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살림지식총서 168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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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고 그때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책이 있다. 지금 읽어도 물론 좋지만, 방황하고 힘들던 바로 그때 읽었더라면 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나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 같은 책. 내게는 그런 책이 몇 권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비롯한 몇 권의 책들과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성인이 되어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심지어 '이게 왜 좋은 책이야?'에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고, '다 그런 때가 있는 법이지'하며 하나의 통과의례를 겪는 아픈 청춘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련히 '혹시 내가 그때와는 너무 다른 방향으로 다른 입장에 서있어서 다 잊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만 했던 <호밀밭의 파수꾼>읽기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전 세계에 '샐린저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 책을 잘못 읽은 인물들은 이 책을 금서로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잘못 읽은 이는 존 레넌을 저격한 마크 데이빗 채프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다니며 자신을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동일시하던 젊은이들이 이 책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나섰던 이들이 있었던 것은.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는 이런 샐린저 현상과 이 책을 비판했던 이들의 입장을 들려준다. 그 당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얼마나 논쟁 속에 있었는지, 반대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비판자들이 화를 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성세대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렇게 인기 있었던 이유는, 당시 전후 젊은 세대가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이 소설이 정확하고도 시원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의 메시지는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휴 맥리언 같은 사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출구가 없는 보수주의적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호밀밭의 파수꾼>은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가짜'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순진성을 상실하고 어른이 되며, 결국 그 '가짜'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소설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다.

살림에서 나온 이 시리즈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90페이지의 작은 책 속에서 쉽게, 그리고 콤팩트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샐린저는 1965년 이후 절필한 채, 더 이상 글을 쓰고 있지 않으며 영화화하기 너무 좋은 작품임에도 영화로 만들 수 없게 하고 있다. 은둔의 작가 샐린저와 그의 최고의 작품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래서 더욱 불멸의 명성을 더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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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살림지식총서 52
편영수 지음 / 살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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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작품은 여전히 낯설다. <변신>을 읽고 <소송>을 읽어도 카프카와의 거리는 좀 더 멀어진 느낌이다. 카프카의 책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보고 있는 나를 느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나의 독서력이 아직 부족하구나' '
나는 머리와 가슴이 굳어버려 카프카의 환상적인 글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환상적인 부분에 대한 공감이 힘들어서인지 다른 독자들이 너무 재미있다는 <변신>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난  <변신>과 함께 실린 <시골의사>가 더 좋았다.
그리고 <소송>도 무척 힘들게 읽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카프카의 삶이 더 재미있게 다가온다. 그가 쓴 편지들(아버지와 연인에게 쓴 징징거리는 듯한), 그가 사랑했던 그렇지만 거부했던 여인들의 이야기가 더 흥미를 끈다.

이번 살림지식총서의 <프란츠 카프카>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게 읽힌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재미있었던 것은 그 어렵던 카프카에게로 다가가는 하나의 키워드를 알게 돼서다.
카프카가 궁극적으로 문학에서 얻고 싶은 것은 진실이었다.
그의 문학은 허위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진실에 도달하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카프카를 괴롭히고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것은, 그를 문학에서 도피처를 찾는 내면주의적 작가로, 고독을 다룬 작가로 취급하는 것이다. 카프카가 삶에서의 무능력 때문에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카프카에게 문학과 삶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며, 문학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작가 자신이 모든 진술을 부인하고 철회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모든 진술을 거부하는 카프카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며 표현 형식인 '미끄러지는 역설'은 모처럼 얻은 확신을 다시 의문에 빠뜨린다.
카프카의 문학이 난해한 또 다른 이유는 카프카가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를 동일한 평면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꿈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같은 내면세계'를 꿈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한다.

그렇다면 카프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의 수수께끼 같은 문학 구조는 오히려 자신의 작품에서 형상화하고 싶은 보편적 진실 그 자체가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수수께끼 같다는 말은 유한한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표상 세계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행위를 끊임없이 방해하지만 동시에 이해의 행위를 요구한다....... 카프카의 의도는 의미 확정의 불가능성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라고 던졌던 카프카의 작품을 다시 꺼내 읽어봐야 할 때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카프카의 수수께끼에 도전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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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력이 부족해 그런게 아니고 제가 보기엔 지극히 사회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하시기에 그 느낌을 상상도 해볼 수없는게 아닌가...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벌레같다고 자괴감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저 카프카의 변신이 위로가 될지도 모를텐데 ㅡ
경험이 불러올 수도있는거죠. 때로는 ㅡ
책에서만 의미와 느낌을 다 찾을 수있다면...너무 좋겠지만...안된다는걸 우리는 압니다.^^
 
