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제도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허도가 처음 건의했을 때의 명분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였지만, 실질적 이유는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 여성들을 선발해 훈련시킨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전문화된 의료 인력 집단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종기 치료, 침술, 산부인과적 처치, 약재 감별 — 이들이 담당한 업무의 범위는 단순한 보조 역할을 훨씬 넘어섰다. 성종 때 제정된 의녀권과조목은 실력이 없으면 퇴출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금이라는 의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술을 숨기지 않았다고 항변한 사건은, 그 기술이 얼마나 오랜 수련의 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 살에 시작해 열여섯에 겨우 터득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전통 의료 기술이 얼마나 체득에 의존하는 것이었는지를 느낀다.
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염병이다. 삼국시대 천연두는 신라 왕을 두 명이나 죽였고, 일본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은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사실상 구한 것도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역사는 군사력과 외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균은 어떤 지휘관도 내리지 않은 명령을 실행했다. 조선의 방역 체계는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1786년 홍역 유행 당시 정조가 시행한 대책을 보면, 의료진 당직제, 구역별 환자 배당, 무료 치료 대상자 지정, 치료 실적 보고, 교통편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염병 대응 매뉴얼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물론 그 당시의 치료가 효과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37만 명이 사망한 해에 서울에서 치료한 환자가 6000명 남짓이었다는 숫자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의료를 공공의 책임으로 조직화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전염병이 돌 때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동요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국가가 나서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 지도자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표현. 오늘날에도 대형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고 사과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공동체가 위기 앞에서 요구하는 것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