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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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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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남성은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간다. 가부장제의 틀은 여전히 그들에게 강인함과 지배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시대는 공감하고 돌볼 줄 아는 남성성을 목마르게 찾는다. 이 간극 속에서 수많은 남성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내면의 혼란을 안고 산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놀랍게도 그 지도는 수천 년 전 그리스인들이 상상한 신들의 세계에 숨어 있다. 심층심리학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인간 무의식에 내재한 보편적 패턴, 곧 '원형(archetype)'으로 이해한다.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 이 신들은 저마다 인간 내면의 특정한 힘과 충동, 결핍과 가능성을 형상화한다.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읽는 일이다. 모든 남성의 내면에는 '아버지'라는 원형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경험한 아버지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집단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는 이 아버지 원형의 진화를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라는 세 세대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 준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땅속 깊이 가두어 버린다. 새 생명이 빛을 보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이 이미지는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 개인의 의식이 태동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는 내면의 힘을 가리킨다. '나는 늘 이렇게 해왔다', '이게 내가 배운 방식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성, 집단의 규범과 관습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남성의 내면에는 우라노스가 살아 있다. 우라노스적 의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개인의 자각과 통찰이 자랄 틈이 없다. 억압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심리적·신체적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는 두통, 원인 불명의 피로, 잠재된 분노가 그 신호다. 우라노스는 비단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수많은 남성의 내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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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며 세상을 해방시킨다. 억압적 질서에 맞선 영웅적 반란이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크로노스는 태어나는 자식을 삼켜 버리는 독재자로 변한다. 자신이 타도했던 바로 그 억압을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 패턴을 끝없이 반복해 왔다. 혁명을 내걸고 등장한 지도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철권 통치자가 되는 것은 크로노스 원형의 집단적 발현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 드라마는 조용히 반복된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아들이 막상 아버지가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통제한다. 직장에서 상사의 억압에 분개하던 직원이 관리자가 되자 부하를 더 억압한다. 크로노스의 혁명은 내면이 미성숙한 채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결국 두려움이 지배 욕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 특히 오늘날 '잿빛 미래'를 사는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무력감과 우울은, 크로노스처럼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기성 세대의 구조적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제우스는 앞선 두 아버지와 다르다. 그는 자식을 감금하거나 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올림포스의 다양성을 꽃피운다. 제우스의 통치 방식은 명령과 지배가 아니라 경청과 중재에 가깝다. 서로 다른 신들이 갈등하고 충돌할 때 그는 각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배타적 왕정보다 의회 민주주의에 가까운 리더십이다. 주목할 것은 제우스가 여성성 에너지에 둘러싸인 신이라는 점이다. 어머니 레아와 할머니 가이아, 딸 아테나, 수많은 여신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고 유지한다. 그는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숙한 남성성이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내면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임을 제우스는 보여 준다. 물론 제우스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를 넘어 제우스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 남성에게 열려 있는 아버지 원형의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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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은 현대인이 가장 깊이 내면화한 신이다. 합리성, 명료함, 목표 지향, 감정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이것들이 오늘날 '이상적인 남성'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 2천 년의 서양 문명은 아폴론의 빛 아래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이 수학으로 우주의 법칙을 해명하고,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한 것은 바로 이 아폴론적 정신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폴론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명료함과 객관성을 추구한다. 복잡하고 통제 어려운 감정과는 굳건한 담을 쌓는다. 머리가 가슴을,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다. 이렇게 억압된 충동이 가장 파괴적인 법이다. 신화 속에서 아폴론은 연인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막무가내 돌진형'으로 돌변한다. 