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적 오답 연구 ㅣ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1
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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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라 믿어왔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광기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우상향의 그래프 말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연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치부했던 수많은 결정이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오답의 기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형벌과 통제의 역사는 인간이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서늘한 지표다.

고대 로마의 포에나 쿨레이(자루 형벌)는 죄인을 죽이는 행위만이 아니었다. 존속 살해라는 금기를 깬 자에게 내려진 이 형벌은, 죄인을 ‘인간의 영역’에서 완전히 삭제하려는 시도였다. 수탉, 개, 독사, 원숭이와 함께 자루에 갇혀 물속으로 던져지는 과정은 시각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그를 짐승의 반열로 떨어뜨리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단순한 참수나 교수형으로는 부족했을까? 로마인들에게 그것은 ‘너무 자비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얼굴을 짐승 가죽으로 가리고, 땅을 밟지 못하게 나무 신발을 신기는 절차는 “너는 이제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실 자격도, 우리와 같은 땅을 밟을 권리도 없다”는 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잔혹한 절차가 집행관과 관중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심리적 장치’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복잡한 의식은 살인을 ‘정의로운 절차’로 변모시킨다. 사람들은 자루 안에서 벌어지는 비명 섞인 아비규환을 보며, 자신이 저 괴물과는 다른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임을 재확인하며 안도했다. 폭력은 의식의 옷을 입는 순간, 구경거리가 되고 정당한 대가가 된다.

잔혹함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가장 지독한 폭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중세의 우블리엣(Oubliette)은 그 이름처럼 죄인을 ‘잊어버리는’ 곳이었다. 빛도, 소리도, 대화도 없는 수직 구멍 속에 던져진 인간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에 의해 무너진다. 이것은 정치적 숙청의 정점이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면 그는 영웅이나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우블리엣에 갇혀 서서히 잊히면 그는 그저 ‘사라진 존재’가 된다. 이야기가 사라진 죽음에는 어떠한 힘도 남지 않는다. 현대의 블랙돌핀 교도소는 이 격리와 통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눈을 가린 채 굴욕적인 자세로 이동해야 하는 규칙들은 수감자가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 탈출을 꿈꿀 여지조차 박멸한다. 여기서 감옥은 죄인을 교화하는 장소가 아니라, ‘위험이라는 변수를 관리하는 정교한 기계’로 작동한다. 인간을 다루는 제도가 아니라, 고장 난 부품을 영구히 격리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형벌은 다시 한번 기묘한 진화를 거친다. 엘살바도르의 CECOT(테러범 수용 센터)는 감옥이 어떻게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삭발한 채 쇠사슬에 묶여 이동하는 수천 명의 갱단원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국가는 이 영상을 통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증명하고,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려온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제 형벌은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법 집행을 넘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쇼’가 된다. 카메라 렌즈가 비추는 화려한 통제 뒤편에서, 인권과 적법 절차라는 가치는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조용히 묻힌다. 대중이 이 잔혹한 스펙터클에 열광할수록, 국가의 폭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의로 둔갑한다.

