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꼬인 목소리의 언니가 갑자기 더 크게 소리쳤다.

"야! 니가 그럴 자격이 왜 없냐? 그럴 자격 있다. 누구든 좋은 걸, 더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너도, 나도, 우리 엄마도. 그건 다 마찬가지인 거야. 세상에 좋은 게 더 좋은 게, 더 더 더 좋은 게 존재하는데, 그걸 알아버렸는데 어떡해?

은상 언니가 야광봉을 핀 한쪽 팔을 허공에 쭉 뻗고서는 내 귀에 대고 속닥였다.

"걱정 마. 우리 저기까지 갈 거잖아."

노란 빛살을 내뿜는 야광봉의 끝이 밤하늘의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쪽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고 또다른 반쪽은 시원하게 빛나고 있는, 아주 정확한 반달이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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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그마음."
은상 언니가 등 뒤로 한쪽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고, 크게 웃었다.
"야, 나는 그런 생각 안 할 것 같냐? 우리 엄마 아빠, 일평생 호텔은커녕 바닷가에서 수영복 한번 못 입어봤는데."
언니가 덧붙였다.
"우리 같은 애들은 어쩔 수가 없어."
우리, 같은, 애들. 난 은상 언니가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을 말할 때, 이상하게 마음이 쓰리면서도 좋았다. 내 몸에 멍든 곳을 괜히 한번 꾹 눌러볼 때랑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리지만 묘하게 시원한 마음. 못됐는데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만 못된 마음. 그래서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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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풀의 난간에 기대어 수영장, 바다, 하늘의 황홀한 그러데이션을 배경으로 물에 상반신이 반쯤 잠긴 뒷모습 사진을 번갈아 찍어주고 있는 은상 언니와 지송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인피니티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인피니티는 무한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여겼던 아득히 먼 세계. 그런 곳에 운 좋게 발을 살짝 담갔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욕심에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하고 나면 이제는 저걸 하고 싶고, 저걸 하면 그다음 걸 하고 싶어졌다. 한계가 없는 내 욕망이, 그 마음들이 왜인지 창피했다. 속이 복닥거렸다. 멀리서 은상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해야!"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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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서사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캐릭터, 즉 인물의 본질적 특성이다. 한 인물의 본질적 특성은 그 인물이 직면한 상황에서 그 인물이 취한 태도에 의해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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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난 뒤 읽으니 직접 눈으로 봤던 풍경이 떠오르며 더 와닿는 글이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을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아래 소 두 마리가 외롭게 풀을 뜯고 있는 분화구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렸다. 하늬바람이 덜 미치고 샘 물통 근처라 초록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잊어버릴 뻔했다. 일없이 오름에 오르는 답사객은 봄꽃의 아름다움, 가을 억새의 감상을 말하며 낭만 한 자락을 꺼내들지만 오름의 주인은 조랑말과 테우리들이었다. 요배가 다랑쉬오름을 그리면서 고운 빛깔이 아니라 무거운 빛깔을 사용한 까닭은 제주인의 삶 속에 있는 오름의 무게감이 그렇게 묵직했기 때문이었나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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