알베르 카뮈 살림지식총서 51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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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카뮈는 단순히 좋아하는 작가 그 이상이다. 왜일까? 사춘기를 보내던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세 남자는 국어선생님과 제임스 딘과 카뮈였다. 문학을 좋아하던 10대 소녀에게 이 세 남자는 그 당시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상상 속에서) 인물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셋이 모두 닮아있다. 위의 담배 피우는 카뮈는 제임스 딘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내가 카뮈의 작품을 만났던 때는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오직 책에만 파묻혀 지냈던 시간, 그 시간을 함께 한 작품은 <이방인>이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작품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보니 7번을 읽었다. 그 뒤로 읽었던 카뮈의 또 다른 작품들,<페스트>, <시지프스의 신화>, <최초의 인간> 그리고 <전락>은 왜 내가 카뮈를 좋아하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카뮈의 작품세계는 쉽지 않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 교수님이 책은 세 번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선 작품을 읽고, 그다음에는 작가를 읽고 그리고 자신을 읽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을 읽는 것도 버겁다. 작가를 읽어 볼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살림지식총서의 <알베르 카뮈>는 그런 나에게 작가를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카뮈의 삶을 담은 책. 이 책은 우선 카뮈가 태어난 알제리의 태양과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카뮈가 평생 동안 이야기했던 주제인 '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카뮈의 삶을 다룬다.

카뮈는 그의 삶 자체가 '이방인'이었다. 아버지는 1913년 알제리의 소도시 몽도비에서 포도농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스페인 혈통의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평생 스스로를 프랑스인인 동시에 알제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취급을 했다. 그런 그가 <이방인>을 썼고,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카뮈의 <이방인>에 의해 처음 자리 잡게 된 그 투명한 말은 어떤 부재의 문체를 완성한다. 그것은 스타일의 이상적인 부재에 가깝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 

연결사와 종속절의 절약은 지극히 짧고 단속적인 문장을 만들며, 그 결과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관계가 희미해져버린다. 흔히 카뮈의 문장을 일컬어 고독한 섬과도 같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게다가 소설 전편에 걸쳐 견지되는 화자의 시선의 외재성은 '부재의 문체'를 완성한다. p.33 

작가의 이런 해설은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서늘한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해준다. <이방인>은 형식 면에서도 동시대 문단의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다 읽고 이해가 잘 간다고 말하는 독자는 거짓말쟁이이거나 좀 모자라는 사람일 것이다. <이방인>은 이해해 달라는 책이 아니라 의심해 달라는 책이다. 늘 익숙하던 세계가 돌연 나의 고향, 나의 왕국이 아니라는 느낌, 이 느낌을 획득하는 자가 바로 카뮈가 원하는 '부조리 인간', 즉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이다. 삶과 죽음, 존재와 무에 질문을 던지는 자는 필연적으로 세계의 이방인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이방인>을 읽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방인>을 정독했다는 뜻일지니......

이 글을 읽고 여전히 <이방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죽음마저도 부조리했던 카뮈의 삶과 작품은 이렇게 내게 또 가까이 한 걸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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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심은희 지음 / 리스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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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 없이, 특별한 이유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행을 결심했다."

<아일랜드에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의 저자인 김은희 씨는 아일랜드로 향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1년을 살면서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일랜드여야 했던 이유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일랜드의 곳곳을 여행하며 이곳 한국이 아닌 저곳 아일랜드에 살고 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막 20대 후반에 접어든 한 여성이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아일랜드로 날아가 머물면서 여행했던 아이랜드의 곳곳을 소개하며 자신의 감상을 풀어놓은 여행 에세이다. 우선 아일랜드의 중심지인 더블린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며 렌스터, 먼스터, 카노트,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얼스터를 소개한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것부터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작가의 눈에 비친 모습, 작가의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여행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작가의 감탄 어린 시선에 같이 감동하기도 하고,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작가가 쏟아놓는 감상이 그저 뜬구름처럼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혹은 독자가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 해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은 뒤 내게 남는 감상은 어느덧 하늘의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아일랜드로 여행을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은 몇몇 곳이 생겼다. 우선 더블린의 리피강을 두 눈에 담고 싶다. 강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좋겠다. 또 한 곳은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이다. 그곳에 있는 켈트의 책을 보고 싶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그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서 꿈꾸었던 아일랜드와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뷸리스 카페 2층도 꼭 구경하고 싶다. 그곳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일랜드와 한국은 역사와 정서에서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많은 외침으로 인한 식민지의 한, 강렬한 민족정신,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 자녀교육열 등. 심지어 한국인을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남한의 4/5 인구는 404만 명 정도다.