평소 그가 혐오하던 바로 그 날 것의 충동을 야만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아폴론적 남성은 종종 '영웅의 귀'로 세상을 듣는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해결해 버림으로써 그 에니그마를 영원히 사라지게 한 것처럼, 삶의 모호함과 역설을 제거해 버리려는 충동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진정한 지혜는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깊은 물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아폴론의 빛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오니소스는 현대인이 가장 오해하는 신이다. 술과 광란의 신이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진 그의 본질은 '조이(joy, 희열)'와 '엑스터시(ecstasy, 황홀경)'다. 이 신은 불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허벅지라는 두 자궁에서 두 번 태어난 '양성의 신'이다. 그는 여성 혐오가 없고, 몸과 자연과 본능의 세계에 친숙하다. 위계와 격식을 혐오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자였다. 신화는 분명히 경고한다. 디오니소스를 억압하고 무시한 자들(트라키아의 리쿠르고스 왕, 테바이의 왕자 펜테우스)은 광증의 벌을 받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한다. 이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오직 이성과 통제로만 살아가는 남성이 어느 순간 예측 불가한 분노 폭발이나 중독으로 무너지는 것은, 디오니소스라는 원형이 그림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청교도적 억압이 강한 사회일수록 카니발이 성행하고, 유교적 위계가 철저한 문화일수록 밤 문화가 발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것도 위험하다. 제어되지 않는 강렬함을 신성으로 착각하는 것은 자신을 태워버린 세멜레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선물(황홀경, 공동체적 해방감, 몸과 자연과의 합일)은 엄격한 의례와 경계 안에서만 온전히 받을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광대함에 담겨야 한다'는 페루 속담처럼, 이 신을 위한 자리를 삶 안에 마련하는 것이 현대 남성에게 주어진 과제다.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 제우스의 다양성. 아폴론의 이성, 디오니소스의 열정. 이 원형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올림포스는 열두 신이 갈등하고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다중심적 세계다. 건강한 내면이란 그 모든 힘들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다. 아폴론의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의 불길로 삶을 뜨겁게 살아내는 것. 제우스처럼 다름을 수용하는 너른 마음으로 내면의 모순을 견뎌내는 것이다. 신화는 '이렇게 살아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듣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면, 억압해온 충동, 인정하기 두려운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림자 속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빈 수사가 아니다. 내가 가장 부정하고 싶은 나의 모습 안에, 온전한 나로 나아가는 문이 숨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완벽한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신들도 질투하고 실수하고 상처받는다. 그것이 오히려 이 이야기들을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현대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아버지, 완벽한 이성, 완벽한 열정이 아니다. 자신 안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인정하면서도 제우스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아폴론의 빛을 들고 디오니소스의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그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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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미래 - AI 이후, 세계는 로봇으로 재편된다
공경철 지음 / 와이즈맵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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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21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무대 위에 처음 '로봇'이라는 존재를 올려놓았을 때, 관객들은 경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 낯선 피조물을 바라봤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도록 설계된 그 존재는 결국 창조자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불안을 건드린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로봇은 더 이상 무대 위의 상상이 아니다. 공장에서, 병원에서, 거리에서, 심지어 우리 집 거실에서도 로봇은 조용히 그 존재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인간과 로봇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로봇 기술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것이 단순한 공학의 산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로봇은 언제나 그 시대의 욕망과 두려움, 상상력과 기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 속에서 로봇공학의 세 가지 원칙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픽션의 장치가 아니었다.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기 위해 어떤 윤리적 기준이 필요한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물음에 대한 선구적인 사유였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오늘날 인공지능 윤리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961년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 '유니메이트'가 제너럴 모터스 공장에 투입되었을 때, 노동자들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그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로봇은 수많은 반복적이고 위험한 작업에서 인간을 밀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형태의 직업과 산업이 생겨났다. 기술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증기기관이 직조공의 일자리를 앗아갔지만, 동시에 철도 산업과 근대 도시를 만들어냈듯이 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로봇 기술에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로봇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일본이 정작 재앙 앞에서 로봇 한 대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술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었다. 