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살림지식총서 51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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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카뮈는 단순히 좋아하는 작가 그 이상이다. 왜일까? 사춘기를 보내던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세 남자는 국어선생님과 제임스 딘과 카뮈였다. 문학을 좋아하던 10대 소녀에게 이 세 남자는 그 당시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상상 속에서) 인물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셋이 모두 닮아있다. 위의 담배 피우는 카뮈는 제임스 딘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내가 카뮈의 작품을 만났던 때는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오직 책에만 파묻혀 지냈던 시간, 그 시간을 함께 한 작품은 <이방인>이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작품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보니 7번을 읽었다. 그 뒤로 읽었던 카뮈의 또 다른 작품들,<페스트>, <시지프스의 신화>, <최초의 인간> 그리고 <전락>은 왜 내가 카뮈를 좋아하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카뮈의 작품세계는 쉽지 않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 교수님이 책은 세 번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선 작품을 읽고, 그다음에는 작가를 읽고 그리고 자신을 읽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을 읽는 것도 버겁다. 작가를 읽어 볼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살림지식총서의 <알베르 카뮈>는 그런 나에게 작가를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카뮈의 삶을 담은 책. 이 책은 우선 카뮈가 태어난 알제리의 태양과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카뮈가 평생 동안 이야기했던 주제인 '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카뮈의 삶을 다룬다.

카뮈는 그의 삶 자체가 '이방인'이었다. 아버지는 1913년 알제리의 소도시 몽도비에서 포도농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스페인 혈통의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평생 스스로를 프랑스인인 동시에 알제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취급을 했다. 그런 그가 <이방인>을 썼고,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카뮈의 <이방인>에 의해 처음 자리 잡게 된 그 투명한 말은 어떤 부재의 문체를 완성한다. 그것은 스타일의 이상적인 부재에 가깝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 

연결사와 종속절의 절약은 지극히 짧고 단속적인 문장을 만들며, 그 결과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관계가 희미해져버린다. 흔히 카뮈의 문장을 일컬어 고독한 섬과도 같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게다가 소설 전편에 걸쳐 견지되는 화자의 시선의 외재성은 '부재의 문체'를 완성한다. p.33 

작가의 이런 해설은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서늘한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해준다. <이방인>은 형식 면에서도 동시대 문단의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다 읽고 이해가 잘 간다고 말하는 독자는 거짓말쟁이이거나 좀 모자라는 사람일 것이다. <이방인>은 이해해 달라는 책이 아니라 의심해 달라는 책이다. 늘 익숙하던 세계가 돌연 나의 고향, 나의 왕국이 아니라는 느낌, 이 느낌을 획득하는 자가 바로 카뮈가 원하는 '부조리 인간', 즉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이다. 삶과 죽음, 존재와 무에 질문을 던지는 자는 필연적으로 세계의 이방인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이방인>을 읽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방인>을 정독했다는 뜻일지니......

이 글을 읽고 여전히 <이방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죽음마저도 부조리했던 카뮈의 삶과 작품은 이렇게 내게 또 가까이 한 걸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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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심은희 지음 / 리스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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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 없이, 특별한 이유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행을 결심했다."

<아일랜드에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의 저자인 김은희 씨는 아일랜드로 향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1년을 살면서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일랜드여야 했던 이유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일랜드의 곳곳을 여행하며 이곳 한국이 아닌 저곳 아일랜드에 살고 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막 20대 후반에 접어든 한 여성이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아일랜드로 날아가 머물면서 여행했던 아이랜드의 곳곳을 소개하며 자신의 감상을 풀어놓은 여행 에세이다. 우선 아일랜드의 중심지인 더블린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며 렌스터, 먼스터, 카노트,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얼스터를 소개한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것부터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작가의 눈에 비친 모습, 작가의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여행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작가의 감탄 어린 시선에 같이 감동하기도 하고,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작가가 쏟아놓는 감상이 그저 뜬구름처럼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혹은 독자가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 해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은 뒤 내게 남는 감상은 어느덧 하늘의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아일랜드로 여행을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은 몇몇 곳이 생겼다. 우선 더블린의 리피강을 두 눈에 담고 싶다. 강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좋겠다. 또 한 곳은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이다. 그곳에 있는 켈트의 책을 보고 싶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그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서 꿈꾸었던 아일랜드와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뷸리스 카페 2층도 꼭 구경하고 싶다. 그곳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일랜드와 한국은 역사와 정서에서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많은 외침으로 인한 식민지의 한, 강렬한 민족정신,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 자녀교육열 등. 심지어 한국인을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남한의 4/5 인구는 404만 명 정도다.

펍, 기네스, 문학, 음악, 춤, 그리고 스포츠로 상징되는 아일랜드는 저마다 좋아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여행을 해보면 좋을 듯하다. 펍을 돌아다니며 즐겨도 좋을 것 같고, 아일랜드의 작가들을 쫓아서 여행하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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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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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opticon.jpg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게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을 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

파리.

