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
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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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의학의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이해한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미신에서 과학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그 관점에서 보면 한의학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유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흥미롭다. 기원을 둘러싼 논쟁, 국가 간 지식의 이동, 제도와 인간 사이의 긴장, 그리고 전통이 현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한의학의 역사 안에 촘촘히 얽혀 있다.


한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출발점 자체에서 나온다. 침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중국의 전통적인 답은 확고하다. 황제의 시대, 혹은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침의 원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생각보다 취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발굴된 바늘 같은 도구를 곧바로 침 도구로 단정하는 것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굴되는 동일한 형태의 도구도 침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뾰족한 도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경혈을 자극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증명되지 않은 긴 거리가 있다.

일본 학자 야마다 케이지는 이 문제를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뜸이 기원전 5세기, 침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경에 등장했다고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흔히 침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폄석이 실은 침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도구라는 지적이다. 폄석은 상처를 째고 고름을 빼내는 외과적 도구였고, 침은 건강한 피부에 자극을 주어 치료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의료 행위였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진화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연속성을 가정하지만, 실제로 두 도구의 용도와 원리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여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사료가 끼어든다. 1937년 처음 발굴되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 잊혔던 소영자 유적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조사를 통해 새로운 빛을 받는다.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발견된 수많은 바늘들 — 그것도 군사 지도자나 지역 유지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시신 위, 즉 가장 소중한 물건을 함께 묻는 자리에서 — 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직조 바늘이라면 여성의 무덤에, 방추차 같은 관련 유물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화살촉이라면 유기물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남은 가능성은 의료 도구였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침의 발원지를 한반도 북쪽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중국의 고전 황제내경이 세계를 인식하던 범위 바깥에, 이미 독자적인 의료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늘 기록된 것의 역사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발굴은 조용히 상기시킨다.

지식은 권력이다. 이 명제는 한의학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다. 고려가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문관 선발과 함께 의업 고시를 함께 도입한 것은 의료 인력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업과 주금업이라는 두 개의 의과 고시는,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자면 내과의와 외과의를 별도로 선발하는 체계에 해당한다. 치료하는 자의 자격을 국가가 인증한다는 발상은,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일부임을 뜻한다. 조선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세종 시대에 등장한 의서습독관이라는 직책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던 고유한 제도였다. 이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의서를 읽고 분류하고 요약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의료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번역이나 요약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하고 재편집하는 일이었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방대한 편찬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조용한 노동 덕분이었다. 역사는 이름을 남긴 편찬 책임자들을 기억하지만, 실제로 지식을 처리하고 연결한 것은 이름 없는 습독관들이었다.


의녀 제도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허도가 처음 건의했을 때의 명분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였지만, 실질적 이유는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 여성들을 선발해 훈련시킨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전문화된 의료 인력 집단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종기 치료, 침술, 산부인과적 처치, 약재 감별 — 이들이 담당한 업무의 범위는 단순한 보조 역할을 훨씬 넘어섰다. 성종 때 제정된 의녀권과조목은 실력이 없으면 퇴출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금이라는 의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술을 숨기지 않았다고 항변한 사건은, 그 기술이 얼마나 오랜 수련의 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 살에 시작해 열여섯에 겨우 터득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전통 의료 기술이 얼마나 체득에 의존하는 것이었는지를 느낀다.

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염병이다. 삼국시대 천연두는 신라 왕을 두 명이나 죽였고, 일본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은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사실상 구한 것도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역사는 군사력과 외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균은 어떤 지휘관도 내리지 않은 명령을 실행했다. 조선의 방역 체계는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1786년 홍역 유행 당시 정조가 시행한 대책을 보면, 의료진 당직제, 구역별 환자 배당, 무료 치료 대상자 지정, 치료 실적 보고, 교통편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염병 대응 매뉴얼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물론 그 당시의 치료가 효과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37만 명이 사망한 해에 서울에서 치료한 환자가 6000명 남짓이었다는 숫자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의료를 공공의 책임으로 조직화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전염병이 돌 때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동요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국가가 나서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 지도자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표현. 오늘날에도 대형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고 사과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공동체가 위기 앞에서 요구하는 것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19세기는 조선 의학이 자기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약용은 음양오행, 오장육부, 맥으로 오장의 상태를 읽는다는 전통의학의 이론 체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서양의 해부학을 접하며 인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조선에 소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전통 치료 기술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이론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유배지에서 수십 년간 지역민들의 의사 역할을 했고, 홍역 전문서를 저술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론과 실천은 때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왜 효과가 있는지 설명하는 언어가 틀렸더라도, 어떤 처치가 효과적이라는 경험적 축적은 별도로 존재한다. 현대 의학도 많은 치료법의 기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임상에서 활용한다. 설명의 정합성과 치료의 유효성은 동일하지 않다. 이제마의 사상체질의학은 이 맥락에서 특히 흥미롭다.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흘러오던 전통의학의 흐름에서 갑작스럽게 체질 분류 체계가 등장한다. 19세기 유럽에서도 골상학을 비롯한 다양한 체질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제마의 발상이 완전히 고립된 천재성의 산물이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럽의 체질론들이 도태된 반면 사상체질의학이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 경험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찰과 분류만으로는 의학이 되지 않는다. 그 분류가 실제 치료 결과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임상 언어가 된다.


한의학의 역사를 읽는 것은 지식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온 의서들이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고, 조선의 인삼이 일본으로 넘어가 새로운 산업을 낳고, 서양의 해부학이 동아시아의 기 개념으로 재해석된다. 지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송나라는 황제내경 영추 완본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요청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 텍스트는 고려가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의학은 여전히 과학의학과 마찰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다. 그 경계를 둘러싼 논쟁,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앎이 공인된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더 오래된 질문의 반복이다. 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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