화려한 시연 영상과 실험실의 성공이 실제 세계의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그 충격은 역설적으로 로봇 공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SF 영화 속의 영웅적인 로봇을 꿈꾸던 시대에서, 실제 환경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각성이 찾아온 것이다. 이후 2015년 DARPA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대한민국 KAIST 팀이 우승을 거머쥔 사건은 단순한 기술 경연의 승리가 아니었다. 로봇 기술의 패권이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가 보여준 압도적인 운동 능력, 그리고 한국의 DRC-HUBO가 보여준 안정성과 다기능성은 서로 다른 철학과 접근법이 로봇 공학의 지평을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오늘날 로봇 산업은 단일 기술의 영역을 훌쩍 넘어섰다.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정밀 모터, 클라우드 컴퓨팅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로봇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가상 훈련 플랫폼, 아마존의 물류 자동화 인프라, 테슬라의 자율주행 데이터 네트워크, 이 모든 것이 로봇이라는 중심축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로봇은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고,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서비스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소프트 로보틱스'의 부상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빅 히어로 6'에 등장한 포근하고 말랑한 로봇 베이맥스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그것은 캐릭터의 인기만이 아니었다. 로봇이 반드시 차갑고 딱딱한 강철 덩어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을 돌보는 로봇이라면 그 물리적 형태도 인간에게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은, 이후 웨어러블 로봇, 협동 로봇, 돌봄 로봇 등 새로운 범주의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KAIST 공경철 교수 연구팀이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거둔 성과는 이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웨어러블 로봇 '워크온슈트'를 착용하고 스스로 걷는 장면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상된 능력을 회복시키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기술의 가장 아름다운 쓰임새는 바로 이런 것이다.

피드백 제어라는 로봇 공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묘한 울림을 준다. 목표를 설정하고, 현재 상태를 측정하고, 그 차이를 줄여나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기술의 원리이기 이전에, 인간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목표로 설정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있는 현실은 어디인가.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로봇은 도구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이 투영된 거울이기도 하다. 로봇이 강하고 위험하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복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로봇이 부드럽고 돌보는 존재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연대와 공감 능력이 기술로 구현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로봇을 만드느냐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는 질문과 정확히 겹쳐진다. 카렐 차페크가 백 년 전에 제기한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동을 대신할 존재를 창조할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기술자의 연구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써내려가야 하는 이야기다. 로봇의 미래는 곧 인간의 미래이고, 그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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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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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목원 가드너 황금비님의 첵 <숲으로 출근합니다>를 읽고 나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정확히는, 덮었지만 자꾸 다시 펼치게 됐다. 특종을 쫓던 기자가 잡초를 뽑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 단순한 서사가, 읽는 내내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이 책이 다시 꺼내 들었다.

나무의사 다이어리라는 형식이 흥미롭다. 다이어리는 본래 시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책의 시간은 마감 시계나 회의 일정이 아니라, 목련이 꽃눈을 맺는 계절, 삼색참죽나무 새순이 세 번 색을 바꾸는 두 달, 무궁화가 매일 아침 새 꽃을 피우고 그날 저녁 지는 주기로 흐른다. 인간이 정한 달력이 아닌, 식물이 정한 달력 위에서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삶. 그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가장 낯설고 가장 매혹적인 감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은 저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억 6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온 목련은 공룡이 어슬렁거리던 백악기에 이미 꽃을 피웠다. 우리가 이른 봄 길가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는 그 탐스러운 꽃망울 안에, 인류의 역사 전체보다 훨씬 긴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봄날의 목련 한 그루는 이전과 같은 나무가 아니게 된다.

황금비가 나무의사로서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식물의 이름이나 학명, 개화 시기가 아니다. 그는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들에서 삶의 방식을 읽어낸다. 목련꽃이 북쪽을 향해 피는 이유는 겨우내 햇빛을 받은 꽃눈의 남쪽 부분이 더 단단하게 자라 꽃이 열리는 순간 그 무게에 밀리기 때문이다. 단지 성장의 차이가 빚어낸 방향이다. 그런데 그 방향이 흔들림 없이 북쪽을 가리킨다. 의도 없이 완성된 나침반. 삼색참죽나무의 새순이 처음엔 짙은 분홍, 다음엔 베이지, 마지막엔 초록으로 변하는 것은 자외선으로부터 여린 잎을 보호하기 위해 안토시아닌이 방패막이 되어주다가 엽록소가 충분히 만들어진 후에야 물러나는 과정이다.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워진다.

