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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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소연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손을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뺨에 갖다 댄 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손.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뺨과 뺨을 맞대고,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경험을 함께 한다.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는 바로 그 정도의 것이다. 크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으며, 심지어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흐릿해질 수 있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실재했던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위로를 너무 거창하게 상상한다. 누군가 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해주고, 적절한 말을 건네며,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장면. 하지만 예소연의 소설 안에서 위로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선이는 기문에게, 기문의 엄마가 나의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엄마가 얽혀 있는 복잡한 채무 관계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낯선 저택의 거실에서 바닥을 함께 닦는다. 기문이 마임으로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잔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닦는 행위에 선이도 무릎을 꿇고 동참한다. 그게 전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금두꺼비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달라진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위로의 가장 솔직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고통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닦아내려 한다는 것을 믿어주는 일. 무릎을 꿇고 함께 바닥을 닦는 일. 예소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희지는 두부 할머니에게 매일 혈압을 재주고, 설거지를 하고, 두부를 먹는다. 그 관계를 수영 씨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돈을 받고 일하는 관계다. 계약이 끝나면 남이 된다. 하지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냥 '희지'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확인된다.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그냥 희지. 백지처럼 담백한 이름. 그 이름 안에는 어떤 역할도, 어떤 기능도 덧씌워져 있지 않다. 그냥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예소연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해 관계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오가는 실제적인 것들에 집중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할 수 있다. 반면 어린 시절 잠깐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도 25년 만에 나타나 차가운 뺨에 손을 갖다 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다. 나와 같은 바닥을 닦고 있느냐. 같은 언덕을 오르고 있느냐.

유선과 여사의 관계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다. 여사는 어린 유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보여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유선은 결국 성인이 되자마자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5년이 지난 뒤 청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사를 기다린다. 여사가 자신의 뺨을 후려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뺨을 맞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왜일까. 뺨을 맞는 것이 따뜻할 리 없다. 하지만 그 행위 안에는 여사가 유선에게 5년간 하지 못한 모든 말이 담겨 있다. 네가 떠나서 나는 이렇게나 아팠다는 것. 네가 돌아와서 나는 이렇게나 기쁘다는 것. 여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선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맞는다. 그 맞음 안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패가 된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온기는 늘 이런 식으로 전달된다. 부드럽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몸이 먼저 안다. 선이가 기문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댈 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손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할 때, 유선이 여사의 등을 따라 그 낡은 모닝에 올라탈 때. 몸과 몸이 닿는 그 순간들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뜨겁다.

우리는 지금 관계의 효율을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관계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피로하고 소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정리하라고 조언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그 조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예소연은 그 조언이 닿지 않는 자리를 비춘다. 정리해야 마땅한 관계인데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 아무 사이가 아닌데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없는 사람들. 선이에게 기문이 그렇고, 희지에게 두부 할머니가 그렇고, 유선에게 여사가 그렇다. 이 인물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미숙해서가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엮인다. 그리고 그 엮임 안에서, 아주 작고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살아남게 한다.

마임에 대한 기문의 설명이 계속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것,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예소연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혼자 보고 있는 것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누가 봐도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고통과 간절함과 외로움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 앞에 내밀고, 당신도 이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그리고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닦는 사이가 된다. 그것이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의 정체다. 거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뺨을 때리는 방식으로 전달되기도 하는. 하지만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그 정도의 온도. 그리고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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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 ㅣ 지식 벽돌
이일하 지음 / 초봄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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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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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 창가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잎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고, 줄기는 어제와 같은 각도로 서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사진을 꺼내 비교해 보면 무언가 달라져 있다. 잎이 하나 더 생겼고, 줄기가 창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 식물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식물의 시간 속에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다. 빠른 것은 살아 있고, 느린 것은 멈춰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식물을 배경으로 대한다. 무대의 막처럼, 도시의 조경처럼, 식탁 위의 재료처럼. 식물은 늘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 전체 생물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물이다. 우리가 배경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이 행성 생명계의 압도적 본문이다. 이 역설은 하나의 질문을 불러온다. 우리는 왜 식물의 시간을 읽지 못하는가?


식물의 시간이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동물은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망치고, 배가 고프면 움직인다. 그 반응의 단위는 초 혹은 분이다. 반면 식물은 환경의 변화에 생장으로 응답한다. 빛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자란다. 가뭄이 오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곤충에 뜯기면 방어 물질을 합성한다. 이 반응의 단위는 시간, 날, 때로는 계절이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생장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씨앗이라도, 빛이 있는 곳에서 발아하면 초록 떡잎을 펼치고, 어둠 속에서 발아하면 노란 하배축을 길게 뻗는다. 환경이 유전자의 표현을 다시 쓰는 것이다. 동물이 태어날 때 몸의 기관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식물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형태를 계속 만들어 간다. 식물은 영원히 배아 상태로 사는 생명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 가소성은 느림의 산물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없기에,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형태로 자신을 재설계한다. 불리한 환경을 피하는 대신, 그 환경을 이롭게 쓰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약한 빛에서는 잎을 넓고 길게 펼쳐 광합성 면적을 늘리고, 강한 빛에서는 잎을 둥글고 작게 만들어 자외선 피해를 줄인다. 이 정교한 적응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물의 지혜는 빠른 판단이 아니라 느린 조율에서 나온다.


