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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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날은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눌려 있는데, 그게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피로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분명히 느껴지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혀끝까지 왔다가 사라지는 그 감각.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몸 어딘가에 쌓이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안쪽에서 조용히 곪아가지 않을까. 의학 용어로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라는 말이 있다. 감정표현불능증.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말로 꺼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이상 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가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다. 내 감정에 맞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도감이 바로 이 책,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을 읽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아코포 멜리오는 책에서 200개의 감정 단어를 전 세계 언어로부터 길어 올린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처럼 익숙한 언어는 물론, 웨일스어, 미크맥어, 킬리빌라어처럼 쉽게 마주 치지 못할 언어들로부터도. 그 단어들은 각자의 언어 안에서 오랜 시간 숨 쉬어온, 어떤 민족의 경험과 정서가 응축된 결 정체들이다. 번역하면 흐릿해지고, 옮기면 질감을 잃는 그런 단어들. 그러나 뜻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감정 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름을 몰랐을 뿐이라고.

노르웨이어에는 '포렐스케트(Forelsket)라는 단어가 있다. 사랑에 막 빠졌을 때 느끼는 어쩔 줄 모르는 설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몽롱함, 온몸을 감싸는 두근거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의 'falling in love'나 한국어의 '사랑에 빠지다'로 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그 감정의 질감 자체를 꼭 쥐고 있는 단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그 상태에, 이름이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말문이 막히는 순간을 스코트어로는 '타르틀(Tartle)'이라 부른다. 아, 분명히 아는 사람인 데. 분명히 여러 번 만났는데.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그 당혹스럽고 민망한 찰나를 딱 한 단어로 표현해버리다니. 단어를 알고 나면 그 상황이 조금은 덜 창피해진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 모두가 공 유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언어는 현실을 기술만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감정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감정은 실체를 갖게 된다. 막연하게 떠돌던 것이 하나의 형태로 굳어지고, 비로소 내가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이름이 없었을 때 우리는 그 감정 안에 갇혀 있었다. 이름을 얻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 다. 책의 가장 조용하고도 강렬한 선물이다.

하와이어 '아키히(Akihi)는 길 안내를 받고 나서 곧바로 잊어버리는 그 어이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감사 인사까지 넉넉하게 건넨 뒤 출발했는데, 다섯 걸음도 채 안 가서 오른쪽인지 왼쪽인지가 사라진다.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 당혹스러운 경험에 하와이어 사용자들이 이미 이름을 붙여두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된다. 나 혼자만 이러 는 게 아니구나. 인류가 공유하는 실수가 있구나. 반투어의 '우분투(Ubuntu)'는 '타인을 향한 인간성에 의해 스스로 정의 된다는 믿음'이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이기도 하다는 철학.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이 단어는, 개인의 성취와 효율을 지상과제로 삼는 시대에 놀랍도록 낯선 울림을 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그리움을 불 러일으킨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혹은 아직 다 잃지는 않은 무언가에 대해, 벨라루스어 '탈라카(Talaka)'는 아무런 대가 없이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는 문화를 뜻한다. 보상은 딱 하나, 일을 마치고 나누는 따뜻한 식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계약서 없이도 성립되는 이 연대의 언어가 낯설면서도 아프도록 아름답다.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이런 단어를 일상 속에서 쓰는 사람들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이 책을 읽으며 그 문장이 새삼 몸으로 느 껴졌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은 그 동안 내 세계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거나, 이름 없이 떠돌았을 뿐. 감정에 이름이 생기면 달라진다. 설명하지 못해 혼자 삭혔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게 된다. '나 지금 타르틀 상태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대는 웃으며 그 민망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요즘 좀 이루수가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설명 없이도 나의 상태가 전달된다. 언어는 그렇게 관계의 다리가 된다. 우리가 가진 언어의 경계를 넓히는 일은, 곧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책은 그 확장의 여정으로 독자를 조용히 초대한다. 억지로 끌어당기 지 않는다. 그저 단어 하나를 건네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찾아내도록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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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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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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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정책 결정은 수많은 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다. 월급 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자녀의 돌봄과 교육 조건, 노후의 생계까지, 이 모든 것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정책 결정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결정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책은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시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실패하면 '시대적 한계'나 '개인의 불운'으로 귀결되곤 한다.


