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는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 - 최선의 선택을 만드는 노벨 경제학자의 11가지 아이디어
한순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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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경제는 유례없는 변동성을 경험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예측을 벗어나 요동치고, 부동산 시장은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며, 가계부채는 임계점을 넘나든다. 뉴스를 볼 때마다 "다음 달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불안이 앞선다. 이런 상황에서 한순구 교수의 <경제학자는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를 읽으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던진 질문들이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학은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는 학문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돕는 학문이라는 책의 메시지는, 변동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하나의 나침반처럼 다가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벤 버냉키가 연구한 대공황과 금융위기의 메커니즘이었다. 불안 심리가 실물 경제보다 먼저, 그리고 더 빠르게 돈의 흐름을 움직인다는 그의 통찰은 최근 한국의 금융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금리 인상 우려나 해외발 악재가 뜨면 국내 증시와 채권시장이 즉각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이는 실제 기업의 펀더멘털이 하루아침에 바뀌어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의 심리적 공포가 서로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버냉키가 강조했듯,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은 이 공포의 전염을 얼마나 빠르게 차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마다 시장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신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의 변동성은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아브히지트 바네르지의 무리 짓기 이론은 한국의 부동산과 주식 시장을 설명하는 데 특히 유효하다. 전문 지식이 없는 투자자들이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가는 현상은, 몇 해 전 '영끌'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부동산 매수 열풍이나 특정 테마주로 자금이 쏠리는 현상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사야 한다는 심리는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자산 가격의 거품과 붕괴를 반복시키는 구조적 원인이 된다. 이 이론을 접하고 나니, 최근의 변동성이 단순히 외부 충격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각자의 정보와 판단에 기반해 선택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에릭 매스킨의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왜 좋은 제도가 필요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흘리면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도록 시스템을 설계해야 진실이 드러난다는 발상은,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제도나 각종 금융 공시 제도의 중요성과 맞닿아 있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된 전세사기나 회계 부정 사건들은 결국 정보의 비대칭성과 허술한 제도 설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정직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변동성을 줄이는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사실을 이 이론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올리버 하트와 벵트 홀름스트룀의 계약 이론이 다루는 '대리인 문제' 역시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인과 대리인의 이해관계가 어긋날 때 조직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최근 여러 기업에서 불거진 지배구조 문제나 공기업의 방만 경영 논란과 겹쳐 보인다. 대리인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이기 이전에, 그것을 방치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관점은 신선했다. 결국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조직과 국가 모두에 필요한 해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아제모을루의 제도 이론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 나라의 번영이 자원이나 지리적 환경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떤 제도를 선택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그의 연구는, 단기적인 변동성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어떤 제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지금 한국이 겪는 환율 변동, 부동산 불안, 저출생과 맞물린 성장 둔화 같은 문제들도 결국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경제·사회 제도를 설계하느냐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책을 통해 만난 여러 경제학자들의 이론은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지만,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완벽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어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구조와 태도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변동성이 심한 시기일수록 남을 따라가기보다 스스로 정보를 검토하고, 눈앞의 공포에 휩쓸리기보다 제도와 시스템의 힘을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벨 경제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것은 거창한 예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작지만 단단한 합리성이었다. 지금의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도, 이제는 조금 더 침착하고 구조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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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행동하는 사람이 이긴다 - 재능, 실력, 운명을 뛰어넘는 29가지 행동 매뉴얼