느림의 반대편에는 영속성이 있다. 식물은 느리기 때문에, 오래 산다. 식물의 줄기 끝과 뿌리 끝에는 정단분열조직이라 불리는 작은 세포 집단이 있다. 이 조직에서는 세포 분열이 쉬지 않고 일어나며, 새로운 잎과 줄기와 뿌리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동물의 배아줄기세포처럼, 거의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집합소다. 덕분에 식물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외부의 병이나 재해가 없는 한, 정단분열조직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식물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뉴턴의 사과나무를 생각해 보자. 1816년 폭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진 그 나무는 4년 뒤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웠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식물은 죽지 않았다. 오늘날 그 나무의 클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 과학관 마당에서 자라고 있다. 2500년 전 부처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잘라 스리랑카에 심은 나무의 후손이, 지금 서울 조계사 앞에 서 있다. 식물은 가지 하나를 잘라 새로운 땅에 심는 것만으로 개체를 이어 간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을 식물은 진화의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발명했다. 이 영속성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우리는 언제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다. 그래서 빠름을 숭배한다. 빨리 배우고, 빨리 성취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압박이 삶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식물의 시간은 순환한다. 낙엽은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 뿌리가 자란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생명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는다. 식물의 느림은 그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곤충이 잎을 갉아 먹으면, 공격받은 잎 주변에서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인자가 만들어진다. 놀라운 것은 공격받은 잎만이 아니라 같은 식물의 다른 가지, 심지어 이웃한 다른 식물까지 같은 방어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시스테민이라는 펩타이드 신호가 식물체 안을 이동하고, 헥시놀 같은 휘발성 물질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이웃 개체에게 경보를 전한다. 에틸렌이라는 기체 호르몬은 한 나무의 낙엽 소식을 이웃 나무에게 알린다. 가을 숲에서 같은 종의 두 나무가 나란히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화학의 언어로 나누는 대화의 결과다. 이 소통은 전화선도 신경도 없이 이루어진다. 화학 물질이 공기와 토양과 뿌리를 타고 천천히 퍼져나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느리지만, 식물은 이 방식으로 개체를 넘는 공동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202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질소가 부족한 토양으로 뻗은 뿌리는 줄기를 통해 질소가 풍부한 쪽의 뿌리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뿌리 한쪽이 얻은 정보를 줄기가 통합해 다른 뿌리의 생장을 조절하는 것이다. 다윈이 140년 전에 직관적으로 포착했던 것, 식물의 뿌리는 단순한 흡수 기관이 아니라 생장 전체를 조율하는 중추라는 통찰이, 오늘날 분자 수준에서 증명되고 있다. 식물은 뇌가 없지만 판단한다. 신경이 없지만 소통한다. 형태가 아닌 기능으로 존재하는 식물의 지성은, 빠른 회로가 아니라 느린 화학의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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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 느림을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우리 자신이 너무 빠르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타임랩스로 촬영한 덩굴식물의 영상을 처음 본 사람은 놀란다. 바위를 향해 뻗어 가고, 장애물을 넘고, 지지대를 찾아 줄기를 감는 그 움직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의지는 아니지만, 환경을 읽고 반응하는 정교한 생물학적 과정이다. 다만 우리의 시간 감각에는 그것이 정지로 보일 뿐이다. 식물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야말로 부산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식물이 느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빠른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너무 빠른 채널에 맞춰져 있어서 식물의 주파수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학자들이 쌓아온 지식은, 그 주파수에 귀를 맞추는 법을 알려준다. 광합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루비스코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이면서도 지구 전체 생명의 토대가 되는지, 파이토크롬이 어떻게 빛의 파장을 읽어 개화의 타이밍을 결정하는지, ABC 모델이 어떻게 꽃잎과 수술과 암술의 배치를 유전자의 조합으로 설명하는지. 이 지식들은 단순한 사실의 목록이 아니다. 식물이 세계를 감각하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알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은 여기서 진실이 된다.