기생식물인 야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뿌리도 없고 잎도 없이, 억새의 뿌리에 기대어 8월 말 단 한 철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야고. 저자는 이 식물을 두고 수목원 생태계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말한다. 수목병리학 교과서는 기생식물을 방제의 대상으로 분류하지만, 수목원의 가드너들은 억새잎을 걷어 야고를 탐방객에게 보여준다. 잡초와 야생화를 가르는 것은 식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라는 오래된 말이 여기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1인분을 못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으면서, 저자는 야고를 통해 다양함이 곧 건강함이라는 수목원의 철학을 조용히 꺼내 놓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화려한 식물도감적 지식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삶을 식물의 언어로 번역하는 방식이다. 노루오줌을 심으며 저자는 식물이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찾아주는 일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쓴다. 그늘지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노루오줌을 양지에 심으면 타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토양에 억지로 뿌리를 내리려 했던 서울에서의 10년을 그는 조용히 돌아본다. 빠른 것이 미덕인 도시에서 느린 것들을 견뎌내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마을버스가 서는 태안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0.7배속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직업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이제 매 시간 발행되는 뉴스의 속도가 아니라, 겨울 내내 꽃눈을 부풀려가는 목련의 속도로 시간을 감각한다. 늦가을 수목원을 산책하며 통통해지는 꽃눈을 바라보고 내년 봄의 개화를 기대하는 그 감각은, 내일의 주가나 다음 달의 성과와는 전혀 다른 시간관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위해 지금의 겨울을 기꺼이 견디는 것. 그것이 나무의사의 달력이다.

나무의사라는 직업 자체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나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문가. 그런데 이 책에서 나무의사는 나무를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읽어내는 사람에 가깝다. 벚나무가 병해충에 약한 것은 벚나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토심이 얕고 배수가 나쁜 도심 환경에 억지로 이식된 결과다. 잘못된 가지치기, 줄기를 감는 현수막 끈, 콘크리트 위의 좁은 토양. 나무가 아프면 먼저 환경을 봐야 한다. 이 원칙은 식물학을 넘어서 어딘가 낯익은 윤리처럼 들린다.

동백나무 장에서 저자는 천리포수목원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30년에 걸쳐 태안 곳곳에 동백나무를 심어온 이야기를 전한다. 수목원에서 키운 삽수를 무료로 나누고, 재배 기술을 공유하고, 그 나무들이 지금은 마을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18만 평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수목원의 역사가 지역의 일상 속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다음 세대의 숲이 된다는 것. 나무의사의 다이어리가 단지 식물 기록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조용하다.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목련이 북쪽을 향하는 이유를, 야고가 억새 아래 숨어 사는 방식을, 금목서 향이 만 리까지 퍼진다는 말의 뜻을 천천히 들려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이 어떤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지금의 환경이 자신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곳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의사의 다이어리는 결국 처방전이 아니라 관찰 일지다. 식물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것들이 기특해 보이는 순간이 온다고 저자는 쓴다. 여린 새순이 자외선을 막기 위해 붉게 물드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금을 버티고 있다. 그 버팀을 기특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숲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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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인간의 태도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동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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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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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에게해 연안의 작은 도시 밀레토스에서 한 젊은 철학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었다. 탈레스는 세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통찰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달랐다. 그는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스승이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세상의 근원은 물이 아니라 무한하고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아페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 균형을 잡고 있다고도 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이 왜 대단한 일인지 쉽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지적 풍토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고대 세계 어디서나, 제자는 스승의 말을 받들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프세 딕시트(Ipse dixit)', 즉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는 관용구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지적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상징했다. 공자의 가르침도, 붓다의 말씀도, 조로아스터의 계시도 모두 계승되고 심화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의심받지는 않았다. 지식은 쌓이되 흔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전승되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혁명적이었다. 그는 스승을 버리지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 탈레스의 지적 유산을 충분히 흡수한 뒤, 그것을 발판 삼아 더 멀리 나아갔다. 이 단순해 보이는 태도 속에 과학적 사유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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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과학을 지식의 체계로 이해한다. 물리 법칙, 화학 공식, 생물학적 분류 같은 것들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 그리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과학적 인간을 규정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생명은 바다에서 탄생했으며, 지구의 환경이 변해감에 따라 생물들이 육지로 올라와 적응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어떤 생물이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다. 