정책의 첫 번째 실패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저출산 정책의 역사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박정희 정부가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83년 합계출산율은 2.06명까지 낮아졌다. 이 수치는 인구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대체 수준인 2.1명을 이미 밑돌고 있었다. 경고등이 켜진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반은 이를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지 못했고, 관성적인 산아 제한 정책은 무려 13년 뒤인 1996년에야 공식 폐기되었다. 정책은 '타이밍'이다. 구조적 문제는 현상으로 고착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비용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시기를 놓치면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도 성과는 더디고 불확실하다. 202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5명까지 추락했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저출산의 덫'은 그 결정적 타이밍을 놓친 대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행동을 미루는 관성이 정책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이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정치적 의지의 부재이기도 하다.


문제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빗나간다. 저출산 대책에서 역대 정부가 주로 선택한 방식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는 논리 아래 현금 지원과 출산 장려금, 바우처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산이란 단기적 보상으로 유도할 수 있는 소비 행위가 아니다. 청년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는 주거 불안, 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사교육 경쟁,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현금을 주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발상은 문제의 본질과 처방을 동시에 그르친 것이다. 이는 비단 저출산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책 전반에 만연한 '단기 성과주의'는 구조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표면적 증상만 다루는 처방을 낳는다. 각종 위원회와 기본계획이 쏟아지지만, 이념과 정권을 초월한 일관성이 요구되는 중장기 과제는 번번이 정권 교체와 함께 폐기되거나 후순위로 밀린다. 5년 단임제라는 제도적 한계는 대통령으로 하여금 집권 초반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는 유인을 강하게 만들고, 이는 필연적으로 근본 처방보다 단기 대증요법을 선호하는 정책 문화를 고착시킨다.


정책 실패의 또 다른 핵심 원인은 결정 구조의 폐쇄성이다. 대한민국의 정책은 대통령 비서실, 경제 관료, 소수 정치 엘리트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대통령 비서실은 공식적으로는 '보좌 기관'이지만 현실에서는 국정의 실질적 컨트롤 타워로 기능한다. '비서실장이 훨씬 더 많은 일을 접한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발언처럼, 주요 정책 결정은 선출된 내각이 아니라 비선출 참모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당 역시 정책의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국의 정당은 '정책 비전보다 유력 대선 주자나 계파 수장을 중심으로 결집하며 선거철에만 활성화되는' 가변적 속성을 갖는다. 정책은 정당이 아닌 후보 개인의 캠프에서 급조되고, 집권 후에는 관료 조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반복된다. '한국 민주주의에서 정책 정당은 밤하늘의 북극성과 같다'는 어느 학자의 비유처럼, 정책 중심의 정당 경쟁은 지향점이지만 현실과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다. 결정 과정이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이 불분명해지는 구조는 더 나은 정책을 향한 학습과 환류를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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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방향이 올바르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정치적 의지가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출산율 하락을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규정하고 삶의 조건 개선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은 분명 진일보한 변화였다. 그러나 선언에 상응하는 실행의 속도와 강도는 미약했다. 장시간 노동 개혁은 기업의 반발을, 주거 문제 해결은 막대한 정치적 비용을, 교육 경쟁 완화는 기득권의 저항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는 번번이 이 문턱 앞에서 멈춰 섰다. 이익 집단의 압력도 정책의 발목을 잡는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정규직 중심의 이익 대변에 머물러 플랫폼·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하고, 언론은 건설 광고 수익과 부동산 플랫폼 운영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공정한 비판 기능을 상실하기 쉽다. 금융실명제의 사례가 보여주듯, 진정한 개혁은 언제나 기득권의 보호막을 걷어내는 '권력 해체'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거센 저항을 수반하며, 그 저항을 버텨낼 정치적 동력이 없으면 개혁은 미완으로 끝난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책의 당사자인 시민이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사실 역시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선거철에 정책 공약이 쏟아지지만, 그 정책이 어떤 경로로 탄생하고 누가 결정하는지 시민들은 알기 어렵다. 관료 조직의 관성, 재정 당국의 판단, 이익 집단의 압력, 언론의 프레임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과정에서 시민은 점점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정책이 가치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누구의 삶을 우선 보호하고 누구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치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서, 시민의 배제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시민은 위기의 순간마다 역사를 바꾸는 주체로 등장해왔다.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2016~2017년 촛불혁명, 그리고 2024~2025년의 '빛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시민은 어긋난 역사를 바로잡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권 행사는 주로 위기의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일상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은 여전히 빈약하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일상의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는 한, 정책 실패의 순환은 끊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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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단일하지 않다. 문제를 제때 인식하지 못하는 타이밍의 실패, 증상만 다루고 구조를 외면하는 진단의 오류, 소수 엘리트에 집중된 폐쇄적 결정 구조, 기득권의 저항 앞에서 무너지는 정치적 의지의 부재, 그리고 시민의 배제라는 민주주의의 결함, 이 모든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정책 실패를 재생산한다. 더 나아가 이 실패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민이 배제되면 진단이 편향되고, 진단이 편향되면 처방이 잘못되며, 처방이 잘못되면 정치적 동력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질문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이 사회에서는 아이를 낳는 순간 삶이 위태로워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올바른 질문만이 표면적 처방에서 벗어나 구조적 해법으로 나아가게 한다. 동시에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시민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혁신이 절실하다. 숙의민주주의, 공론화 위원회, 시민의회 같은 참여 메커니즘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시민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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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의 뇌과학
김대영 지음 / 다산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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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러닝화를 산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신발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말이다. 처음 달리기를 결심했을 때, 나는 꽤 진지했다. 러닝 앱을 설치하고, 새벽 알람을 맞추고, 스트레칭 루틴까지 유튜브로 찾아봤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알람은 꺼졌고, 앱은 실행 기록 없이 아이콘만 남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자기혐오가 찾아왔다. ‘또 작심 삼일이야.’ ‘나는 원래 끈기가 없어. ’의지박약.‘ 그 단어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붙여온 꼬리표였다. 책은 첫 페이지부터 그 꼬리표를 조용히 떼어낸다. 나의 뇌는 너무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생존과 에너지 보존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저항한 뇌가, 오히려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수년간 '나의 문제'라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200만 년의 진화가 빚어낸 뇌의 정상적인 방어 반응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잘못된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숫자가 달리기를 망쳤다 돌이켜보면,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게 아니라 경쟁을 시작했었다. 킬로미터를 재고, 페이스를 확인하고, 어제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스마트워치의 숫자가 목표치에 미치지 못하는 날이면 그날의 달리기 전체가 실패처럼 느껴졌다.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속도를 높였다. 숨이 차도 걷지 않으려 했다. 걷는 것은 지는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뇌는 그 경쟁을 위협으로 읽는다. 비교의 눈길이 늘어날수록, 뇌 안의 스트레스 회로는 활성화되고, 달리기는 기쁨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의무는 피로하다. 피로한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한 달을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뇌가 달리기를 고통과 연결지어 기억하도록 내가 직접 훈련시켜온 셈이었다. 숫자는 목표를 명확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록이 단축되지 않는 날, 뇌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동기를 잃는다. 반면 달리는 동안 느끼는 바람의 온도,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 호흡이 차츰 안정되는 리듬을 기록으로 삼는다 면, 보상의 기준 자체가 달라진다. 기록이 아니라 감각이 기준이 될 때, 뇌는 비로소 달리기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다.