루비스코는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효소다. 초당 두세 번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 효소를 보완하기 위해 식물은 잎 전체 단백질의 20퍼센트 이상을 루비스코로 채운다. 느림을 풍요로 메우는 것이다. 지구 전체에서 루비스코는 가장 많은 단백질이다. 그 느리고 비효율적인 분자가, 지구 생명계의 에너지 순환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이 식물의 시간이 가르쳐 주는 역설이다. 빠른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느리더라도, 충분히 많고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 개화를 결정하는 것은 낮의 길이가 아니라 밤의 길이라는 발견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원인이 있을 때가 많다. 식물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비튼다.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정단분열조직의 세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뿌리털이 토양의 수분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잎의 기공이 빛의 양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는 정지로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식물 자신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멈추면 비로소 보이고, 알면 더 잘 보인다. 식물의 시간에 잠시 속도를 맞추어 보는 일. 그것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의 언어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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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
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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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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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
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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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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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의학의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이해한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미신에서 과학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그 관점에서 보면 한의학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유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흥미롭다. 기원을 둘러싼 논쟁, 국가 간 지식의 이동, 제도와 인간 사이의 긴장, 그리고 전통이 현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한의학의 역사 안에 촘촘히 얽혀 있다.


한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출발점 자체에서 나온다. 침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중국의 전통적인 답은 확고하다. 황제의 시대, 혹은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침의 원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생각보다 취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발굴된 바늘 같은 도구를 곧바로 침 도구로 단정하는 것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굴되는 동일한 형태의 도구도 침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뾰족한 도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경혈을 자극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증명되지 않은 긴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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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 야마다 케이지는 이 문제를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뜸이 기원전 5세기, 침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경에 등장했다고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흔히 침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폄석이 실은 침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도구라는 지적이다. 폄석은 상처를 째고 고름을 빼내는 외과적 도구였고, 침은 건강한 피부에 자극을 주어 치료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의료 행위였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진화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연속성을 가정하지만, 실제로 두 도구의 용도와 원리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여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사료가 끼어든다. 1937년 처음 발굴되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 잊혔던 소영자 유적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조사를 통해 새로운 빛을 받는다.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발견된 수많은 바늘들 — 그것도 군사 지도자나 지역 유지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시신 위, 즉 가장 소중한 물건을 함께 묻는 자리에서 — 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직조 바늘이라면 여성의 무덤에, 방추차 같은 관련 유물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화살촉이라면 유기물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남은 가능성은 의료 도구였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침의 발원지를 한반도 북쪽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중국의 고전 황제내경이 세계를 인식하던 범위 바깥에, 이미 독자적인 의료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늘 기록된 것의 역사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발굴은 조용히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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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권력이다. 이 명제는 한의학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다. 고려가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문관 선발과 함께 의업 고시를 함께 도입한 것은 의료 인력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업과 주금업이라는 두 개의 의과 고시는,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자면 내과의와 외과의를 별도로 선발하는 체계에 해당한다. 치료하는 자의 자격을 국가가 인증한다는 발상은,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일부임을 뜻한다. 조선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세종 시대에 등장한 의서습독관이라는 직책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던 고유한 제도였다. 이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의서를 읽고 분류하고 요약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의료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번역이나 요약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하고 재편집하는 일이었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방대한 편찬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조용한 노동 덕분이었다. 역사는 이름을 남긴 편찬 책임자들을 기억하지만, 실제로 지식을 처리하고 연결한 것은 이름 없는 습독관들이었다.


의녀 제도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허도가 처음 건의했을 때의 명분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였지만, 실질적 이유는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 여성들을 선발해 훈련시킨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전문화된 의료 인력 집단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종기 치료, 침술, 산부인과적 처치, 약재 감별 — 이들이 담당한 업무의 범위는 단순한 보조 역할을 훨씬 넘어섰다. 성종 때 제정된 의녀권과조목은 실력이 없으면 퇴출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금이라는 의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술을 숨기지 않았다고 항변한 사건은, 그 기술이 얼마나 오랜 수련의 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 살에 시작해 열여섯에 겨우 터득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전통 의료 기술이 얼마나 체득에 의존하는 것이었는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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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염병이다. 삼국시대 천연두는 신라 왕을 두 명이나 죽였고, 일본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은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사실상 구한 것도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역사는 군사력과 외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균은 어떤 지휘관도 내리지 않은 명령을 실행했다. 조선의 방역 체계는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1786년 홍역 유행 당시 정조가 시행한 대책을 보면, 의료진 당직제, 구역별 환자 배당, 무료 치료 대상자 지정, 치료 실적 보고, 교통편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염병 대응 매뉴얼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물론 그 당시의 치료가 효과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37만 명이 사망한 해에 서울에서 치료한 환자가 6000명 남짓이었다는 숫자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의료를 공공의 책임으로 조직화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전염병이 돌 때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동요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국가가 나서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 지도자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표현. 오늘날에도 대형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고 사과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공동체가 위기 앞에서 요구하는 것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19세기는 조선 의학이 자기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약용은 음양오행, 오장육부, 맥으로 오장의 상태를 읽는다는 전통의학의 이론 체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서양의 해부학을 접하며 인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조선에 소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전통 치료 기술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이론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유배지에서 수십 년간 지역민들의 의사 역할을 했고, 홍역 전문서를 저술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론과 실천은 때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왜 효과가 있는지 설명하는 언어가 틀렸더라도, 어떤 처치가 효과적이라는 경험적 축적은 별도로 존재한다. 현대 의학도 많은 치료법의 기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임상에서 활용한다. 설명의 정합성과 치료의 유효성은 동일하지 않다. 이제마의 사상체질의학은 이 맥락에서 특히 흥미롭다.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흘러오던 전통의학의 흐름에서 갑작스럽게 체질 분류 체계가 등장한다. 19세기 유럽에서도 골상학을 비롯한 다양한 체질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제마의 발상이 완전히 고립된 천재성의 산물이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럽의 체질론들이 도태된 반면 사상체질의학이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 경험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찰과 분류만으로는 의학이 되지 않는다. 그 분류가 실제 치료 결과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임상 언어가 된다.