펍, 기네스, 문학, 음악, 춤, 그리고 스포츠로 상징되는 아일랜드는 저마다 좋아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여행을 해보면 좋을 듯하다. 펍을 돌아다니며 즐겨도 좋을 것 같고, 아일랜드의 작가들을 쫓아서 여행하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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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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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opticon.jpg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게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을 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

파리.

파리로 당첨.

나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다. 나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서류철에 든 숫자나 통계치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

나는, 오늘 시작한다.

'난 실험이다'로 시작해서 '나는, 오늘 시작한다.'로 끝나는 제니 페이건의 소설 <파놉티콘>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복지시스템에 맡겨져 길러진 15살 소녀인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첫 이름은 제48구역 7652.4.였다.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어. p.88

이런 아나이스는 마약과 술과 담배에 쪄들어 지낸다. 그러던 그녀가 경찰을 때려 식물인간을 만든 혐의로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독백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기도 한다. 그녀가 혼자서 자주 하는 놀이는 '생일 게임'이다. 생일 게임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형태의 부모를 상정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녀는 자신이 여러 가지 실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없는 동물도 엄마 아빠가 있는데...... 그러니 본인은 무언가로 빚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가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제러미 벤담은 이런 범죄자들을 수용할 원형감옥, 파놉티콘을 구상한다. 범죄를 등급별로 나누고 무리별로 격리를 시키는 원형감옥은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범죄자를 감시할 수 있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감옥은 마침내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감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원형감옥을 만들게 된 철학적 바탕은 바로 공리주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은 행위자의 행복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 문제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 위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감시 기관의 하나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 온 장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관찰, 규범적 판단, 검사 등 규율로 길들여진 몸을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항상 관찰되고 있으며, 사회는 개체를 부단히 비교, 분리 계층화 시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공부 열심히 해라' 등 사회가 '옳다고 규정한' 것을 어떤 사람이 동조하기를 거부하면 결격자,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낙인을 찍는다.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정체성도 타인과의 교류에서 정해지고 자기에 대한 평가도 주로 타인의 관찰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제러미 벤담의 원형감옥은 건재하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 포악하고 보다 정교화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니 페이건은 그 사회적인 기관, 시스템의 하나로 사회복지의 대상들을 생각해 볼 것을 말한다.

 

관찰과 규범적 판단과 검사로 분류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고 있는 사회복지의 대상들. 그중에 한 명인 아나이스는 작은 배려에 크게 감동한다. 비록 창녀였지만 자신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던 테리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었던 헤일리, 그리고 사회복지사 앵거스.

다른 사회복지사는 부모를 알 수 없는 너의 정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너의 정체를 받아들여야 너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것에 대한 아나이스의 생각은?

정체성 문제? 웃기시네. 오십몇 차례나 이사를 다니고, 이름만 세 개를 쓰고, 정신병원에서 나를 낳고는 흔적 없이 사라진 무명씨한테 태어난 사람을 보고 정체성 '문제'라고? 난 정체성 문제 같은 거 없어. 정체성이랄 게 아예 없거든. 오직 반사 작용들과, 이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에서 녹아 없어지는 장막뿐. p.146

 

받아들임? 온통 상처뿐인 아이한테 그 존재의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글씨를 잘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 종이에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다. 실수다. 그래서 글씨를 쓰지 않고 마구 낙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삶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생일 게임을 하면서 다른 삶을 꿈꾸어본다. 

아나이스의 꿈은 너무 소박해서 슬프다.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고, 프랑스어를 배워 파리 중앙도서관에 잇는 책들, 심지어 백과사전부터 편람까지 모조리 다 읽고, 할머니 대신 장을 봐오고 빨래를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할머니의 한창때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평가 분류 실험이 아니라 단지 '나'이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진,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나'라서 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아나이스의 삶은 쉽게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나이스는 탈출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고무친 고아를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 키웠다. 이 집에서 밥을 먹고 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러면서 아이의 상황을 모두가 공감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이들은 격리된다.


<파놉티콘>은 우리가 감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당연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길들여진 거야.'라고.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더 철저한 감시는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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