이는 다윈이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한 진화론의 핵심 직관을 기원전 6세기에 이미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생각은 체계적인 증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신화와 종교에 기대지 않고, 자연 현상 자체로부터 자연을 설명하려 했다. 이것이 과학적 태도의 핵심이다. 또한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상상을 했다. 우주의 다른 곳에도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우리의 세계는 그 무수한 세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통찰, 이것이 이후 인류가 원자를 발견하고, 전자기장을 정립하고, 암흑물질을 탐색하는 방식과 정확히 동일한 방법론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가정할 수 있다는 사유의 도약이야말로 과학을 신화로부터 분리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과학하는 인간은 모른다고 말할 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름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모름을 인식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수정한다. 진리는 단번에 도달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수평선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열어놓은 길은 바로 이 점진적 근사의 과정이었다.


과학은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스승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여서만이 아니었다. 밀레토스의 아고라, 즉 시민들이 모여 자유롭게 논쟁하고 서로의 의견을 비판하던 공공의 공간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민주주의적 토론의 문화가 지적 탐구의 방식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동등한 시민들이 권위에 기대지 않고 이성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고 논박하는 관행, 이것이 과학적 비판 정신의 사회적 토대였다. 이 연결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같은 인식론적 전제 위에 서 있다. 어떤 권위도 그 자체로 진리일 수 없으며, 주장은 근거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누구나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이 말했다고, 신이 계시했다고, 스승이 가르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은 증거와 논리에 의해 검증된다. 이 원리가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로, 지식의 영역에서는 과학으로 꽃을 피웠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이 연결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과학이 위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판을 억압하고 의심을 죄악시하며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는 과학적 진보와 공존하기 어렵다. 반대로 열린 토론과 건강한 비판 문화가 살아있는 곳에서 지식은 성장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행동이 단지 한 철학자의 개인적 용기가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산물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과학적 태도가 개인의 덕목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학하는 인간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기만 한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인가? 그렇지 않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를 비판했지만,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스승의 업적을 충분히 이해하고 흡수했기에 그 한계를 볼 수 있었다. 비판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상대를 알아야 더 잘 비판할 수 있고, 더 잘 비판해야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것이 맹목적 거부와 과학적 비판의 차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 태도는 힘을 발휘한다. 타인의 주장을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나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다. 두 태도 모두 이성의 포기다. 과학적 인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서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틀린 것이 있다면 용기 있게 말하되, 상대의 인격과 노력을 존중한다. 심지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균형이 나타난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아침의 바다 앞에서 경이를 느낄 수 있다. 나무에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에 물을 주고 대화를 걸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세계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수록, 그 복잡함과 정교함 앞에서 경외감은 오히려 커진다.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약 2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에 살고 있다. 양자역학, 유전공학, 인공지능, 우주론. 그러나 이 모든 성취의 근저에는 그가 처음 실천한 단순한 태도가 있다. 선인의 지식을 충분히 배우고, 그 한계를 냉정하게 파악하며, 더 나은 설명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적 태도는 단지 과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가려내야 하는 일반 시민에게도, 기후 위기나 팬데믹 같은 집단적 문제 앞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공동체에게도, 이 태도는 생존의 조건이다. 권위에 기대지도, 음모론에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증거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 틀렸다는 것을 알면 수정하는 것. 그리고 불확실성 앞에서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냥 스승이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가 2600년의 과학적 전통을 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이론이나 천재적 직관이 없어도, 매일의 작은 지적 용기들이 쌓여 세계는 조금씩 더 잘 이해된다. 오늘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 권위 있는 주장 앞에서도 '왜?'라고 묻는 것, 그것이 아낙시만드로스가 밀레토스의 아고라에서 시작한 일의 오늘날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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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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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릴 때 그네를 타면서 무서움과 짜릿함이 공존하는 그 감각을 기억하는가. 발끝이 하늘을 향할 때의 해방감, 그리고 다시 땅 쪽으로 내려오며 배 속이 간지러워지던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이 좋아서 계속 발을 굴렀다. 올라가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다.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바로 그 그네의 움직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오르고 내리고, 나아가고 돌아오는 그 진자 운동. 그것이 곧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려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거부하기 시작했다. 오직 위만을 향하고 싶어 했다. 성공, 행복, 건강, 쾌락. 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네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네의 본성에 반한다.

