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기술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김옥림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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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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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나 상대를 이기는 기술이 떠오른다.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제갈량, 루이 하우, 을파소 등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 생각이 절반만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의 설득은 말을 잘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눈,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일관성에서 나왔다.

먼저 제갈량은 확신에 찬 어투와 신상필벌로 사람을 움직였다. 그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고, 아끼던 마속이 군령을 어기자 눈물을 머금고 벌했으며, 스스로도 직위를 세 등급 낮추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엄격함이 오히려 신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형벌이 엄했는데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기준이 모두에게 공평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설득을 '상대를 내 쪽으로 끌고 오는 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제갈량의 방식은 '내가 먼저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보이는 일'에 가까웠다. 말이 행동과 어긋나면 아무리 논리가 훌륭해도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격장법으로 황충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화도 흥미로웠다. 다만 이것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자주 쓰면 조종이 된다는 책의 경고에 공감한다. 같은 기술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설득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술수가 된다.

루이 하우의 설득은 말이 아니라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후보 없이 선거를 치르면서도 철저한 조사로 전략을 세웠고, 루스벨트가 소아마비로 쓰러졌을 때는 7년을 곁에서 지켰다. 이런 사람의 말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 대목에서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는 문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사람은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위해 대가 없이 애쓰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 한편 그가 뜻이 꺾이면 루스벨트에게까지 욕을 퍼부었다는 대목에서는 의문이 들었다. 직설이 충언이 되려면 그 전에 쌓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미 믿음이 있는 관계에서의 직언과, 신뢰 없이 던지는 독설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이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그 바탕에 있던 진정성을 배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을파소는 예의와 과단성으로 설득했다. 고국천왕이 내린 관직이 마음에 차지 않았을 때, 그는 불만을 말하는 대신 더 현명한 사람을 쓰라고 에둘러 말했고, 왕은 그 뜻을 알아채고 국상 자리를 맡겼다. 직접 요구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다. 이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 뜻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설득인지 보여준다. 또 그는 진대법처럼 백성에게 실제로 이로운 정책을 과단성 있게 밀어붙였다. 이리저리 재다 때를 놓치는 사람보다, 신중히 생각하되 결정하면 곧장 실행하는 사람이 신뢰를 얻는다는 말은 나에게도 뼈아프다. 나는 결정을 미루다 기회를 놓친 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보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파악했다. 유비가 한 왕실의 재건을 바란다는 것을, 루스벨트가 믿고 맡길 참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고국천왕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을 인물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제갈량은 자신에게도 벌을 주었고, 루이 하우는 끝까지 곁을 지켰고, 을파소는 정책으로 말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했다. 데일 카네기가 말한 '상대의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선 말하기 전에 상대가 무엇을 걱정하고 원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내 주장이 아무리 옳아도 상대의 관심사와 닿아 있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자신 있게 말하되 과신하지 않으려 한다. 확신은 신뢰를 주지만 지나친 확신은 오만으로 보이고 다른 해법을 막는다는 지적을 기억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약속을 지키려 한다. 작은 약속을 꾸준히 지키는 사람의 말에는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려고 애쓰기 전에,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설득의 첫걸음이라는 것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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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혁신의 역사
앤드루 리 지음, 김광수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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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파나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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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정책 연설, 기업 전략 보고서, 대학의 비전 선언문에서 '혁신'이라는 단어를 보지 않는 날은 드물다. 너무 자주 쓰이다 보니 이 말은 어느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에 앤드루 리(Andrew Leigh)의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감각을 얻었다. 흔한 말일수록 그 뿌리를 한 번쯤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퀴에서 인공지능에 이르는 수천 년의 이야기를 짧게 훑으면서도 이 책은 하나의 질문을 붙든다. 인류는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왔는가. 저자는 그 답을 땜질(tinkering), 팀워크(teamwork), 무역(trade)이라는 세 가지 힘으로 정리한다.

우리는 혁신을 이야기할 때 으레 한 사람의 이름부터 떠올린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 전구를 밝힌 에디슨 같은 장면은 이야기로는 매끈하지만 현실의 혁신은 훨씬 지저분하고 느리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시작일 뿐이고, 그것이 쓸모 있는 기술이 되려면 고치고, 다시 만들고, 안 되는 이유를 하나씩 지워 나가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땜질'이라 옮긴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혁신이 거창한 천재의 몫이 아니라 끈질긴 반복의 결과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혁신의 문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팀워크와 무역의 강조도 같은 맥락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조직이 협력하며, 아이디어와 물건이 오가는 곳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처럼 수많은 연구자가 얽힌 거대한 협업을 보면 혁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활동이다. 혼자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교환의 부산물에 가깝다.

