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앞선 두 아버지와 다르다. 그는 자식을 감금하거나 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올림포스의 다양성을 꽃피운다. 제우스의 통치 방식은 명령과 지배가 아니라 경청과 중재에 가깝다. 서로 다른 신들이 갈등하고 충돌할 때 그는 각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배타적 왕정보다 의회 민주주의에 가까운 리더십이다. 주목할 것은 제우스가 여성성 에너지에 둘러싸인 신이라는 점이다. 어머니 레아와 할머니 가이아, 딸 아테나, 수많은 여신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고 유지한다. 그는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숙한 남성성이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내면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임을 제우스는 보여 준다. 물론 제우스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를 넘어 제우스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 남성에게 열려 있는 아버지 원형의 진화다.
아폴론은 현대인이 가장 깊이 내면화한 신이다. 합리성, 명료함, 목표 지향, 감정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이것들이 오늘날 '이상적인 남성'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 2천 년의 서양 문명은 아폴론의 빛 아래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이 수학으로 우주의 법칙을 해명하고,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한 것은 바로 이 아폴론적 정신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폴론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명료함과 객관성을 추구한다. 복잡하고 통제 어려운 감정과는 굳건한 담을 쌓는다. 머리가 가슴을,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다. 이렇게 억압된 충동이 가장 파괴적인 법이다. 신화 속에서 아폴론은 연인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막무가내 돌진형'으로 돌변한다. 평소 그가 혐오하던 바로 그 날 것의 충동을 야만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아폴론적 남성은 종종 '영웅의 귀'로 세상을 듣는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해결해 버림으로써 그 에니그마를 영원히 사라지게 한 것처럼, 삶의 모호함과 역설을 제거해 버리려는 충동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진정한 지혜는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깊은 물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아폴론의 빛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