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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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릴 때 그네를 타면서 무서움과 짜릿함이 공존하는 그 감각을 기억하는가. 발끝이 하늘을 향할 때의 해방감, 그리고 다시 땅 쪽으로 내려오며 배 속이 간지러워지던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이 좋아서 계속 발을 굴렀다. 올라가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다.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바로 그 그네의 움직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오르고 내리고, 나아가고 돌아오는 그 진자 운동. 그것이 곧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려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거부하기 시작했다. 오직 위만을 향하고 싶어 했다. 성공, 행복, 건강, 쾌락. 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네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네의 본성에 반한다.

성공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흔히 착각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그 착각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슈미트의 말처럼, 성공은 우리를 부주의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오만함이 우리를 약하게 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그네의 운동 법칙이고, 삶의 문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려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 자리에 못을 박으려는 사람, 그리고 결국 그 못이 빠지면서 추락하는 사람. 그 충격은 스스로 내려온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다.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직한 용기다. "삶은 원래 그러하다"는 말은 냉소가 아니라, 현실을 눈 뜨고 마주하겠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의미에서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금욕적 쾌락주의'는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들린다. 즐기되 절제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슈미트가 말하는 금욕은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연습이다. 그리스어 '아스케시스(askesis)'는 본래 훈련, 연습을 뜻한다.커피 한 잔. 매일 다섯 잔씩 들이켜는 사람과, 사흘을 참은 뒤 천천히 음미하며 한 잔을 마시는 사람. 누가 더 깊은 기쁨을 얻을까. 당연히 후자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더 선명하게 느끼기 위해 잠시 물러서는 것. 그것이 금욕적 쾌락주의의 핵심이다.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사지 않는 경험은, 내 손 안에 이미 쥐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충분하다'는 감각, 라틴어로 'sufficere'.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주어야 하는 최소한이 아니라, 내가 세상으로부터 발견해내는 풍요다. 그 풍요를 발견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연습으로 길러진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뉴스, 알림, 피드, 메시지. FOMO, 즉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을 지배한다. 빠르게, 더 많이, 동시에. 하지만 슈미트는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하루에 수십 개의 숏폼 영상을 보고 나면 무언가를 본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반면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면, 그 장면들이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는다.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모였기 때문이다. 그는 'JOMO', 즉 '놓치는 것의 기쁨'을 제안한다. 선택하지 않는 자유, 비워두는 용기. 하나에 깊이 잠겨드는 것. 그것이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쁨은 양이 아니라 밀도에서 온다.

슈미트는 의미와 에너지가 함께 순환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느낄 때 에너지가 솟고, 에너지가 있을 때 의미가 보인다. 이 순환은 연결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처럼, 서로 다른 두 극이 연결될 때 비로소 전류가 흐른다. 연결이 끊어지면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하나의 극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쁨만 있어서도, 슬픔만 있어서도 안 된다. 오르는 것과 내려오는 것 사이, 그 왕복 운동 속에서야 비로소 삶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므로 의미 없음을 느낄 때의 처방은 거창한 성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잠깐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거나, 숲을 걷거나,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 그 작은 연결들이 에너지를 되살리고, 에너지가 돌아오면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슈미트가 아내, 딸과 함께 공원을 걷다 그네를 발견했을 때, 세 사람 모두 달려가 그네에 올랐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네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발을 굴러 흔들리는 그 15분은, 철학자에게 삶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거창한 자기계발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잠깐 일상 밖으로 그네를 타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운동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뜻대로 되는 부분이 극히 적다. 계획은 무너지고, 예상은 빗나가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밀려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진다. 그러니 오늘, 근처 공원의 그네 앞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올라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삶의 기술을 다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네를 타는 것은 어린 시절로의 도피가 아니다. 삶의 진동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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