유루아자부 지음, 김진아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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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 첫 장에 목표를 빼곡히 적었고, 좋은 책을 읽으면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계획은 완벽했지만 실행은 늘 다음 주로, 다음 달로 미뤄졌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아서. 핑계는 언제나 그럴듯했고, 그 그럴듯함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다. 최근 두 편의 글을 연달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결국 인생을 바꾸는 것은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라도 움직이는 몸이라는 사실이다.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값이면 평범한 숙소의 좋은 방보다 고급스러운 공간의 소박한 방에 머무는 편이 낫다는 발상은 처음엔 다소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안에는 날카로운 통찰이 있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의 공기, 사람들의 태도, 공간의 분위기에 물든다.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기준을 따라가게 되고, 낮은 기준에 둘러싸이면 어느새 그 수준에 안주하게 된다. 흔히 말하듯 한 사람의 평균적인 삶은 가장 가까운 몇몇 사람들의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변화를 원할 때 가장 먼저 손대야 할 것은 의지력이 아니라 환경일지도 모른다. 굳게 마음먹는 것보다, 나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려주는 자리에 스스로를 놓아두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의지는 쉽게 바닥나지만 환경은 매일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나를 밀어준다. 두 번째로 마음에 남은 것은 시간과 돈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동에 드는 비용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결국 그 비용만큼의 성과도 내지 못한다는 말은 얼핏 냉정하게 들리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썼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이동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여건으로 바꾸는 것, 몸의 컨디션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 이런 선택들은 사치가 아니라 전략이다. 아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정작 아껴야 할 시간과 에너지는 엉뚱한 곳에서 새어 나간다. 반대로 무엇을 위해 쓰는지가 분명한 사람은 작은 지출 하나에도 자신의 방향성을 담아낸다. 세 번째로, 어쩌면 가장 뼈아팠던 대목은 자유 시간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음껏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가깝다고 한다. 하루 중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오히려 공허함과 무기력이 찾아온다는 연구 결과는, 흔히 꿈꾸는 조기 은퇴나 무한한 여가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낀다. 결국 행복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진행형의 감각이다. 목표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실감,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지치지 않게 만드는 연료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바로 남을 탓하거나 상황을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움직인다는 태도다. 우리는 흔히 결과가 나쁘면 환경 탓을, 타이밍 탓을, 주변 사람 탓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 환경을 선택한 것도, 그 타이밍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 사람들 곁에 계속 머무르기로 한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행동은 늦어지고, 행동이 늦어질수록 우리는 다시 생각으로 도망친다. 이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실행이다. 완벽하게 준비된 다음에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걸음을 오늘 안에 떼는 것. 그 한 걸음이 쌓이면 어느 순간 몸에 관성이 붙고, 그 관성은 다음 걸음을 이전보다 훨씬 가볍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묻는 습관을 들이려 한다.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움직이고 있는가. 완벽한 타이밍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확신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다. 생각을 줄이고, 환경을 바꾸고,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이야말로 화려한 재능이나 특별한 배경 없이도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성공의 방정식이다. 결국 이기는 사람은 가장 똑똑한 사람도, 가장 운이 좋은 사람도 아니다. 끝까지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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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발견 - 상실, 그 이후의 삶을 헤아려본 과학의 응답
바버라 블래츨리 지음, 제효영 옮김 / 디플롯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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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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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언제나 낯설다. 여러 번 사람을 떠나보내도, 슬픔이 익숙해지는 법은 없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낯섦의 정체를 처음으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바버라 블래츨리는 남편 크리스를 잃고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슬픔을 통과했다고 한다. 그 시간의 길이를 읽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동안 나는 슬픔에는 '적당한 기간'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잃고 한 해가 지나도록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나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거나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 책은 슬픔이 사회가 정해놓은 시간표를 따르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다가온 부분은 슬픔과 애도를 구분하는 대목이었다. 슬픔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면, 애도는 그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행위다. 나는 그동안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려 생각해 왔다. 슬퍼하는 것과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다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내가 왜 어떤 상실 앞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감정은 있는데 그것을 밖으로 꺼낼 통로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장례식이나 추모의 의식이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마음속에 갇힌 슬픔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주는 다리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 다리가 없으면 슬픔은 안에서 맴돌다 다른 모습으로, 이를테면 무기력이나 짜증, 알 수 없는 피로감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다.


재결합 이론과 인지-진화적 관점에 대한 설명도 인상 깊었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지면 울고, 찾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어른이 된 우리도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동안 습관처럼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곤 했다. 그것이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여전히 그분과 다시 이어지려는 본능적인 몸짓이었다는 것을 이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슬픔이란 결국 사라진 애착의 대상을 계속해서 찾아 헤매는 마음의 작동 방식이라는 설명은, 내가 겪었던 이상한 행동들에 이름을 붙여준 듯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찾음은 서서히 놓아줌으로, 그리고 삶을 다시 짜맞추는 적응의 과정으로 옮겨간다고 한다. 슬픔이 단지 견뎌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상실 이후의 삶을 새롭게 구성해가는 하나의 지혜로운 과정이라는 시선이 위로가 되었다.


