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 지식벽돌
이일하 지음 / 초봄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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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봄날 오후, 창가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잎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고, 줄기는 어제와 같은 각도로 서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사진을 꺼내 비교해 보면 무언가 달라져 있다. 잎이 하나 더 생겼고, 줄기가 창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 식물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식물의 시간 속에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다. 빠른 것은 살아 있고, 느린 것은 멈춰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식물을 배경으로 대한다. 무대의 막처럼, 도시의 조경처럼, 식탁 위의 재료처럼. 식물은 늘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 전체 생물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물이다. 우리가 배경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이 행성 생명계의 압도적 본문이다. 이 역설은 하나의 질문을 불러온다. 우리는 왜 식물의 시간을 읽지 못하는가?


식물의 시간이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동물은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망치고, 배가 고프면 움직인다. 그 반응의 단위는 초 혹은 분이다. 반면 식물은 환경의 변화에 생장으로 응답한다. 빛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자란다. 가뭄이 오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곤충에 뜯기면 방어 물질을 합성한다. 이 반응의 단위는 시간, 날, 때로는 계절이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생장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씨앗이라도, 빛이 있는 곳에서 발아하면 초록 떡잎을 펼치고, 어둠 속에서 발아하면 노란 하배축을 길게 뻗는다. 환경이 유전자의 표현을 다시 쓰는 것이다. 동물이 태어날 때 몸의 기관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식물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형태를 계속 만들어 간다. 식물은 영원히 배아 상태로 사는 생명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 가소성은 느림의 산물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없기에,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형태로 자신을 재설계한다. 불리한 환경을 피하는 대신, 그 환경을 이롭게 쓰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약한 빛에서는 잎을 넓고 길게 펼쳐 광합성 면적을 늘리고, 강한 빛에서는 잎을 둥글고 작게 만들어 자외선 피해를 줄인다. 이 정교한 적응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물의 지혜는 빠른 판단이 아니라 느린 조율에서 나온다.


느림의 반대편에는 영속성이 있다. 식물은 느리기 때문에, 오래 산다. 식물의 줄기 끝과 뿌리 끝에는 정단분열조직이라 불리는 작은 세포 집단이 있다. 이 조직에서는 세포 분열이 쉬지 않고 일어나며, 새로운 잎과 줄기와 뿌리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동물의 배아줄기세포처럼, 거의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집합소다. 덕분에 식물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외부의 병이나 재해가 없는 한, 정단분열조직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식물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뉴턴의 사과나무를 생각해 보자. 1816년 폭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진 그 나무는 4년 뒤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웠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식물은 죽지 않았다. 오늘날 그 나무의 클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 과학관 마당에서 자라고 있다. 2500년 전 부처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잘라 스리랑카에 심은 나무의 후손이, 지금 서울 조계사 앞에 서 있다. 식물은 가지 하나를 잘라 새로운 땅에 심는 것만으로 개체를 이어 간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을 식물은 진화의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발명했다. 이 영속성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우리는 언제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다. 그래서 빠름을 숭배한다. 빨리 배우고, 빨리 성취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압박이 삶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식물의 시간은 순환한다. 낙엽은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 뿌리가 자란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생명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는다. 식물의 느림은 그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곤충이 잎을 갉아 먹으면, 공격받은 잎 주변에서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인자가 만들어진다. 놀라운 것은 공격받은 잎만이 아니라 같은 식물의 다른 가지, 심지어 이웃한 다른 식물까지 같은 방어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시스테민이라는 펩타이드 신호가 식물체 안을 이동하고, 헥시놀 같은 휘발성 물질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이웃 개체에게 경보를 전한다. 에틸렌이라는 기체 호르몬은 한 나무의 낙엽 소식을 이웃 나무에게 알린다. 가을 숲에서 같은 종의 두 나무가 나란히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화학의 언어로 나누는 대화의 결과다. 이 소통은 전화선도 신경도 없이 이루어진다. 화학 물질이 공기와 토양과 뿌리를 타고 천천히 퍼져나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느리지만, 식물은 이 방식으로 개체를 넘는 공동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202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질소가 부족한 토양으로 뻗은 뿌리는 줄기를 통해 질소가 풍부한 쪽의 뿌리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뿌리 한쪽이 얻은 정보를 줄기가 통합해 다른 뿌리의 생장을 조절하는 것이다. 다윈이 140년 전에 직관적으로 포착했던 것, 식물의 뿌리는 단순한 흡수 기관이 아니라 생장 전체를 조율하는 중추라는 통찰이, 오늘날 분자 수준에서 증명되고 있다. 식물은 뇌가 없지만 판단한다. 신경이 없지만 소통한다. 형태가 아닌 기능으로 존재하는 식물의 지성은, 빠른 회로가 아니라 느린 화학의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왜 이 느림을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우리 자신이 너무 빠르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타임랩스로 촬영한 덩굴식물의 영상을 처음 본 사람은 놀란다. 바위를 향해 뻗어 가고, 장애물을 넘고, 지지대를 찾아 줄기를 감는 그 움직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의지는 아니지만, 환경을 읽고 반응하는 정교한 생물학적 과정이다. 다만 우리의 시간 감각에는 그것이 정지로 보일 뿐이다. 식물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야말로 부산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식물이 느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빠른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너무 빠른 채널에 맞춰져 있어서 식물의 주파수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학자들이 쌓아온 지식은, 그 주파수에 귀를 맞추는 법을 알려준다. 광합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루비스코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이면서도 지구 전체 생명의 토대가 되는지, 파이토크롬이 어떻게 빛의 파장을 읽어 개화의 타이밍을 결정하는지, ABC 모델이 어떻게 꽃잎과 수술과 암술의 배치를 유전자의 조합으로 설명하는지. 이 지식들은 단순한 사실의 목록이 아니다. 식물이 세계를 감각하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알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은 여기서 진실이 된다.


루비스코는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효소다. 초당 두세 번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 효소를 보완하기 위해 식물은 잎 전체 단백질의 20퍼센트 이상을 루비스코로 채운다. 느림을 풍요로 메우는 것이다. 지구 전체에서 루비스코는 가장 많은 단백질이다. 그 느리고 비효율적인 분자가, 지구 생명계의 에너지 순환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이 식물의 시간이 가르쳐 주는 역설이다. 빠른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느리더라도, 충분히 많고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 개화를 결정하는 것은 낮의 길이가 아니라 밤의 길이라는 발견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원인이 있을 때가 많다. 식물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비튼다.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정단분열조직의 세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뿌리털이 토양의 수분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잎의 기공이 빛의 양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는 정지로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식물 자신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멈추면 비로소 보이고, 알면 더 잘 보인다. 식물의 시간에 잠시 속도를 맞추어 보는 일. 그것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의 언어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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