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게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을 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
파리.
파리로 당첨.
나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다. 나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서류철에 든 숫자나 통계치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
나는, 오늘 시작한다.
'난 실험이다'로 시작해서 '나는, 오늘 시작한다.'로 끝나는 제니 페이건의 소설 <파놉티콘>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복지시스템에 맡겨져 길러진 15살 소녀인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첫 이름은 제48구역 7652.4.였다.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어. p.88
이런 아나이스는 마약과 술과 담배에 쪄들어 지낸다. 그러던 그녀가 경찰을 때려 식물인간을 만든 혐의로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독백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기도 한다. 그녀가 혼자서 자주 하는 놀이는 '생일 게임'이다. 생일 게임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형태의 부모를 상정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녀는 자신이 여러 가지 실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없는 동물도 엄마 아빠가 있는데...... 그러니 본인은 무언가로 빚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가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제러미 벤담은 이런 범죄자들을 수용할 원형감옥, 파놉티콘을 구상한다. 범죄를 등급별로 나누고 무리별로 격리를 시키는 원형감옥은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범죄자를 감시할 수 있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감옥은 마침내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감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원형감옥을 만들게 된 철학적 바탕은 바로 공리주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은 행위자의 행복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 문제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 위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감시 기관의 하나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 온 장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관찰, 규범적 판단, 검사 등 규율로 길들여진 몸을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항상 관찰되고 있으며, 사회는 개체를 부단히 비교, 분리 계층화 시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공부 열심히 해라' 등 사회가 '옳다고 규정한' 것을 어떤 사람이 동조하기를 거부하면 결격자,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낙인을 찍는다.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정체성도 타인과의 교류에서 정해지고 자기에 대한 평가도 주로 타인의 관찰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제러미 벤담의 원형감옥은 건재하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 포악하고 보다 정교화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니 페이건은 그 사회적인 기관, 시스템의 하나로 사회복지의 대상들을 생각해 볼 것을 말한다.
관찰과 규범적 판단과 검사로 분류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고 있는 사회복지의 대상들. 그중에 한 명인 아나이스는 작은 배려에 크게 감동한다. 비록 창녀였지만 자신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던 테리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었던 헤일리, 그리고 사회복지사 앵거스.
다른 사회복지사는 부모를 알 수 없는 너의 정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너의 정체를 받아들여야 너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것에 대한 아나이스의 생각은?
정체성 문제? 웃기시네. 오십몇 차례나 이사를 다니고, 이름만 세 개를 쓰고, 정신병원에서 나를 낳고는 흔적 없이 사라진 무명씨한테 태어난 사람을 보고 정체성 '문제'라고? 난 정체성 문제 같은 거 없어. 정체성이랄 게 아예 없거든. 오직 반사 작용들과, 이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에서 녹아 없어지는 장막뿐. p.146
받아들임? 온통 상처뿐인 아이한테 그 존재의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글씨를 잘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 종이에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다. 실수다. 그래서 글씨를 쓰지 않고 마구 낙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삶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생일 게임을 하면서 다른 삶을 꿈꾸어본다.
아나이스의 꿈은 너무 소박해서 슬프다.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고, 프랑스어를 배워 파리 중앙도서관에 잇는 책들, 심지어 백과사전부터 편람까지 모조리 다 읽고, 할머니 대신 장을 봐오고 빨래를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할머니의 한창때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평가 분류 실험이 아니라 단지 '나'이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진,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나'라서 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아나이스의 삶은 쉽게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나이스는 탈출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고무친 고아를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 키웠다. 이 집에서 밥을 먹고 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러면서 아이의 상황을 모두가 공감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이들은 격리된다.
<파놉티콘>은 우리가 감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당연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길들여진 거야.'라고.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더 철저한 감시는 아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