'슬픔의 의료화' 문제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DSM-5에서 일 년 넘게 지속되는 슬픔을 '연장된 애도 장애'라는 질환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읽으며,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슬픔이 병으로 취급되는 순간, 그것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치료해야 할 결함처럼 느끼게 되지 않을까. 블래츨리는 슬픔이 문화와 관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그녀가 인용한 친구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죽음을 다루는 데 서툴다.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더 젊으니 곧 다른 사람을 만날 거야'와 같은 말들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슬픔을 서둘러 끝내라는 무언의 압박일 때가 많다. 나 역시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비슷한 말을 건넨 적이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어쩌면 진짜 위로는 말을 얹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은, 슬픔이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슬픔은 우리가 누군가를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이며, 사랑을 쌓는 데 걸린 시간만큼 그 사람 없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담고 있다. 블래츨리가 마지막에 남긴 말처럼, 나아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분명히 나아진다는 것, 그리고 그 여정이 뒷걸음질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의 슬픔 앞에 서게 된다면, 나는 서둘러 위로의 말을 찾기보다 그저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나 자신의 슬픔이 찾아올 때에도, 그것을 병으로 여기며 서둘러 지우려 하기보다 그 슬픔이 지나가는 그 나름의 길을 믿고 걸어가 보려 한다. 슬픔은 끝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사랑했던 마음이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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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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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는 지금까지 '듣는 사람'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작가가 설명한 그 구분 즉, 공기를 읽는 일과 호흡을 마시고 내뱉는 일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나 자신을 좋은 청자라고 믿어왔던 순간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적절한 타이밍에 웃고,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말을 골라온 시간들.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일처럼 보였지만, 돌이켜보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서 동의하는 척하는 동안, 나는 안전했다.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진짜 듣기란 화자와 청자가 함께 추는 춤이라고 말한다. 그 비유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들어주는 일이 한 사람만 무대에 세워두고 나머지는 관객석에서 박수를 치는 일이라면, 듣는 일은 두 사람이 서로의 리듬에 반응하며 함께 움직이는 일이다. 그러려면 나 역시 흔들려야 한다. 상대의 말에 내 생각이 부딪히고, 때로는 부서지고, 다시 다른 모양으로 맞춰져야 한다. 이것이 무섭다는 걸 이 글을 읽으며 비로소 인정하게 됐다. 나는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변하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겉으로만 듣는 사람인 척했던 것 같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은 장례식장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진심으로 애도했지만 정작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했던 그 순간을, 작가는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되짚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듣기와 침묵의 차이를 생각했다. 우리는 종종 침묵을 배려라고 부르지만, 어떤 침묵은 그저 내가 불편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짜 듣기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상대의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어설프더라도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상대에게 가닿을 자리를 마련하는 일. 그것은 예의 바른 침묵보다 훨씬 어렵고, 훨씬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려견 밤이와의 관계에서 듣기가 언어를 넘어서는 순간들이다. 사료를 코로 눌러보고 내쉬는 한숨, 침대에서 일어나는 몸짓의 미묘한 차이. 작가는 그것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앎의 범위를 넓혀가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듣기라는 것이 결국 관계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누군가의 말을 정확히 듣는다는 건 한순간의 집중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침묵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과 반복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잘 듣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것이다. 오래 듣고, 자주 곁에 머물렀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듣기는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더 가깝다. 무안공항 참사를 다룬 부분에서는 듣기가 언어화될 수 없는 순간까지 확장된다. 작가는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 솔직함이 오히려 듣기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느꼈다. 우리는 종종 위로의 말을 찾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작 들어야 할 소리, 창자가 끊어질 듯한 울음, 텅 빈 공항의 적막, 비에 씻겨 알아볼 수 없게 된 메모지의 흔적을 지나쳐버린다. 말을 보태는 일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곁에 몸을 두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듣기는 성립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위로한답시고 서둘러 말을 채워 넣었던 순간들을, 그로 인해 정작 상대의 침묵을 들을 기회를 놓쳤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책을 덮으며 나는 내가 지금까지 누구의 말을 '들어주었는지'와 누구의 말을 진짜로 '들었는지'를 구분해보려 애썼다. 부끄럽게도 후자의 목록은 훨씬 짧았다. 나는 여전히 공기를 읽는 데 익숙하고, 침묵 속에서 동의하는 데 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능숙함이 때로는 상대를 혼자 두는 일이었다는 것을.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다정함은 그 혼잣말을 대화로 바꾸는 일일 것이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다시 질문하며 함께 춤추는 일. 그 서투른 스텝을 밟는 용기를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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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풍요의 시대 - AI와 인류의 미래
