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 풀의 난간에 기대어 수영장, 바다, 하늘의 황홀한 그러데이션을 배경으로 물에 상반신이 반쯤 잠긴 뒷모습 사진을 번갈아 찍어주고 있는 은상 언니와 지송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인피니티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인피니티는 무한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여겼던 아득히 먼 세계. 그런 곳에 운 좋게 발을 살짝 담갔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욕심에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하고 나면 이제는 저걸 하고 싶고, 저걸 하면 그다음 걸 하고 싶어졌다. 한계가 없는 내 욕망이, 그 마음들이 왜인지 창피했다. 속이 복닥거렸다. 멀리서 은상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해야!"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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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서사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캐릭터, 즉 인물의 본질적 특성이다. 한 인물의 본질적 특성은 그 인물이 직면한 상황에서 그 인물이 취한 태도에 의해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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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난 뒤 읽으니 직접 눈으로 봤던 풍경이 떠오르며 더 와닿는 글이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을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아래 소 두 마리가 외롭게 풀을 뜯고 있는 분화구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렸다. 하늬바람이 덜 미치고 샘 물통 근처라 초록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잊어버릴 뻔했다. 일없이 오름에 오르는 답사객은 봄꽃의 아름다움, 가을 억새의 감상을 말하며 낭만 한 자락을 꺼내들지만 오름의 주인은 조랑말과 테우리들이었다. 요배가 다랑쉬오름을 그리면서 고운 빛깔이 아니라 무거운 빛깔을 사용한 까닭은 제주인의 삶 속에 있는 오름의 무게감이 그렇게 묵직했기 때문이었나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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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식이나 교육은 흔히 계몽, 지혜, 각성과 혼동된다. 온 세상의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사람이 자신이나 타인에 관해서는 아무런 자각도 얻지 못했을 수 있다. 뛰어난 학식을 지닌 하버드대학 교수라 해서 반드시 현자인 것도, 자신이나 타인과 교감하는 것도 아니다. 반면 초등학교만 나온 선불교 스승이 평생 만난 그 누구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실제로 외적 지식만 추구하다보면 그보다 더 어려운 내적 인식의 추구와는 오히려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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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기까지 한 뉘우침은 처절한 자기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내면의 깊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고 큰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뉘우치기가 힘들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뉘우침은 왜 그토록 중요할까? 누군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우리는 왜 그가 뉘우쳤는지 여부에 신경 쓸까? 뉘우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많은 사람들은 매우 큰 차이가 생긴다고 믿는다. 뉘우친다는 것은 자기 인식의 여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어찌나 중요시하는지 그저 범죄자가 뉘우쳤다는 사실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도 많으며 심지어 그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용서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러 종교에서는 범죄자가 이 같은 내면의 여정을 거쳤는지 여부에 따라 내세에서의 운명이(그가 구제받을 것인지, 천국과 지옥 중 어디에 떨어질 것인지)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방인』에서 〈데드 맨 워킹〉에 이르는 여러 작품들이 뉘우침을 향한 여정 혹은 반反여정을 둘러싸고 펼쳐진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뉘우침 자체보다도 자기 인식의 여정이다(『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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