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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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남성은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간다. 가부장제의 틀은 여전히 그들에게 강인함과 지배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시대는 공감하고 돌볼 줄 아는 남성성을 목마르게 찾는다. 이 간극 속에서 수많은 남성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내면의 혼란을 안고 산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놀랍게도 그 지도는 수천 년 전 그리스인들이 상상한 신들의 세계에 숨어 있다. 심층심리학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인간 무의식에 내재한 보편적 패턴, 곧 '원형(archetype)'으로 이해한다.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 이 신들은 저마다 인간 내면의 특정한 힘과 충동, 결핍과 가능성을 형상화한다.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읽는 일이다. 모든 남성의 내면에는 '아버지'라는 원형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경험한 아버지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집단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는 이 아버지 원형의 진화를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라는 세 세대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 준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땅속 깊이 가두어 버린다. 새 생명이 빛을 보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이 이미지는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 개인의 의식이 태동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는 내면의 힘을 가리킨다. '나는 늘 이렇게 해왔다', '이게 내가 배운 방식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성, 집단의 규범과 관습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남성의 내면에는 우라노스가 살아 있다. 우라노스적 의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개인의 자각과 통찰이 자랄 틈이 없다. 억압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심리적·신체적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는 두통, 원인 불명의 피로, 잠재된 분노가 그 신호다. 우라노스는 비단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수많은 남성의 내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묻고 있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며 세상을 해방시킨다. 억압적 질서에 맞선 영웅적 반란이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크로노스는 태어나는 자식을 삼켜 버리는 독재자로 변한다. 자신이 타도했던 바로 그 억압을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 패턴을 끝없이 반복해 왔다. 혁명을 내걸고 등장한 지도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철권 통치자가 되는 것은 크로노스 원형의 집단적 발현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 드라마는 조용히 반복된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아들이 막상 아버지가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통제한다. 직장에서 상사의 억압에 분개하던 직원이 관리자가 되자 부하를 더 억압한다. 크로노스의 혁명은 내면이 미성숙한 채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결국 두려움이 지배 욕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 특히 오늘날 '잿빛 미래'를 사는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무력감과 우울은, 크로노스처럼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기성 세대의 구조적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제우스는 앞선 두 아버지와 다르다. 그는 자식을 감금하거나 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올림포스의 다양성을 꽃피운다. 제우스의 통치 방식은 명령과 지배가 아니라 경청과 중재에 가깝다. 서로 다른 신들이 갈등하고 충돌할 때 그는 각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배타적 왕정보다 의회 민주주의에 가까운 리더십이다. 주목할 것은 제우스가 여성성 에너지에 둘러싸인 신이라는 점이다. 어머니 레아와 할머니 가이아, 딸 아테나, 수많은 여신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고 유지한다. 그는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숙한 남성성이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내면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임을 제우스는 보여 준다. 물론 제우스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를 넘어 제우스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 남성에게 열려 있는 아버지 원형의 진화다.

아폴론은 현대인이 가장 깊이 내면화한 신이다. 합리성, 명료함, 목표 지향, 감정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이것들이 오늘날 '이상적인 남성'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 2천 년의 서양 문명은 아폴론의 빛 아래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이 수학으로 우주의 법칙을 해명하고,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한 것은 바로 이 아폴론적 정신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폴론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명료함과 객관성을 추구한다. 복잡하고 통제 어려운 감정과는 굳건한 담을 쌓는다. 머리가 가슴을,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다. 이렇게 억압된 충동이 가장 파괴적인 법이다. 신화 속에서 아폴론은 연인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막무가내 돌진형'으로 돌변한다. 평소 그가 혐오하던 바로 그 날 것의 충동을 야만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아폴론적 남성은 종종 '영웅의 귀'로 세상을 듣는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해결해 버림으로써 그 에니그마를 영원히 사라지게 한 것처럼, 삶의 모호함과 역설을 제거해 버리려는 충동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진정한 지혜는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깊은 물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아폴론의 빛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오니소스는 현대인이 가장 오해하는 신이다. 술과 광란의 신이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진 그의 본질은 '조이(joy, 희열)'와 '엑스터시(ecstasy, 황홀경)'다. 이 신은 불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허벅지라는 두 자궁에서 두 번 태어난 '양성의 신'이다. 그는 여성 혐오가 없고, 몸과 자연과 본능의 세계에 친숙하다. 위계와 격식을 혐오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자였다. 신화는 분명히 경고한다. 디오니소스를 억압하고 무시한 자들(트라키아의 리쿠르고스 왕, 테바이의 왕자 펜테우스)은 광증의 벌을 받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한다. 이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오직 이성과 통제로만 살아가는 남성이 어느 순간 예측 불가한 분노 폭발이나 중독으로 무너지는 것은, 디오니소스라는 원형이 그림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청교도적 억압이 강한 사회일수록 카니발이 성행하고, 유교적 위계가 철저한 문화일수록 밤 문화가 발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것도 위험하다. 제어되지 않는 강렬함을 신성으로 착각하는 것은 자신을 태워버린 세멜레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선물(황홀경, 공동체적 해방감, 몸과 자연과의 합일)은 엄격한 의례와 경계 안에서만 온전히 받을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광대함에 담겨야 한다'는 페루 속담처럼, 이 신을 위한 자리를 삶 안에 마련하는 것이 현대 남성에게 주어진 과제다.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 제우스의 다양성. 아폴론의 이성, 디오니소스의 열정. 이 원형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올림포스는 열두 신이 갈등하고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다중심적 세계다. 건강한 내면이란 그 모든 힘들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다. 아폴론의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의 불길로 삶을 뜨겁게 살아내는 것. 제우스처럼 다름을 수용하는 너른 마음으로 내면의 모순을 견뎌내는 것이다. 신화는 '이렇게 살아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듣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면, 억압해온 충동, 인정하기 두려운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림자 속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빈 수사가 아니다. 내가 가장 부정하고 싶은 나의 모습 안에, 온전한 나로 나아가는 문이 숨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완벽한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신들도 질투하고 실수하고 상처받는다. 그것이 오히려 이 이야기들을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현대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아버지, 완벽한 이성, 완벽한 열정이 아니다. 자신 안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인정하면서도 제우스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아폴론의 빛을 들고 디오니소스의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그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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