한의학의 역사를 읽는 것은 지식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온 의서들이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고, 조선의 인삼이 일본으로 넘어가 새로운 산업을 낳고, 서양의 해부학이 동아시아의 기 개념으로 재해석된다. 지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송나라는 황제내경 영추 완본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요청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 텍스트는 고려가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의학은 여전히 과학의학과 마찰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다. 그 경계를 둘러싼 논쟁,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앎이 공인된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더 오래된 질문의 반복이다. 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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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AI가 만듦 - 기획부터 제작까지, 10배속 영화 제작의 비밀
한선옥.조인호.문현웅 지음, 무암(MooAm) 기획 / 파지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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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살았다. 찍고 싶은 장면이 있었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의 벽이 먼저였다. 장비가 없고, 편집을 모르고, 무엇보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손발을 묶었다. 그 꿈은 꿈인 채로 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 한 권이 그 오래된 자물쇠를 건드렸다. AI를 활용한 영상 제작을 다룬 책이었는데, 나를 가장 먼저 흔든 것은 기술 설명이 아니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대는 곧 누구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대"라는 문장이었다. 묘하게도 그 말이 나를 위축시키는 대신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경쟁이 시작됐다는 것은, 출발선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책에서는 생성형 AI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말한다. 어느 주의 한국 유튜브 조회수 1위가 AI로 제작된 동물 영상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AI가 만든 콘텐츠가 이미 '신기한 실험'의 단계를 넘어 사람들의 시간과 감정을 실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그 영상을 본 2천만 명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영상을 만든 사람이 어떤 대단한 전문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니, 지금도 두렵다. AI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내가 만든 것이 정말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혹여 누군가의 것을 침범하는 건 아닌지. 책은 이 불안도 피하지 않는다. 딥페이크, 저작권 침해, 허위정보 생성 — 기술의 이면에 도사린 그림자들을 솔직하게 다루면서, 그래서 더 신중하게, 그러나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 균형 잡힌 시선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책이 제시하는 'VISION'이라는 프레임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처음 8초 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후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좋은 장비보다 좋은 설계가 영상을 살린다는 것. 이 말들은 AI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어쩌면 글쓰기에도, 말하기에도, 모든 표현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결국 기술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가 핵심이라는 것을 책은 반복해서, 그러나 지겹지 않게 강조한다.

나는 만들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윤곽은 있다. 내가 자라난 지역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려하지 않고, 넓지도 않은 세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신선할 수 있는 장소다. 전문 카메라도, 조명 장비도, 편집팀도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 없음이 더 이상 '불가능'의 이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암이라는 제작사가 AI를 활용해 대규모 군중 장면이나 판타지 요소를 구현했다는 사례는, 예산이 아니라 발상이 콘텐츠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의 한계가 창의력의 한계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다고 AI가 모든 것을 대신해줄 거라는 환상을 품지는 않는다. 책에서 말하는 AI는 '감독'이 아니라 '조감독'이다. 지루한 반복 작업을 대신하고, 상상을 시각화하는 데 힘을 보태주지만, 무엇을 찍을지, 왜 찍을지, 누구를 향해 말을 거는지는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이야말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AI는 무한한 가능성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기술의 파도가 온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파도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모래사장에 서서 구경만 했다. 겁이 나기도 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파도는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 안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밀려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차라리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는 쪽이 낫지 않을까. 나는 이제 조금씩 시작해보려 한다. 완벽한 첫 작품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담고 싶은 장면 하나를 AI와 함께 구현해보는 것, 그 경험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출발이다. 언젠가 그 작은 출발이 쌓여, 내 이름이 담긴 영상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조금 두렵다. 하지만 이제 그 두려움이 나를 멈추게 하는 이유가 아니라,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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