성공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흔히 착각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그 착각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슈미트의 말처럼, 성공은 우리를 부주의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오만함이 우리를 약하게 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그네의 운동 법칙이고, 삶의 문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려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 자리에 못을 박으려는 사람, 그리고 결국 그 못이 빠지면서 추락하는 사람. 그 충격은 스스로 내려온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다.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직한 용기다. "삶은 원래 그러하다"는 말은 냉소가 아니라, 현실을 눈 뜨고 마주하겠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의미에서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금욕적 쾌락주의'는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들린다. 즐기되 절제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슈미트가 말하는 금욕은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연습이다. 그리스어 '아스케시스(askesis)'는 본래 훈련, 연습을 뜻한다.커피 한 잔. 매일 다섯 잔씩 들이켜는 사람과, 사흘을 참은 뒤 천천히 음미하며 한 잔을 마시는 사람. 누가 더 깊은 기쁨을 얻을까. 당연히 후자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더 선명하게 느끼기 위해 잠시 물러서는 것. 그것이 금욕적 쾌락주의의 핵심이다.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사지 않는 경험은, 내 손 안에 이미 쥐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충분하다'는 감각, 라틴어로 'sufficere'.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주어야 하는 최소한이 아니라, 내가 세상으로부터 발견해내는 풍요다. 그 풍요를 발견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연습으로 길러진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뉴스, 알림, 피드, 메시지. FOMO, 즉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을 지배한다. 빠르게, 더 많이, 동시에. 하지만 슈미트는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하루에 수십 개의 숏폼 영상을 보고 나면 무언가를 본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반면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면, 그 장면들이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는다.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모였기 때문이다. 그는 'JOMO', 즉 '놓치는 것의 기쁨'을 제안한다. 선택하지 않는 자유, 비워두는 용기. 하나에 깊이 잠겨드는 것. 그것이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쁨은 양이 아니라 밀도에서 온다.

슈미트는 의미와 에너지가 함께 순환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느낄 때 에너지가 솟고, 에너지가 있을 때 의미가 보인다. 이 순환은 연결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처럼, 서로 다른 두 극이 연결될 때 비로소 전류가 흐른다. 연결이 끊어지면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하나의 극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쁨만 있어서도, 슬픔만 있어서도 안 된다. 오르는 것과 내려오는 것 사이, 그 왕복 운동 속에서야 비로소 삶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므로 의미 없음을 느낄 때의 처방은 거창한 성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잠깐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거나, 숲을 걷거나,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 그 작은 연결들이 에너지를 되살리고, 에너지가 돌아오면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슈미트가 아내, 딸과 함께 공원을 걷다 그네를 발견했을 때, 세 사람 모두 달려가 그네에 올랐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네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발을 굴러 흔들리는 그 15분은, 철학자에게 삶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거창한 자기계발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잠깐 일상 밖으로 그네를 타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운동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뜻대로 되는 부분이 극히 적다. 계획은 무너지고, 예상은 빗나가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밀려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진다. 그러니 오늘, 근처 공원의 그네 앞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올라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삶의 기술을 다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네를 타는 것은 어린 시절로의 도피가 아니다. 삶의 진동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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