파리로 당첨.

나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다. 나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서류철에 든 숫자나 통계치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

나는, 오늘 시작한다.

'난 실험이다'로 시작해서 '나는, 오늘 시작한다.'로 끝나는 제니 페이건의 소설 <파놉티콘>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복지시스템에 맡겨져 길러진 15살 소녀인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첫 이름은 제48구역 7652.4.였다.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어. p.88

이런 아나이스는 마약과 술과 담배에 쪄들어 지낸다. 그러던 그녀가 경찰을 때려 식물인간을 만든 혐의로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독백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기도 한다. 그녀가 혼자서 자주 하는 놀이는 '생일 게임'이다. 생일 게임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형태의 부모를 상정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녀는 자신이 여러 가지 실험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없는 동물도 엄마 아빠가 있는데...... 그러니 본인은 무언가로 빚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가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제러미 벤담은 이런 범죄자들을 수용할 원형감옥, 파놉티콘을 구상한다. 범죄를 등급별로 나누고 무리별로 격리를 시키는 원형감옥은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범죄자를 감시할 수 있고,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감옥은 마침내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감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원형감옥을 만들게 된 철학적 바탕은 바로 공리주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은 행위자의 행복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 문제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 위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감시 기관의 하나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 온 장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관찰, 규범적 판단, 검사 등 규율로 길들여진 몸을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항상 관찰되고 있으며, 사회는 개체를 부단히 비교, 분리 계층화 시킨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공부 열심히 해라' 등 사회가 '옳다고 규정한' 것을 어떤 사람이 동조하기를 거부하면 결격자,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낙인을 찍는다.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정체성도 타인과의 교류에서 정해지고 자기에 대한 평가도 주로 타인의 관찰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제러미 벤담의 원형감옥은 건재하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 포악하고 보다 정교화된 형태로 진화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니 페이건은 그 사회적인 기관, 시스템의 하나로 사회복지의 대상들을 생각해 볼 것을 말한다.

 

관찰과 규범적 판단과 검사로 분류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고 있는 사회복지의 대상들. 그중에 한 명인 아나이스는 작은 배려에 크게 감동한다. 비록 창녀였지만 자신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던 테리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었던 헤일리, 그리고 사회복지사 앵거스.

다른 사회복지사는 부모를 알 수 없는 너의 정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너의 정체를 받아들여야 너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것에 대한 아나이스의 생각은?

정체성 문제? 웃기시네. 오십몇 차례나 이사를 다니고, 이름만 세 개를 쓰고, 정신병원에서 나를 낳고는 흔적 없이 사라진 무명씨한테 태어난 사람을 보고 정체성 '문제'라고? 난 정체성 문제 같은 거 없어. 정체성이랄 게 아예 없거든. 오직 반사 작용들과, 이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에서 녹아 없어지는 장막뿐. p.146

 

받아들임? 온통 상처뿐인 아이한테 그 존재의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글씨를 잘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 종이에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다. 실수다. 그래서 글씨를 쓰지 않고 마구 낙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나이스의 삶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생일 게임을 하면서 다른 삶을 꿈꾸어본다. 

아나이스의 꿈은 너무 소박해서 슬프다.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고, 프랑스어를 배워 파리 중앙도서관에 잇는 책들, 심지어 백과사전부터 편람까지 모조리 다 읽고, 할머니 대신 장을 봐오고 빨래를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할머니의 한창때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평가 분류 실험이 아니라 단지 '나'이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진,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나'라서 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아나이스의 삶은 쉽게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나이스는 탈출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고무친 고아를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 키웠다. 이 집에서 밥을 먹고 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러면서 아이의 상황을 모두가 공감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이들은 격리된다.


<파놉티콘>은 우리가 감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당연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길들여진 거야.'라고.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더 철저한 감시는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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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애니 베전트 지음, 황미영 옮김 / 책읽는귀족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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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스님이 매일 밤 우는 우리 아들 보고 '식(識)이 맑아서 그렇다.'라고 하시며 아이들은 전생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지 다 앍고 있어서 우는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이 정말 낯설게 들렸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마치 그 말은 '귀신이 보인다.'라는 말만큼이나 엉뚱해 보였다.

간혹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를 본다.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정말로 믿기 힘든 '서프라이즈'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믿기 힘들다'라고 해서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프라이즈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야기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인도의 한 여자아이는 자신이 콜롬비아 호가 폭발하는 바람에 죽었으며 그 당시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이름까지도. 또 어떤 아이는 생전 배운 적이 없는 영어를 쓰면서 많은 과학지식을 언급하며 자신이 과학자였다고 말한다. TV에 나오던 남북전쟁에 대한 영화를 보던 5살 어린이가 자신이 거기에 있었고 그 전쟁 중에 죽었다며 자신이 다친 부위를 그려주었다고도 한다. 5살 어린이로서는 너무 많은 전쟁 지식도 역시 전하면서.


