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생활철학 - 유쾌한 삶을 위한 '에티카' 해설서
황진규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글이나 말 중에 위와 같은 글이 없다고 하네요.

이런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책 중 하나가 '에티카'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책 '스피노자의 생활철학'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에티카'를 설명하기에 앞서 '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앎'은 이론이자 지식으로서의 철학이고, '삶'은 실천이자 수행으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삶'을 통해 철학을 배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각종 제약이 있으므로 '앎'을 통해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생각이 아니라 저자의 철학에 대한 생각입니다.
'앎'과 '삶'을 통해 우리가 철학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은 삶을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없다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게' 됩니다.
'삶을 구성하는 방식'을 아는 이만 능동적으로 살 수 있고, 그 방식을 모르는 이는 삶에 휩쓸리게 되니까요.

누구나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살아지는' 사람이 더 많죠.
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누군가의 일을 대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사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나만의 철학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잘못 '정의'했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달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곳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역량'을 문제 삼기 전에 '정의'를 문제 삼아야 한다.
'자유로울 역량이 있는가?'보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 '자유'에 대해 저자는 '정말?',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유룰 누릴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요?
자유가 뭔데요?
그렇네요.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남이 정의해 놓은, 멋져 보이는 자유를 내 것인것 마냥 착각하고 있었네요.
'나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제멋대로 하려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부자유다.
오직 자신이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따른 '체계'를 만들어 나가며, 그 체계를 반복하는 '루틴'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다.
'자유'는 '규칙'의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규칙' 안에 있다.

흔히 '자유'라고 하면 규칙에 반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삶은 '나만의' 법칙과 체계위에서 반복되는 삶입니다.
'법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뜻으로 만든 법칙'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유스러운 삶은 편안함을 주지만, 부자유스러운 삶은 공허함, 불안함을 줍니다.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만큼, 그 꿈에 대한 '의욕'과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노력도 필요하다.
어떤 외부요인으로 인해서 자신의 의욕과 욕망이 생겼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외부원인을 하나씩 찾아갈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꿈'도 '자유'와 같습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말 '나의 의지'만을 반영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모님의 의사, 친구의 의견, 사회적 기준 등 외부요인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요?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왜 그 꿈을 가지게 됐는지부터 생각해 보길 권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을 다루는 법은 간명하다.
'슬픔'의 감정을 차분히 응시할 것.
그리고 너무 오래 '슬픔'을 눌러두지 말고 적절하게 표현할 것.
그럴 수 있다면, '슬픔'은 자기 파괴적인 '슬픔'이 되지 않는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
어떠한 감정이든 그것이 내면에 고여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감정들을 차분히 응시하고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감정을 긍정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감정들을 긍정하는 것만이 감정을 잘 다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감정을 잘 참는 것을 감정을 잘 다루다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참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내면에 쌓이지 않고 잘 흘러가게 두는 것, 이것이 잘 다루는 것입니다.
감정을 잘 흘려 보내기 위해 울고, 웃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감정들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건강과 신의 경배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선이라 하고, 그 반대를 악이라고 했다."
(에티카, 제1부, 부록)

예를 들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악'입니다.
반대로 '안중근'은 우리에게는 '선'이지만, 일본에서는 '악'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의 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행위일지라도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선과 악이 바뀌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때린다면 '악'이지만, 괴롭힙을 당하는 사람을 구해주기 위해 때렸다면 '선'이라고 합니다.
'때린다'라는 행위는 같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죠.
이는 '선악'뿐만 아니라 '질서/무질서'에도 같이 적용될 수 있는 같은 개념입니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분명 파격적이다.
하지만 그 파격은 '궤변의 파격'이 아니다. '진실의 파격'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에티카, 제3부, 정리 9, 주석)

'선악'에 대한 정의가 정말 파격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선'인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례도 이와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선,악'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 아닌가.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선=기쁨', '악=슬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고, '슬픔'을 거부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조직,사회의 기쁨'을 위해 '개인의 슬픔'을 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원치 않는 야근이나 살신성인과 같은 것이지요.

'희망'은 불확실한,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쁨이다.
그래서 그 기쁨은 항상 의심되는 기쁨이다.
'언젠가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라는 기쁨은 그 '언젠가'가 도래해야지만 확실해진다.
그래서 희망이 주는 기쁨은 언제나 불확실한 기쁨일 수밖에 없다.

희망이 주는 불확실한 기쁨.
이 기쁨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 노력의 댓가를 얻으면 확실한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얻지 못하면 스스로를 비관하고, 좌절하죠.
왜 그럴까요?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
'희망'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고, '공포'때문에 '희망'을 갖게 된다.
야박하지만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스피노자는 희망이 주는 불확실한 기쁨, 그와 반대되는 것이 불확실한 공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크면 클수록, 공포도 그와 비례하여 커집니다.
그렇기에 큰 기대를 갖고 있던 일에 실패하면 좌절 또한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절을 피하기 위해 희망을 가지면 안되는 것일까요?

희망 없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희망을 껴안고 사는 것은 얼마나 슬픈 삶인가.
더 많이 '희망'하는 삶은 더 많은 '공포'에 내몰리는 삶이고, 이는 결국 '안도'와 '절망'을 반복하는 삶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런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보다 우울한 삶도 없을 테다.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다 잘 될 거야'라는 억지스러운 희망 대신, '잘되지 않더라도, 내 삶을 사랑할 거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이 아닌 '사랑'을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안되서, 결혼을 못해서, 집을 못사서...
N포시대라 불리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취직을 할꺼야, 결혼을 할꺼야, 집을 살거야와 같은 '희망'보다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세요.
그 노력이 직장을 얻고, 배우자를 만나고, 집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해 하나다.
지금을 사는 것!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을 사는 것.
하지만 우리는 항상 과거와 미래에 매여 지금을 살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희망 없는 삶을 고민해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희망 없는 삶, 정확히는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희망 없이 사랑할 때,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 없이도 기쁜 삶을 살 수 있다.

지금에 충실하라.
당연한 이 글이 너무나 무겁고 진중하게 다가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스피노자에 푹 빠졌습니다.
저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말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생활철학'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립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도 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