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다가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해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P188

소설을 쓰면서 약한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싫었다.
소설도 사람도 전부 다 싫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안 쓰고 안 읽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울지도 않았다. 다 잊어버린 척 열심히 연기했다. 그러다가 한 번쯤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편에 품고서 살았으니까.
- P190

소설을 쓴다는 건 조금씩 시간을 유예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90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의 연쇄로까지 이어진다. 현철은 모두가 가볍게 치부해버린 폭력의 상흔이 정말로 사소한 일이 되어버리지 않게끔, 그리고 자신의 "다음번 "만은 지켜내기 위해, 비참함을 무릅쓰고 정산을 시작한 것이다. 
- P194

반려자가 하물며 반려동물이라도 있어야 해. 서로 보듬어주고 보살펴줄 그런 존재가! 죽고 싶다 생각했다가도 내가 저거 때문에 못 죽지 그런 생각이 들게 해주는 거. 
- P204

정현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가도 그래도 저건 다갚고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으면 어차피 다 끝인데 그걸 왜 굳이 다 갚으려는 건지 스스로가 이해 안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현은 빚진 것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자신의 부채를 언제나 부모에게 떠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 P206

정현은 공공장소에서 크게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느라 자신의 속사정을 동네방네 소문내버리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이 여태껏 살면서 그만큼 화가 난 적이 없었기때문일 뿐이었다는 걸 정현은 그때 깨달았다. 
- P213

합리적인 셈법으로는 도무지 취합되지 않는 자료들이 정현의 마음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자료들은 정현이 단호한 결정을 내리려 할때마다 정현이 계산해놓은 결과값들을 죄 뒤섞어놓았다.
- P216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 P229

우리 모두는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진실이기를 바라는 쪽을 지지하는 데 익숙한 자들이니까......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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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의 속되고 척박한 마음에도 신앙이라는게 자라난다면 그 씨앗은 ‘보편‘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모든 것에 두루 미치고 통한다‘는 의미의 이 단어가 주는 울림이 살면 살수록 커진다.
- P141

나에게는 하나뿐인 하루, 하나뿐인 삶이 저이나 그이도 겪었던 반복적인 패턴의 재현일 뿐이라 생각하면 쓸쓸하다. 
- P142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우리에게 공평히 깃드는 무엇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사랑과 우정과 문학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내게 소설을 나누는 일은 나의 개별성과 우리의 보편성을 동시에 탐색하는, 가장 덜 기만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 P144

소중한 대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애도의 과정을 통해 상실감을 극복하고 현실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며, 이때 상실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유나 이상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만일 애도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인간은 슬픔의 과정을 계속 되풀이하는 멜랑콜리(melancholy) 상태로 빠져든다. 
- P149

작은 하자나 불편 사항도 말 꺼내지 않는 편이 항상 나았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혹은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절반의 가정하에 우리는 그 부탁에 대한 체력을 아꼈다.
- P156

그렇게 아무렇게 불쑥불쑥 꺼내도 미울 만큼의 미움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은 어떤 것일까. 시시해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명이 긴 미움은 어떤 것일까. 
- P168

정확히 잘 기억이 안 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돈이 아까워서 앞에서 미안한 척하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그건 너무 쉬워. 미안하다고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진짜 조건이고 뭐고. 사진 다 뿌리고 죽여버릴 거니까.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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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자가 명백하게 의도했던 의미들과, 작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때로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작품이 뒤늦게 갖게 되는 의미들을 서로 구별짓는 것이 비평의 여러 가지 목적들 중 하나다.
- P240

 기이하게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성과가 적은 쪽은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뫼르소에게 그의 인격을 계시하여 주는 것과 동시에 그 인격을 손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심판사가 그를 개종시키려 할 때 뫼르소는 귀찮다고 느낀다. 부속사제의 행동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끝내는 그를 폭발시킨다.
- P241

최근 미국의 여론은 감방 안에서 회고록을 쓴 어떤 사형수의 편을 들었다. 그 사형수에게 재능이 있다고 해서 죄가 덜어지는것일까? 그 일화와 《이방인》은, 어떤 사람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준다. 우리는 사형집행인의 역할은 맡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247

그러나 이러한 유머는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사람들이 자기를 재판에서 따돌리고 있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뫼르소는 거의 의식적으로 그 불의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 P255

어느 날 어떤 비평가는 말했다. 위대한 시는 항상 ‘자연의 감각과 정신적 감동 사이의 혼연일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방인》의 끝에 가서 뫼르소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바로 그 혼연일체다. 자신을 충만하게 의식함으로써 뫼르소는 또한 시인이 되는 것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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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량과 달성된 일의 효율도 눈에 띄게 나빠진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 P83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 P84

골!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 라는 안도감뿐이다. 
- P103

마라톤은 작고 친절한 마을이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런 곳에서 수천 년 전에 그리스 군이 처절한 전쟁 끝에 페르시아의 원정군을 배수진을 치고 물리쳤다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 P103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 힘들다.
- P107

근육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무거운 짐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워 나간다. 그리고 일단 해제된 기억을 다시 입력할 경우에는, 또 한번 같은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 P114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P116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 P121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 P121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 P122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 P126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P128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 P145

기록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 P186

"즐겁게 달리세요! Have a good time!"라고 답장 메일을 보낸다. 그렇다, 마라톤 레이스는 즐기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몇만 명의 사람들이 42킬로미터를 달린단 말인가.
- P203

다시 말하면, 낡은 가방을 계속 짊어지고 다닌다. 아마도 거듭될 안티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과묵한 바로크적인 원숙- 보다 겸허하게 표현한다면 ‘진화의 궁극적인 끝‘-을 향해서.
- P230

그러나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P255

그것이 가능한 한 나는 앞으로도 장거리 레이스적인 것과 더불어 생활을 하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이치가 닿는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인생일 것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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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 P7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 P19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 P25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 P26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 P27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 P36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 P39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 P40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것이다.
- P40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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