책의 또 다른 중심 개념은 '재조합'이다. 새로운 혁신은 이전의 혁신 위에 쌓인다. 페르시아에서 발전한 수학은 훗날 유럽 과학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고, 19세기의 정밀 공작기계는 전혀 다른 산업들을 열었다. 쓸 수 있는 도구가 쌓일수록 조합의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혁신의 속도는 빨라진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공개 데이터, 학제 간 연구가 하는 일도 결국 이 조합의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만드는 것의 대부분은 맨바닥에서의 발명이라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의 새로운 섞음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의외로 위안이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속에는 대가가 따른다. 넷플릭스가 비디오 대여점을 무너뜨리고 다시 할리우드를 겨냥했듯이, 새로운 기술은 낡은 산업을 밀어낸다. 테일러의 작업 재설계나 도요타의 지속적 개선 같은 과정 혁신은 노동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변화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같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잊기 쉽다. '파괴' 되는 쪽에는 구체적인 직업과 삶이 있다.

혁신은 인류의 진보하는 능력을 키우지만 해를 끼치는 능력도 똑같이 키운다. 화약과 하버-보슈 공법은 전쟁을 부추겼고, 석탄은 지구를 데웠으며, 원자폭탄은 지정학을 바꿔 놓았다. 방사선을 연구하다 목숨을 잃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는 지식의 대가가 때로 개인에게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허는 생명을 구하는 기술을 지키기도, 가두기도 했다. 그래서 혁신은 본래 선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혁신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끌 것인가다. 인센티브, 거버넌스, 윤리적 가드레일이 같은 기술을 전혀 다른 결과로 이끈다. 책의 전체 분위기는 낙관적이라고 한다. 혁신이 기대수명을 늘리고 영양 상태와 의학을 발전시켰으며 세계 경제 성장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낙관이 방치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설계된 제도 위에서 만들어진다.