전생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나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면서 듣는다. 그렇지만 왜 우리가 모르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영국의 신지학자이며 신지학협회의 2대 회장인 애니 베전트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한다. 책의 부제처럼 '환생'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두 세계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친구나 동화 속 풍경을 보기도 하고, 어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도 하며, 아스트랄계에서 오는 근사하고 미묘한 환상을 접하기도 한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생명은 에너지 속에 경험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누적된 유전 경험이 본능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환생이다. 인간은 '생각의 생명체'이며, '이 생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다음 생에서의 그의 모습'이라는 말에서는 '업'이라는 불교 용어가 떠올랐다. 물론 같은 원어를 쓴다. 카르마. 이 세상에는 이런 카르마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무엇인가? 이 책에 따르면 세상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쟁의 장인데, 이 선과 악은 빛과 어둠, 영혼과 물질처럼 우주의 근원적인 '쌍둥이'이며 유일자에게서 나온 둘이라는 것이다.
많은 종교에서 보이는 신비하고 낯선 이런 것들에 대해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아리송한 것은 여전히 나는 증명 가능한 '과학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 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만난 좋은 문장들은 책이 무엇을 서술하고 있든지 간에 가슴에 남는다.
'우리의 정신적 특성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다. '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모든 비완성을 품는다.'
'사고는 그 사고를 하는 주체가 가닿고 싶어 하는 사람을 향할 수 있고, 사고의 효력은 그 사고를 하는 주체의 의지와 정신력에 따라 결정된다. '
우리는 그래서 화를 내는 사람이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기도 하는 것 같다.
'인간은 신지학을 통해 자신의 정신이 자신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사고가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인간 세상에 천사와 악마를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그 세상의 창조와 그 세상이 미치는 영향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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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 메이커 - 세상을 전복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변화의 창조자들
이나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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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이들의 목소리야말로 한껏 부풀려지고 공허한 셀러브리티의 넌센스보다 훨씬 값지다.'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참여, 공유 개방의 가치를 강조하는 새로운 철학,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라고 비난을 받았다.

전 세계 디자이너와 기술자의 90퍼센트는 상위 10퍼센트의 부유한 고객을 위해 일한다. 소외된 90퍼센트를 위한 디자인 혁명, 기술 혁명이 필요하다.

'기부'와 '대기업'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빈곤을 퇴치하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이것은 3대 허구다.

자선이 아니라 '정의'가 필요하다.

대중의 관심과 알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독립적 언론인에 대한 지원에 관심을 가져왔다.

목소리만 있는 군중이 아니라 행동하는 군중이 되자.

위의 말들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어떤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만약 정치에 대해 혹은 경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이 말을 적용한다면​ 친북좌파로 몰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이 말들은  스토어 코어의 설립자 데이비드 아이세이, 리눅스를 개발해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조 프로젝트를 완성한 리누스 토발즈, 소외된 8억 명을 위한 디자인 혁명을 일으킨 국제 개발기업의 창설자 폴 폴락, 이베이의 창업자이며 온라인 독립언론 '디 인터셉트' 투자자 겸 설립자인 피에르 오미다이어, IT로 도시문제를 해결한 코드 포 아메리카의 제니퍼 폴카, 이들의 말이다.

우리는 이들의 성공 이야기를 뉴스에서 듣고 부러워한다. 위에 언급된 인물들은 사실 어쩌면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우리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를 더 많이 알고 있다. 특히 이들은 아이디어로 엄청난 부를 얻었고, 빌 게이츠의 경우 많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를 해서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하지만, 비슷한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 사업을 했지만, 이 두 명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세상의 변화에 기여한 인물이 있었다. 리눅스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라는 인물이다. 그는 리눅스를 공개해 무료로 쓰게 함으로써 참여와 공유 그리고 개방의 가치를 드높였다. 리눅스를 공개함으로써 개발자 한 명이 6만 년 동안(6년도 아니고 600년도 아니고 60000년이라니) 80억 달러를 들여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게 했다.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빌 게이츠를 더 기억하고 있을까?  기부와 자선이 아니라 빈곤층의 수익 자체를 높이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업가인 폴 폴락의 생각은 어떤가? 공유의 가치를 집과 여행에 접목해 에어비앤비를 창업한 이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이나리 씨는 창업 생태계 플랫폼이 D.CAMP를 만든 인물이다. 그녀에게 창조경제 관련 정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와 같은 창업 지원 시설을 구축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고 조직은 어떻게 꾸려야 하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녀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은 무슨 답을 얻었을까? "저기...... 사람부터 고민해보시죠."였다. 변화의 동력은 조직 정비나 예산에 있지 않다. 진정한 힘은 사람, 그리고 연대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새로운 철학, '참여, 공유, 개방'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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