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 인류학적 오답 연구
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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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라 믿어왔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광기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우상향의 그래프 말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연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치부했던 수많은 결정이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오답의 기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형벌과 통제의 역사는 인간이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서늘한 지표다.

고대 로마의 포에나 쿨레이(자루 형벌)는 죄인을 죽이는 행위만이 아니었다. 존속 살해라는 금기를 깬 자에게 내려진 이 형벌은, 죄인을 ‘인간의 영역’에서 완전히 삭제하려는 시도였다. 수탉, 개, 독사, 원숭이와 함께 자루에 갇혀 물속으로 던져지는 과정은 시각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그를 짐승의 반열로 떨어뜨리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단순한 참수나 교수형으로는 부족했을까? 로마인들에게 그것은 ‘너무 자비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얼굴을 짐승 가죽으로 가리고, 땅을 밟지 못하게 나무 신발을 신기는 절차는 “너는 이제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실 자격도, 우리와 같은 땅을 밟을 권리도 없다”는 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잔혹한 절차가 집행관과 관중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심리적 장치’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복잡한 의식은 살인을 ‘정의로운 절차’로 변모시킨다. 사람들은 자루 안에서 벌어지는 비명 섞인 아비규환을 보며, 자신이 저 괴물과는 다른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임을 재확인하며 안도했다. 폭력은 의식의 옷을 입는 순간, 구경거리가 되고 정당한 대가가 된다.

잔혹함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가장 지독한 폭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중세의 우블리엣(Oubliette)은 그 이름처럼 죄인을 ‘잊어버리는’ 곳이었다. 빛도, 소리도, 대화도 없는 수직 구멍 속에 던져진 인간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에 의해 무너진다. 이것은 정치적 숙청의 정점이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면 그는 영웅이나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우블리엣에 갇혀 서서히 잊히면 그는 그저 ‘사라진 존재’가 된다. 이야기가 사라진 죽음에는 어떠한 힘도 남지 않는다. 현대의 블랙돌핀 교도소는 이 격리와 통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눈을 가린 채 굴욕적인 자세로 이동해야 하는 규칙들은 수감자가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 탈출을 꿈꿀 여지조차 박멸한다. 여기서 감옥은 죄인을 교화하는 장소가 아니라, ‘위험이라는 변수를 관리하는 정교한 기계’로 작동한다. 인간을 다루는 제도가 아니라, 고장 난 부품을 영구히 격리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형벌은 다시 한번 기묘한 진화를 거친다. 엘살바도르의 CECOT(테러범 수용 센터)는 감옥이 어떻게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삭발한 채 쇠사슬에 묶여 이동하는 수천 명의 갱단원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국가는 이 영상을 통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증명하고,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려온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제 형벌은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법 집행을 넘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쇼’가 된다. 카메라 렌즈가 비추는 화려한 통제 뒤편에서, 인권과 적법 절차라는 가치는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조용히 묻힌다. 대중이 이 잔혹한 스펙터클에 열광할수록, 국가의 폭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의로 둔갑한다.

우리가 역사를 되짚으며 마주하는 이 기묘하고 잔인한 장면들은, 결코 미개한 옛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의 자루 형벌에서 엘살바도르의 메가 감옥까지, 관통하는 본질은 같다. 인간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을 만들고, ‘상징’을 부여하며, ‘적’을 비인간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답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완벽해 보이는 국가 시스템이나 천재적인 설계자들조차 사소한 오만과 착각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 착오를 일으키고, 잔혹함을 정의로 착각하며, 때로는 닭의 체온에 핵무기의 운명을 맡기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역사를 뒤집어 보는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상식’이라 믿고 있는 것들 역시 훗날 누군가에게는 ‘기괴한 오답’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허함의 과정이다. 실수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가져야 할 시선은 비관이 아닌, 이 불완전함을 딛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덜 잔인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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