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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이다 -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왕 세종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역사는 500년이다. 임금은 27대 까지 이어졌다. 그 중 성군이라 일컫는 왕은 몇명이나 될까?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 항상 1등으로 올라가는, 대왕이란 단어가 붙는 왕이 몇 안되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조선의 기틀을 닦은 성군 세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나 싶으니 그의 업적이라고 할 한글창제와 과학과 음악의 발전 외에는 딱히 인간 세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던가. 우리의 역사속에 성군으로 우뚝서 국가의 지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왕세종을 그저 관대하고 능력있는 왕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해보며 [나는 조선이다]속에 담겨진 조선 제 4대 임금인 세종이 다스리던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삼남이 임금이 되는 길은 없었다. 아무리 총명하고 부지런해도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역적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학문에 빠져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자를 편애 편애하는 태종과 원경왕후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충녕대군이 갑작스레 기행으로 태종의 눈밖에 난 양녕이 폐세자가 되며 세자가 되고 21살에 임금이 된다.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뒤로는 물러앉은 상왕 태종이 버티고 있다. 4년간 임금이 아닌 임금으로서의 정치를 하던 세종은 조선이란 나라를 태평성대로 그리고 역사상 더이상의 진보는 없을 만큼 과학과 음악 그리고 인재의 양성을 통한 학문의 발전을 이루어 낸다. 세종은 준비된 임금이었을까?
세종의 주변에는 신분을 뛰어넘는 인재들이 넘치고 넘쳤다. 명재상의 표상이고 청렴결백의 상징인 황희 정승이 곁에 있었고 착한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하지만 우유부단했던 맹사성도 있었다. 황희 정승이 어릴적 동화책에서 본 만큼 깨끗하고 청렴한 공무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세종은 이에 개념치 않았다고 한다. 조그만 흠집보담은 큰 그릇을 더 가치있게 본 것이다. 도승지 안숭선과 조선의 시간을 발견한 장영실, 조선의 음악을 만든 박연 이외에도 제 3의 정승이었던 허조, 지혜로운 자들이 모여있었던 집현전의 학자들, 든든히 북방을 지키던 김종서 까지 알려져 있건 아니건 각각의 분야에 전문가였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의 재주도 출중했지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중용하여 온갖 지원을 해 주고 생각한 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역시 세종이었다.
유교를 중시여기고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강했던 조선의 임금이었지만 형식적인 면보다는 실리적인 면을 강조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줄 알았다. 중요한 결정은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해시킬 줄 알았다. 왕이면서도 처가가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몰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정비인 소헌왕후에게서 8명의 공자를 얻을 정도로 금실이 좋았던 세종은 건강면에서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던 거 같다. 눈병과 비만 그리고 임질의 논란은 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너무나도 몸을 혹사시킨 탓일까 .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조선의 참다운 인재가 54세의 아까운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현대인들이 배우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가CEO로의 면모가 후대에 연결되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종은 조선이었다.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무사로서의 임금에서 학자로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5 예와 법도를 세움으로서 조선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저 업적만을 칭송할 것이 아니라 업적뒤에 숨겨진 노력과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낸 세종의 인재 테크닉을 배워야 한다. 다그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당근질과 채찍질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리더십을 연구해야 한다. 세종에게서 인간과 군주의 모습을 볼수 있었고 세종과 그 이후 세조시대까지의 역사적 사실까지 알수 있었던 그래서 공부가 많이 되었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