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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소연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손을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뺨에 갖다 댄 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손.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뺨과 뺨을 맞대고,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경험을 함께 한다.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는 바로 그 정도의 것이다. 크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으며, 심지어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흐릿해질 수 있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실재했던 것 같다.우리는 종종 위로를 너무 거창하게 상상한다. 누군가 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해주고, 적절한 말을 건네며,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장면. 하지만 예소연의 소설 안에서 위로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선이는 기문에게, 기문의 엄마가 나의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엄마가 얽혀 있는 복잡한 채무 관계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낯선 저택의 거실에서 바닥을 함께 닦는다. 기문이 마임으로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잔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닦는 행위에 선이도 무릎을 꿇고 동참한다. 그게 전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금두꺼비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달라진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위로의 가장 솔직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고통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닦아내려 한다는 것을 믿어주는 일. 무릎을 꿇고 함께 바닥을 닦는 일. 예소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희지는 두부 할머니에게 매일 혈압을 재주고, 설거지를 하고, 두부를 먹는다. 그 관계를 수영 씨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돈을 받고 일하는 관계다. 계약이 끝나면 남이 된다. 하지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냥 '희지'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확인된다.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그냥 희지. 백지처럼 담백한 이름. 그 이름 안에는 어떤 역할도, 어떤 기능도 덧씌워져 있지 않다. 그냥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예소연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해 관계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오가는 실제적인 것들에 집중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할 수 있다. 반면 어린 시절 잠깐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도 25년 만에 나타나 차가운 뺨에 손을 갖다 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다. 나와 같은 바닥을 닦고 있느냐. 같은 언덕을 오르고 있느냐.유선과 여사의 관계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다. 여사는 어린 유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보여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유선은 결국 성인이 되자마자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5년이 지난 뒤 청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사를 기다린다. 여사가 자신의 뺨을 후려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뺨을 맞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왜일까. 뺨을 맞는 것이 따뜻할 리 없다. 하지만 그 행위 안에는 여사가 유선에게 5년간 하지 못한 모든 말이 담겨 있다. 네가 떠나서 나는 이렇게나 아팠다는 것. 네가 돌아와서 나는 이렇게나 기쁘다는 것. 여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선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맞는다. 그 맞음 안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패가 된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온기는 늘 이런 식으로 전달된다. 부드럽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몸이 먼저 안다. 선이가 기문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댈 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손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할 때, 유선이 여사의 등을 따라 그 낡은 모닝에 올라탈 때. 몸과 몸이 닿는 그 순간들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뜨겁다.우리는 지금 관계의 효율을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관계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피로하고 소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정리하라고 조언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그 조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예소연은 그 조언이 닿지 않는 자리를 비춘다. 정리해야 마땅한 관계인데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 아무 사이가 아닌데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없는 사람들. 선이에게 기문이 그렇고, 희지에게 두부 할머니가 그렇고, 유선에게 여사가 그렇다. 이 인물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미숙해서가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엮인다. 그리고 그 엮임 안에서, 아주 작고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살아남게 한다.마임에 대한 기문의 설명이 계속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것,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예소연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혼자 보고 있는 것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누가 봐도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고통과 간절함과 외로움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 앞에 내밀고, 당신도 이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그리고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닦는 사이가 된다. 그것이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의 정체다. 거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뺨을 때리는 방식으로 전달되기도 하는. 하지만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그 정도의 온도. 그리고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