달리기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트랙 위도, 오르막 구간도 아니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기까지의 그 짧고도 긴 시간이다. 온종일 뇌를 쥐어짜고 난 저녁,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이미 방전 상태다. 그 틈을 타 생존 본능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전면에 나선다. 편도체는 달리기를 에너지 낭비로 판단하고, 소파의 포근함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다. 이 상태에서 '오늘도 달려야 한다'는 이성의 설득은 처음부터 질 수밖 에 없는 싸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뇌를 이기려 하지 말고, 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속이면 된다. 딱 5 분만, 집 앞까지만, 걷다가 오면 그만이라고. 뇌에게 위협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압박이 없으면 저항도 줄어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일단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뇌는 스스로 달릴 이유를 만들어낸다. 의욕은 시작 전에 오는 게 아니 라, 시작하고 난 뒤에 뒤따라온다. 행동이 선행되면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고, 달리기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로 재등록 되기 시작하는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이다. 5분의 작은 승리가 매일 밤 도파민으로 쌓일 때, 그 미세한 보상들이 습관의 토대가 된다.

달리기를 지속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로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 전환점이 바로 러너스 하이다. 장시간 달리기로 고통이 한계에 달할 즈음, 뇌는 아난다마이드라는 물질을 분비한다. 이것은 뇌의 보상 전략이다. 고통을 견디고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류가 수 십만 년간 생존해 온 메커니즘이 지금 이 시대의 공원 트랙 위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한 사람의 뇌 안에서는 질문이 바뀐다. '오늘 꼭 달려야 해?'가 사라지고, '언제 또 달릴 수 있을까?'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뇌의 보상 시스템이 재구성된 것이다. 달리기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보상의 기억으로 저장될 때, 습관은 노력 없이 자동으로 반복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운동의 효과를 몸무게나 체형으로 측정한다. 오늘 달렸더니 몇 칼로리가 소모됐는지, 한 달 뒤에 살이 빠졌는지. 그러나 이 책이 제안하는 달리기의 의미는 훨씬 긴 시간축 위에 놓여 있다.