책을 읽고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혁신을 '사람'이 아니라 '조건'의 문제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땜질하는 끈기, 협력하고 교환하는 관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인프라가 갖추어질 때 혁신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힘은 선악을 가리지 않으므로, 어디로 향하게 할지는 결국 우리가 만드는 제도와 선택에 달려 있다. 혁신의 역사는 결국 협력과 축적의 역사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새로운가"보다 "어떤 토대를 만들고, 누구에게 기회를 열어 줄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질문을 앞으로 내가 접하는 모든 '혁신'이라는 말 앞에 놓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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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비즈니스 트렌드 2027 - 휴머노이드 전성시대, 이제 휴먼의 미래는 없다
이소영.이예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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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2년 말 대형 언어모델(LLM) 기반 생성형 AI가 대중에게 열린 뒤, 우리는 불과 몇 해 사이에 세 번의 국면을 지나왔다. 2025년이 생성형 AI가 퍼진 해였다면, 2026년은 스스로 과업을 수행하는 AI 에이전트가 보편화된 해였다. 책은 2027년의 키워드로 ‘증폭(Amplification)’을 제시한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세상을 움직인 단어가 ‘생산’과 ‘효율’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의 판단과 의도를 얼마나 크게 키워 주느냐가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나의 체감과도 맞닿아 있다. 처음 챗봇을 쓸 때 나는 AI에게 “무엇을 더 빨리 해 줄 수 있느냐”를 물었다. 요약, 번역, 초안 작성처럼 시간을 아끼는 용도였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일정을 조율하고 자료를 모아 보고서의 뼈대까지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질문이 “이 일을 어떻게 맡길 것인가”로 바뀌었다. 도구는 사용법을 익히면 끝나지만, 동료는 역할과 권한, 책임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 책이 말하는 ‘도구에서 직원이 된 AI’는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AI 수익 방정식’이다. 2027년의 기업은 AI에 돈을 쓰기만 하는 기업과 AI로 돈을 버는 기업으로 갈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 갈림길은 누가 더 좋은 모델을 쓰느냐에서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지능은 이미 충분히 싸고 똑똑해졌고, 부족한 것은 그 지능이 돈을 벌게 만드는 설계라는 것이다. 무엇을 성과로 정의하고, 어느 업무 라인에 AI를 붙이고,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 사람이 확인할 것인가. 모델 성능이 빠르게 평준화되는 지금,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같은 모델을 쓰고도 어떤 팀은 회의록 요약에 머물고, 어떤 팀은 영업과 고객 응대의 흐름 전체를 바꾼다.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기존 업무에 AI를 ‘덧붙이느냐’, 처음부터 AI를 전제로 ‘다시 설계하느냐’에서 나온다. 책이 ‘피라미드를 뒤집는 시간’이라 부르는 흐름, 곧 첫 설계도가 전부를 좌우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내년의 비즈니스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은 도입 속도보다 업무를 다시 그리는 용기라고 본다. 산업별 트렌드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이커머스와 엔터테인먼트다. 아마존이 쇼핑 챗봇 루퍼스를 ‘알렉사 포 쇼핑’으로 통합하면서, 조수를 넘어 고객의 대리인으로 역할을 끌어올렸다는 사례가 그렇다. 이 에이전트는 다른 소매점 사이트에서 상품을 찾아 구매까지 대신 마친다. 자사 검색창을 지키는 대신 고객의 에이전트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소비자가 직접 비교하고 클릭하던 시대에는 화면 속 진열과 광고가 경쟁의 무기였다. 그러나 구매를 에이전트가 대행하면 기업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에이전트’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마케팅의 대상이 바뀌는 셈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책이 ‘관계 자체가 하나의 시장’이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돈을 내는 대상이 정보에서 정서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상에 동행하는 아바타를 ‘프렌덤(frienddom)’이라 이름 붙인 대목에서는 팬덤의 주어가 바뀌는 것을 실감했다. 노인 외로움을 덜어 준 소셜 로봇 사례도 같은 선상에 있다. 정보 처리는 곧 누구나 쓰는 기본 기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차별점은 신뢰, 취향, 정서적 연결 같은 ‘관계의 품질’이다. 이 부분은 기업에도 큰 숙제를 안긴다. 관계를 파는 사업은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AI는 화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운전석 없는 택시가 매주 수십만 명을 태우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자동차 공장에 출근하며, 물류창고의 로봇은 사람 수를 따라잡고 있다. 책은 이 ‘전면 무인화’의 속도를 기술 시연이 아니라 세 가지가 정한다고 짚는다. 대당 원가와 정비 비용이라는 단위경제, 사고 한 건의 무게라는 안전, 그리고 어느 자리를 사람으로 남길 것인가라는 선택이다. 이 세 번째 관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둘은 시간이 지나면 기술과 규모의 경제가 풀어 줄 수 있지만, 어떤 일을 사람에게 남길 것인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다. ‘불 꺼진 공장’에서 ‘불 꺼진 사무실’로 이어지는 흐름이 현실이 된다면, 효율만 따지는 기업과 사람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기업은 장기적으로 전혀 다른 신뢰를 얻을 것이다.  

책의 핵심 은유는 ‘워커(worker)가 아니라 워커(walker)로’라는 문장에 담겨 있다. AI가 실행을 맡을수록 사람은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방향과 의도를 가지고 걸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다소 낭만적인 표현이라고 느꼈지만, 읽을수록 매우 현실적인 요구로 다가왔다. 실행 비용이 0에 가까워지면 희소해지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이 3부에서 강조하는 원칙, 곧 처음과 끝은 사람이 쥔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AI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쉬워졌다. 어려운 것은 좋은 질문을 던지고, 결과물에 책임질 기준을 세우고, 그 결과가 누구에게 어떤 의미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기술 숙련도가 비슷해질수록 한 끗 차이는 문제의식과 질문의 격에서 나올 것이다. ‘AI 팀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해도,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까지 AI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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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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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학자가 철학의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할 때, 신비로움과 합리성의 경계에서 아름다운 울림을 만든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읽으며 우리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벨리가 말하는 관계적 양자역학의 핵심은 신선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상 즉, 고정된 속성을 가진 사물들로 이루어진 세상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자와 정신, 돌과 법칙, 판단과 은하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 동양철학의 상호의존성 개념과 만난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해온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는 가르침이 현대 물리학의 언어로 재탄생한 것처럼 느껴진다. 신비주의나 뉴에이지적 상상이 아닌, 입증 가능한 과학 이론으로 뒷받침한다. 이것이 바로 로벨리가. 다른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이유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이 있다. 근대 이성주의는 모든 것의 기초, 궁극의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벨리는 " 거북이가 거북이 위에 있고, 그 거북이도 거북이 위에 있고.." 라는 고전적 역설을 통해 이를 거부한다. 기초는 없다. 모든 사실은 다른 무언가에 상대적이며, 그 상대성 자체도 또 다른 상대성에 종속된다.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를 해방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관점이 유효함을 인청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가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론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다른 것과 상호작용하는 동적인 프로세 스타. 심지어 돌조차도 그렇다. 이는 불교의 무상(표)' 개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디에 있는가? 로벨리의 답은 우리는 "가족 중 하나"이며, 세상은 우리의 혈족"이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세상밖이 아니라 그 한복판이다.