우리가 역사를 되짚으며 마주하는 이 기묘하고 잔인한 장면들은, 결코 미개한 옛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의 자루 형벌에서 엘살바도르의 메가 감옥까지, 관통하는 본질은 같다. 인간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을 만들고, ‘상징’을 부여하며, ‘적’을 비인간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답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완벽해 보이는 국가 시스템이나 천재적인 설계자들조차 사소한 오만과 착각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 착오를 일으키고, 잔혹함을 정의로 착각하며, 때로는 닭의 체온에 핵무기의 운명을 맡기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역사를 뒤집어 보는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상식’이라 믿고 있는 것들 역시 훗날 누군가에게는 ‘기괴한 오답’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허함의 과정이다. 실수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가져야 할 시선은 비관이 아닌, 이 불완전함을 딛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덜 잔인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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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세계사의 미스터리
기묘한 밤 지음 / 믹스커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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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이야기'를 배우는 일처럼 느껴졌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영웅과 악인이 배치되고, 교훈이 정해진 서사. 교과서 속 역사는 늘 그런 형태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읽을 때마다 어딘가 무기력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결말을 이미 아는 소설을 펼치는 느낌. 호기심보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독서다. 책은 그 무기력함에 조용히 금을 냈다. 책은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를 모아 놓은 책에 가깝다. 기록은 분명히 남아 있지만, 그 기록이 가리키는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사건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물음표였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 처음 나를 붙잡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군에 실제로 병사로 등록된 곰 '보이텍'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귀엽고 엉뚱한 에피소드처럼 읽혔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웃음이 서서히 걷힌다. 병사들은 그 곰을 단순히 키운 것이 아니었다. 포탄을 나르는 훈련을 시켰고, 계급을 부여했으며, 실제 전투 현장에서 함께 움직였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녹아내렸는지를 이 이야기는 조용히 보여준다. 나는 보이텍에 관한 문장을 읽으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략과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 공포 속에서도 유대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방식, 그리고 그 유대가 얼마나 예상치 못한 형태를 띨 수 있는지. 이 이야기는 실화다. 이것이 핵심이다. 단순히 '특이한 사실'이 아니라, 실제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장면이라는 점이 나를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때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책은 우리나라 이야기도 빗겨가지 않는다. 홍길동.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소설 속 인물로만 알았다. 적서 차별에 맞선 영웅, 허균이 창조한 상상의 존재.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실제로 그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 시절, 강도 홍길동을 체포했다는 기록이 냉정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체포된 뒤 홍길동에 관한 공식 기록은 완전히 끊긴다. 처형 기록도 없고, 유배 기록도 없다. 그저 사라진다. 그리고 책은 한 가지 가설을 던진다. 일본 오키나와에 실존했던 '홍가와리'라는 인물과 같은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이상 사회를 세운 조선의 도적. 이 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자체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역사에서 공백은 단순히 정보의 부재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일 수도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진실의 잔상일 수도 있다. 홍길동의 사라짐은 그 공백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


책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이야기는 모세의 기적에 관한 것이었다. 히브리어 성경에 등장하는 '얌 수프'라는 단어, 오랫동안 '홍해(Red Sea)'로 번역되어 온 그 단어가 사실은 '갈대 바다(Reed Sea)'를 뜻한다는 가설. 번역의 오류가 수천 년간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를 넘어 깊은 질문을 던진다. 탐험가는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의 벽화에서 실마리를 찾아냈고, 결국 나일강 삼각주의 만잘라호를 추적해냈다. 사방이 갈대로 뒤덮인 그 거대한 호수. 그리고 대기과학자는 '윈드 셋 다운'이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그 바다가 실제로 갈라질 수 있음을 수치로 보여주었다. 신의 권능으로 알려진 그 장면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그 사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일까? 극도의 두려움과 절박함 속에서 바람이 불어 물이 갈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과 믿음, 과학과 신화가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그 지점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트로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문학으로 분류되었다. 신들과 영웅들이 뒤엉킨 상상의 서사시. 그런데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 이야기를 실제 지도 위에서 찾아냈다. 발굴된 고대 도시 트로이는 신화가 역사와 접촉하는 순간을 증명해 보였다. 이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은 경계의 흔들림이다. 신화와 역사, 전설과 사실, 상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 우리가 당연하게 그어놓은 그 선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흐릿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 흔들림이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는 것, 세계는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책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스터리가 이야기를 넘어 현실과 맞닿을 때, 그것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나는 이 문장을 책을 다 읽은 뒤에야 제대로 이해했다. 역사 속 미스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다. 홍길동의 공백, 모세의 바람, 보이텍의 포탄, 발굴된 트로이. 이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좁은 창문으로 역사를 보고 있었는지를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지식을 채워주지 않는다. 대신 물음을 남긴다. 그리고 그 물음들은 책을 덮은 뒤에도 계속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 목소리를 오래 들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답이 없는 질문이 때로는 답이 있는 지식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가르쳐준다. 역사는 기록되지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역사는 여전히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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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지음 / 골든래빗(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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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막연한 설렘과 동시에 막막함이 공존했다.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정작 무엇을 쓰면 좋을지,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읽어줄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게 과연 돈이 될 수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막막함이 결국 많은 사람들을 세 달도 채 안 되어 블로그를 방치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정소희 작가의 책 <돈이 되네? 수익과 성장이 동시에 터지는 네이버 블로그>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사람은 진짜 해봤구나"였다. 13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누적 방문자 1800만이라는 기록도, 세 번의 저품질을 겪고도 다시 일어선 경험도, 모두 책상 앞에서 이론으로 쌓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글을 쓰고, 실패하고, 다시 써내려간 시간들의 결과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이 없다. 당장 내일부터 월 수백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식의 달콤한 유혹 대신, 지금 어디에 서 있든 출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지도를 펼쳐 보여준다.

