나나에게는 없습니다. 나나는 자신의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 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이야기는 죽으려 했던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남편의 곁으로만 가려고 했던 그렇지만 지금은 요양소에서 종이로 꽃을 접고 있는 소라와 나나의 어머니 애자씨의 말과 나나의 생각으로 끝납니다.


아무래도 좋은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이 말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형벌을 묵묵히 하고 있는 시지포스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의 삶은 덧없고 하찮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무의미하니 그만두어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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