로벨리가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우리의 지식은 항상 부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겸손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방의 문제이기도 하다. 완전한 이햬를 향한 무한한 추구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성주의의 과신 즉, 확실성, 직선성, 이성에 대한 목적 신뢰에 거리를 두고, 로벨리는 "원형의 민첩함, 복잡성, 모호성, 은유, 감정, 불확실성과 변화의 수용"을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사고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복해야 할 대상도, 이해해야 할 객체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그것의 일부이며, 그것과 춤을 추고 있다. 로벨리의 물리학은 신비로운 아름 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 진리를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확실성의 추구가 아니라, 이 관계성의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 친족 관계를 존중하는 것이 다. 지구도, 우주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두 같은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형제이며 자매인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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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사회 - 이상적 이미지를 넘어 자기-세계를 만드는 15가지 방법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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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 11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켠다. 인스타그램 피드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따뜻한 조명 아래 펼쳐진 책, 누군가의 완벽하게 정리된 책상, 누군가의 성공한 프로젝트. 나는 그 이미지 들을 빠르게 스와이프한다. 한 번, 두 번, 열 번. 자신도 모르게 한 시간이 흘렸다. 그리고 새벽 1시, 나는 다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다. "감성 있는 책상 셋팅",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 습관","나 같은 사람 도 할 수 있는 자기계발법". <환상사회> 속 문장. "우리는 타인의 환상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ㅎ 정확히 환상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깨닫고 있으면서도,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저자가 말한 '현실보다 이상이 더 가까운 삶'을 나도 살고 있다. 회사에서 '똑똑해 보이는 직원'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 "카리스마 있는 사람의 특징"을 검색했다. 그 영 상들은 나에게 이상'을 심었다. 빠르게 말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항상 미소 지으며, 실수를 절대 보이지 않는 사람. 그 이상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나는 하루종일 그 이상을 충족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때론 말을 더듬었고, 실수도 했고, 지쳐서 미소 지을 수 없던 날도 있었다. 그럼 나는 자책했다. 왜 난 안 되지? 저 사람들처럼은 왜 못할까?"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타인의 기준에 따른, 때론 대세에 어울리는, 남들에게 내보일 만한 '남다움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다움이 아니었다. 알고리즘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전이다. 내가 한 번 성공한 CEO의 하루" 영상을 본 후, 내 피드는 그 종류의 영상으로 가득 찬다. 마치 나의 욕망을 정확히 읽은 듯이. 저자가 지적한 그 대로다. "나는 '어쩌다' 나의 취향이 된 영상에 잠시 더 머물렀는데 AI 알고리즘은 더욱더 그 취향을 '나의 취향'으로 만들고 강화해준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내게 제시된 것들만 자꾸 '내 선택'처럼 느껴 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라고 믿는다. 더 문제적인 건, 내가 단순히 환상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또한 타인을 평가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요즘 내 친구들과의 대화를 되돌아보면, 자주 누군가를 평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저 사람 너무 가식적이야", 저건 좀 과한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SNS에서 누군가의 셀카를 보면서, 누군가의 성공담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판단한다. 그리고 내가 그 판단을 내릴 때마다, 일시적으로 나는 더 '현명하고', 더 '도덕적이고', 더 '객관적'인 사람이 된다. 마치 그 우월함이 나를 지켜줄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말이 정확하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결할수록 나는 더 옳고, 더 현명하고, 더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얻는다. 타인을 실컷 품평한 뒤에는 익명성 뒤에 숨어 안전감을 느낀다." 섬뜩한 부분이 있다. 타인을 향한 그 냉소적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외모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도 평가받게 되고, 내가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모두 가 서로를 '구경'하고 평가하는 동안, 나 역시 동시에 누군가의 판단 대상이 된다. 그런데 환상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저자도 인정한다. "이 책이 'SNS를 끊어라', '스마트폰을 버려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 체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세계를 만드는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이력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누군가의 이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관심 있는 것에 시간을 쓰고, 경험하고, 때론 실패하면서 본 무서가 대진고 자아이전보자 통라라버력에일에게 일이하 이상을 제시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이상을 추종하고 싶은 요망보다는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가 훨씨 아름다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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