블로그를 단순히 일기장이나 취미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인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블로그는 한 번 써두면 검색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불러들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쌓이는 자산이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처럼 올라가자마자 알고리즘의 파도를 타고 폭발적으로 퍼지다가 이내 묻혀버리는 콘텐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잘 쓴 블로그 글 하나는 2년 후에도, 3년 후에도 검색창을 통해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블로그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라진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키워드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많은 블로거들이 키워드를 단순히 검색량 많은 단어를 고르는 문제로 접근한다. 하지만 저자는 키워드를 군집으로 이해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라는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식단, 멘탈 관리, 홈트 루틴, 워킹맘 다이어트처럼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소재들을 함께 설계할 때, 블로그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묶인 전문적인 공간으로 네이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단발성 글이 아니라 연재처럼 서로 연결된 콘텐츠 구조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상위 노출이라는 결과가 따라온다. 이 개념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날그날 쓰고 싶은 것을 쓰고, 그 글들이 서로 아무런 연결 없이 흩어진 채로 쌓인다.

저자가 제안하는 블로그 구조도 흥미롭다. 블로그를 베이스캠프로 두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확장하라는 전략은 지금 SNS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운영 중인 사람에게도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인스타그램은 트렌드를 빠르게 퍼뜨리는 곳이고, 유튜브는 깊이 있는 이야기로 신뢰를 쌓는 공간이지만, 두 채널 모두 알고리즘의 변화나 플랫폼의 정책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반면 블로그에 쌓인 글은 검색이라는 행위가 존재하는 한 살아남는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나면, 블로그를 중심축으로 삼는 전략이 왜 합리적인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된다. 수익화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애드포스트, 체험단, 원고료, 제휴마케팅, 전자책, 커뮤니티 운영에 이르기까지 블로그 하나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수익 루트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사실은 읽는 사람에게 작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하루 방문자가 50명밖에 되지 않아도 체험단에 선정될 수 있다는 내용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특히 현실적인 희망이 된다. 중요한 건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책 전반에 조용히 흐른다.

물론 이 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답안지는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강조하듯, 꾸준함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설계의 문제다. 경쟁자를 스스로 정해두고 선의의 긴장감을 만들고, 목표를 주변에 선언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고, 글 쓰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고정해 앉는 순간 일하는 모드가 되도록 훈련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비로소 꾸준함이 의지가 아닌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는 설명은 막연한 "열심히 해야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건 블로그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빠르게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쓴 것이 아니고, 방문자가 적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쓰는 글 한 편이 1년 후, 2년 후에 누군가의 검색창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 그 글이 조용히 일하면서 수익을 만들고, 신뢰를 쌓고, 기회를 불러들인다는 사실. 블로그는 그런 공간이다.