운동화 끈을 묶는 순간, 우리는 오늘의 건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20년 뒤의 기억력을, 집중력을,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설계하는 것이다. 달리기는 뇌에 새로운 신경 연결을 만들고, 인지 기능의 노화 속도를 늦추며, 우울과 불안에 저항하는 천연 항우울제를 매일 공급한다. 인류 조상들에게 달리기가 지형을 기억하고, 먹잇감을 예측하고, 무리와 소통하는 고도의 생존 활동이었듯, 우리의 유전자에는 달릴 때 뇌가 성장하도록 새겨진 본능이 살아있다. 그러니 달리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도 된다. 뇌는 그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환경을 설계하는 지혜다. 비교를 멈추고, 감각을 기록하고, 5분의 작은 시작을 이어가는 것. 그 조용하고 작은 리듬 안에서, 진짜 체력과 진짜 뇌가 함께 만들어진다. 달리기는 더 이상 포기의 역사를 반복하는 과제가 아니다. 뇌와의 다정한 밀당이자, 미래의 나를 향한 가장 조용하고 꾸준한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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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지 않는 뇌 -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이들을 위한 뇌과학자의 처방전
스가와라 미치히토 지음, 김동희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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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도 나는 미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고, 딱 10분만 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 10분은 40 분이 되었고, 어느새 오전이 증발해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지만 손가락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자책이 시작되는 건 언제나 그 순간이다. 의지가 약한 것인지, 게으른 것인지, 아니면 그냥 태생적으로 이런 사람인 것인지. 스스로를 탓하는 목소리 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 나는 우연히 하나의 문장을 마주쳤다. "뇌는 원래 게으름뱅이다." 뇌신경외과 전문의 스가와 라미치히토의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수십 년 동안 붙여온 낙인을 조용히 떼어냈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살아왔다. '미루는 것'은 나쁜 습관이고, 그 습관의 원인은 나약한 의지에 있다고. 그래서 더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고, 더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그런데 뇌과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뇌는 체중의 고작 2%에 불과하면서도, 전체 에너지의 20%를 소비한다. 에너지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뇌는 몸에서 가장 '비싼' 기관인 셈이다. 그러니 뇌가 에너지를 아끼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생존 전략이다. 뇌는 새로운 자극 을 경계하고, 변화를 회피하며, 되도록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뇌에게는 일종의 기본 설정 (default)인 것이다.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게을렀던 게 아니었다. 내 뇌가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것이 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미뤄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출발점이 달라진다. 자책에 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서 시작하게 된다. 나를 탓하기를 멈추는 순간, 비로소 나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게으름을 선택하는 뇌를, 어떻게 행동하게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의욕이 생기면 행동할 수 있다고. 그래서 오늘도 '기분이 날 때', '준비가 되면, 딱 맞는 타이밍이 오면' 시작하겠다며 기다린다. 하지만 그 타이밍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파민은 행동하기 전에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시작한 이후에 분비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작업 흥분(Zeigarnik Effect 의 응용 개념)'이라고 부른다. 일단 무언가를 시작하면 뇌의 측좌핵 (nucleus accumbens)이 자극을 받아 도파민이 분비되고, 그 도파민이 다시 행동을 추진하는 연료가 된다. 즉 의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처음 접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딱 한 줄만 써보겠다고 시작했다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겨 있던 날들. 운동하기 싫어서 신발 끈만 묶어보자며 나갔 다가, 결국 30분을 뛰고 들어온 날들. 그 모든 경험들이 사실 뇌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느끼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움직이면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미루지 않는 뇌로 가는 첫 번째 문이다. 문제는, 알면서도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계획이 완벽하게 세워져야, 환경이 딱 갖춰져야, 실력이 충분히 쌓여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실패라는 결과를 원천 차단하려 했던 것이 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고 기회는 사라지며 자신감은 오히려 더 낮아진다. 스가와라는 말한다. 50점짜리로 일단 시작하라." 베타 버전을 세상에 먼저 내놓고, 반응을 보면서 수정해 나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을 만들려고 하면 영원히 시작할 수 없지만, 불완전한 것을 내놓으면 적어도 전진은 할 수 있다. 뇌의 작동 방식에 근거한 전략이다. 뇌는 완성되지 않은 과제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일단 시작하면 뇌 스 스로가 그 과제를 완성하려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시작 자체가 완성을 향한 뇌의 스위치를 켜는 행위인 것이다. 미루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작한 것을 계속하는 일이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에 빠르게 흥 분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익숙해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순화(habituation) 즉 반복되는 자극에 무뎌지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설레고 재밌던 일이 어느 순간 당연해지고, 지루해지고, 결국 손을 놓게 된다. 삼일 천하, 작심삼일. 우리가 그토록 자주 경험하는 그 패턴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비결은 작은 성공 체험의 축적이다. 