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혁신의 역사
앤드루 리 지음, 김광수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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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파나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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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정책 연설, 기업 전략 보고서, 대학의 비전 선언문에서 '혁신'이라는 단어를 보지 않는 날은 드물다. 너무 자주 쓰이다 보니 이 말은 어느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에 앤드루 리(Andrew Leigh)의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감각을 얻었다. 흔한 말일수록 그 뿌리를 한 번쯤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퀴에서 인공지능에 이르는 수천 년의 이야기를 짧게 훑으면서도 이 책은 하나의 질문을 붙든다. 인류는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왔는가. 저자는 그 답을 땜질(tinkering), 팀워크(teamwork), 무역(trade)이라는 세 가지 힘으로 정리한다.

우리는 혁신을 이야기할 때 으레 한 사람의 이름부터 떠올린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 전구를 밝힌 에디슨 같은 장면은 이야기로는 매끈하지만 현실의 혁신은 훨씬 지저분하고 느리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시작일 뿐이고, 그것이 쓸모 있는 기술이 되려면 고치고, 다시 만들고, 안 되는 이유를 하나씩 지워 나가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땜질'이라 옮긴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혁신이 거창한 천재의 몫이 아니라 끈질긴 반복의 결과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혁신의 문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팀워크와 무역의 강조도 같은 맥락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조직이 협력하며, 아이디어와 물건이 오가는 곳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처럼 수많은 연구자가 얽힌 거대한 협업을 보면 혁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활동이다. 혼자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교환의 부산물에 가깝다.

책의 또 다른 중심 개념은 '재조합'이다. 새로운 혁신은 이전의 혁신 위에 쌓인다. 페르시아에서 발전한 수학은 훗날 유럽 과학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고, 19세기의 정밀 공작기계는 전혀 다른 산업들을 열었다. 쓸 수 있는 도구가 쌓일수록 조합의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혁신의 속도는 빨라진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공개 데이터, 학제 간 연구가 하는 일도 결국 이 조합의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만드는 것의 대부분은 맨바닥에서의 발명이라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의 새로운 섞음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의외로 위안이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속에는 대가가 따른다. 넷플릭스가 비디오 대여점을 무너뜨리고 다시 할리우드를 겨냥했듯이, 새로운 기술은 낡은 산업을 밀어낸다. 테일러의 작업 재설계나 도요타의 지속적 개선 같은 과정 혁신은 노동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변화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같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잊기 쉽다. '파괴' 되는 쪽에는 구체적인 직업과 삶이 있다.

혁신은 인류의 진보하는 능력을 키우지만 해를 끼치는 능력도 똑같이 키운다. 화약과 하버-보슈 공법은 전쟁을 부추겼고, 석탄은 지구를 데웠으며, 원자폭탄은 지정학을 바꿔 놓았다. 방사선을 연구하다 목숨을 잃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는 지식의 대가가 때로 개인에게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허는 생명을 구하는 기술을 지키기도, 가두기도 했다. 그래서 혁신은 본래 선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혁신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끌 것인가다. 인센티브, 거버넌스, 윤리적 가드레일이 같은 기술을 전혀 다른 결과로 이끈다. 책의 전체 분위기는 낙관적이라고 한다. 혁신이 기대수명을 늘리고 영양 상태와 의학을 발전시켰으며 세계 경제 성장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낙관이 방치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설계된 제도 위에서 만들어진다.

책을 읽고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혁신을 '사람'이 아니라 '조건'의 문제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땜질하는 끈기, 협력하고 교환하는 관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인프라가 갖추어질 때 혁신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힘은 선악을 가리지 않으므로, 어디로 향하게 할지는 결국 우리가 만드는 제도와 선택에 달려 있다. 혁신의 역사는 결국 협력과 축적의 역사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새로운가"보다 "어떤 토대를 만들고, 누구에게 기회를 열어 줄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질문을 앞으로 내가 접하는 모든 '혁신'이라는 말 앞에 놓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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