책이 전하는 핵심은 하나다. 전략적으로 쌓아가는 사람만이 그 과실을 거둔다. 열심히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은 다르고, 잘 쓰는 것과 전략적으로 쓰는 것은 또 다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키워드를 읽는 눈이고, 콘텐츠를 구조화하는 감각이고, 수익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그 모든 것을 이 책은 현실의 언어로 담아냈다.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방향을 잃었거나, 꾸준히 쓰고 있지만 성장이 느껴지지 않거나, 아예 시작조차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분명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금 가진 이야기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을 조금 더 영리하게 만들어줄 지도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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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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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님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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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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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에서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그 다음 날 연인과 수영을 즐기며, 살인의 이유를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인물. 교수님은 그를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상징이라 설명했고, 나는 그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사회에 나온 지 몇 해가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감각과 마주했다. 뫼르소가 낯선 인물이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가 느끼는 피로, 무료함, 그리고 세계가 자신에게 특정한 감정을 요구한다는 그 압박감.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뮈는 서문에서 뫼르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거짓말하기를 거부한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아니 무엇보다도,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일이며, 인간의 마음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일이다."

​학생 때 이 구절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래, 진실을 말하는 용기 있는 인간'이라고 개념적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문장이 가슴을 건드리는 이유는, 내가 매일 그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장님의 아재 개그에 웃고, 전혀 공감되지 않는 회식 자리에서 즐거운 척하며, 실은 대단히 피곤한 금요일 오후에도 '한 주도 수고하셨어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느끼지 않은 것을 느낀 척하는 일.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야말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짓말을 매일 연습하며 살아간다. 뫼르소는 그것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눈물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도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다. 다만 그는 사회가 요청하는 형식의 애도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회에 나온다는 것은 수많은 형식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실망했을 때도 어떤 말로 포장해야 하는지, 분노가 치밀어도 어떤 온도로 말을 낮춰야 하는지. 나는 그것을 사회화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러나 이따금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형식들이 나를 부드럽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를 조금씩 지우고 있는 것인지. 뫼르소의 재판은 그 의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야기다. 법정에서 심판받는 것은 그의 살인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 재판의 핵심은 그가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장례 다음 날 여자를 만났다는 것,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의 형식을 위반한 죄로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 논리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사람이 충분히 슬퍼 보이지 않으면 그 슬픔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충분히 후회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면 그 후회의 진정성을 박탈한다. 형식이 곧 진실이 되는 세계. 뫼르소는 그 세계 안에서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카뮈는 뫼르소를 '가난하고 벌거벗은 인간'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이 표현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무언가를 덮지 않은 인간, 포장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 위에 적절한 포장을 얹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예의이고, 때로는 배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포장이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점점 모르게 된다. 뫼르소는 그 포장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었고, 그 시선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심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인간이었다. 알제의 태양, 바다의 냄새, 마리의 웃음. 그는 그것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때로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어떤 감정을 가감 없이 느꼈던 게 언제인지를 떠올려본다. 기쁠 때 충분히 기뻐했는지, 슬플 때 스스로의 슬픔을 허락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조금 멈추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신부의 위로를 거부하며 폭발한다.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것이 분노가 아니라 해방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세상이 그에게 씌우려 한 의미들을 거부한다. 신의 은총도, 회개의 서사도, 죽음 앞에서의 극적인 각성도.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이렇게 느낀다. 밤 냄새와 흙 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식혀주고,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온다고. 그것은 패배의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장면이다. 대학 때 나는 그 장면을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눈부시다. 형식을 걷어낸 자리에 남은 것, 냄새와 온도와 감각으로 이루어진 날것의 삶. 그것이 뫼르소가 끝끝내 놓지 않은 것이었다.

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님을 알았다. 뫼르소처럼 모든 형식을 거부하며 살 수는 없고, 어쩌면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느껴야 한다고 배운 것만을 느끼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이,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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