도파민은 거창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만 분비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미션을 완수했을 때,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는 것을 느꼈을 때도 분비된다. 그리고 그 작은 도파민들이 쌓여, 다음 행동을 위한 연료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보여주는 것의 힘이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은 행동의 일관성을 만들어낸다. 마라톤 대회에 등록해두면 포기하기 어렵고, 독서 모임에 나가기로 약속하면 책을 덮지 못한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가끔 미룬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는 그것이 내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뇌의 생존 본능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본능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더 작은 시작이라는 것도 안다. 5분. 한 줄. 신발 한 짝. 그것으로 충분하다. 도파민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지 않는다. 움직이는 자에게 온다. 완벽한 준비가 끝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라도 첫 발을 내디딘 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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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종료합니다 - 나를 괴롭히는 108번뇌 탈출 필사
필로소피랩 지음 / 각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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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너무 빠르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은 빛의 속도로 달리고, 감정은 미처 이름도 붙이기 전에 다음 감정에 치여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 슬픔인지 불안인지 분노인지, 정체도 모른 채 그저 무겁다는 감각만 남아 하루가 끝나곤 했다.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못한 것 같은 이상한 피로가 몸에 쌓였다. 그 무렵, 나는 펜을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빠르게 타이 핑하는 것 말고, 천천히 손으로 눌러 쓰는 그 행위가 지금의 나에게 필요할 것 같다는 막연한 감각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필사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렸다. 이번에 새로운 필사책을 읽었다. 번뇌를 종료합니다. 책의 제목이 좋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오류를 108가지로 분류한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 108가지나? 괴로움이 그렇게 세세하게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이름 없는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댄다.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마음, 분명히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치고 올라오는 묵은 분노,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무기력함. 이런 것들은 이름 없이 떠다닐 때 더 크고 무섭게 느껴진다. 마치 어 두운 방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더 두려운 것처럼. 그런데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아, 이게 그거구나.“ 그 짧은 알아차림 하나로 감정의 밀도가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집어삼킬 것 같던 파도가 그냥 파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이 생긴 것은 다룰 수 있는 것 이 된다. 번뇌가 번뇌인 줄 알면,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눈으로 읽을 때와 손으로 쓸 때는 속도가 다르다. 그리고 속도가 다르면 생각의 깊이도 달라진다. 읽을 때는 문장이 눈앞 에서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 줄로 넘어가고, 어느새 페이지가 넘어가 있다.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했는 데, 한 시간 뒤에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희미해진다. 빠름은 많은 것을 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흘려보내는 방식 이기도 하다. 그런데 손으로 옮겨 적을 때는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머무는 시간이 생긴다. 그 느린 속도 안에서 문장 이 눈에서 손으로, 손에서 다시 마음으로 들어온다. 머릿속의 엉킨 실들이 천천히 풀리는 느낌. 급하게 매듭을 당기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놔두었을 때 스스로 풀리는 것처럼. 필사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바깥이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안이 조용해진다. 말이 없어도, 설명이 없어도, 손이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머릿속의 소음이 잦아든다. 그것이 필 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필사를 해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어떤 밤은 잠이 오지 않고, 여전히 타인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흔들릴 때가 있다.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으려 해도 어느 순간 또 신경이 쓰이고,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안다. 얼음이 녹는 것은 한 순간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온도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그 변화가 쌓이면서, 어느 날 보면 물이 되어 있는 것이 다. 번뇌도 그렇다. 오늘 한 줄을 쓴다고 해서 내일 당장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한 줄이, 그다음 날의 한 줄과 겹쳐지 고, 또 그다음 날의 한 줄과 이어지면서, 아주 천천히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번뇌를 없애려 하기보다, 번뇌를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더 깊은 자유의 방향일지 모른다.

거창한 각오는 필요 없다. 오늘 하루가 유독 무거웠다면, 책을 펼치고 한 줄만 따라 써본다. 왜 쓰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도 괜찮다. 느낌이 없어도 괜찮다. 그냥 손을 움직이는 것, 그 작은 행위 안에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 모든 깨달음은 어쩌면 이렇게 소박하게 온다. 대단한 수행이나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 잠시 멈추고 손으로 한 문장을 써내려 가는 그 순간 안에서. 번뇌는 종료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것과 더 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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