피터 디아만디스.스티븐 코틀러 지음, 김태훈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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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68년 스튜어트 브랜드가 외쳤던 " We are as gods and we might as well get good at it "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더 이상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로봇공학의 급 속한 발전은 인류를 신화 속 신의 영역으로 진입시켰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의 제약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정보를 창조하고, 생명을 설계하며, 물질의 희소성을 풍요로 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신의 힘을 얻은 순간,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기술의 가속도는 인간의 지혜를 능가했고, 풍요는 새로운 형태의 불행을 낳았으며, AI의 등장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까지 위협하고 있다. 책은 초풍요의 시대에서 AI의 부상이 인류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초풍요의 시대는 단순히 물질의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보의 폭발, 선택지의 무한증식, 그리고 가능성의 무한 확장을 의미한다. 로봇 배송 드론Zipline은 아프리카의 혈액을 분 단위로 배송하여 산모 사망률을 51% 감소시켰다. 온라인 교육 Khan Academy는 2025년 1억 5천만 명 이상이 50개 언어로 학습할 수 있게 했다. iPs 세포 기술과 3D 바이오프린터는 장기 부족의 시대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이 구현해내는 것은 스케일의 민주화다. 과거 특권층만 누릴 수 있던 것이 이제 보통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깨끗한 물, 의료, 교육, 이동성 등,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손 안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풍요로움이 진정한 해방일까? John B. calhoun의 마우스 실험은 충격적이다.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된 환경에서 마우스 사회는 붕괴했다. 출생률은 떨어지고, 개체 간의 유대는 사라졌으며, 집단은 무의미한 반복행동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이 마우스 실험을 재현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무한한 정보를 제공 하지만, 동시에 우울증 발병률을 3배 증가시켰다. 소셜 미디어는 전 지구적 연결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심화된 고독감과 실존적 불안이다. 온라인 쇼핑은 욕망의 즉각적 충족을 제공하지만, 삶의 의미는 오히려 감소했다. 저자들이 말하는 "부정성 편향"은 실재한다. 우리 뇌는 진화적으로 위협에 민감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풍요 속의 공허함이다. 우리는 생 존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순간, 더욱 강력한 주인공이 무대에 나타났다. 인공지능.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능력을 복제하고, 확장하며, 심지어 초월하기 시작했다. ChatGPT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1억 사용자에 도달했고, 멀티모달 AI는 이미지, 음성,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생성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위협은 우리의 정체성 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homo sapiens)"로 정의했다. 하지만 AI가 우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창의성의 소유자라고 믿었지만, AI가 창의적인 작업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철학적 문제를 넘어 실촌적 위기가 되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초풍요의 시대가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AI 기술의 혜택은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 자산의 76%를 지배하는 상층부 10%는 AI 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다. 반면 하층 부 50%는 세계 자산의 2%를 소유하고 있으며, Al로 인한 실업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책에서 제시된 " Rising Floor Effect "는 통계적으로 사실일 수 있지만, 상층부의 상승 속도가 하층부의 상승 속도를 훨씬 능가한다. 격차는 절대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초풍요는 선택받음 자들의 풍요일 뿐, 보편적 풍요가 아니다. <We Are as Gods> 책의 제목이다. 미래의 지성체는 신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 힘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다. 기술적 위험으로 바이오테러, AI 의 오류, 기후 재앙, 인류학적 위험으로 의미 상실, 사회 붕괴, 실존적 공허이다. 마인드셋의 변화만으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집단적, 제도적, 철학적 혁신이 필요하다. 초풍요의 시대, AI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초풍요의 시대는 우리에게 신의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신의 힘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신처럼 행동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 세대가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는 진정한 유산이 될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기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미래를 목격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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