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종료합니다 - 나를 괴롭히는 108번뇌 탈출 필사
필로소피랩 지음 / 각주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너무 빠르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은 빛의 속도로 달리고, 감정은 미처 이름도 붙이기 전에 다음 감정에 치여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 슬픔인지 불안인지 분노인지, 정체도 모른 채 그저 무겁다는 감각만 남아 하루가 끝나곤 했다.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못한 것 같은 이상한 피로가 몸에 쌓였다. 그 무렵, 나는 펜을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빠르게 타이 핑하는 것 말고, 천천히 손으로 눌러 쓰는 그 행위가 지금의 나에게 필요할 것 같다는 막연한 감각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필사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렸다. 이번에 새로운 필사책을 읽었다. 번뇌를 종료합니다. 책의 제목이 좋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오류를 108가지로 분류한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 108가지나? 괴로움이 그렇게 세세하게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이름 없는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댄다.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마음, 분명히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치고 올라오는 묵은 분노,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무기력함. 이런 것들은 이름 없이 떠다닐 때 더 크고 무섭게 느껴진다. 마치 어 두운 방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더 두려운 것처럼. 그런데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아, 이게 그거구나.“ 그 짧은 알아차림 하나로 감정의 밀도가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집어삼킬 것 같던 파도가 그냥 파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이 생긴 것은 다룰 수 있는 것 이 된다. 번뇌가 번뇌인 줄 알면,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눈으로 읽을 때와 손으로 쓸 때는 속도가 다르다. 그리고 속도가 다르면 생각의 깊이도 달라진다. 읽을 때는 문장이 눈앞 에서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 줄로 넘어가고, 어느새 페이지가 넘어가 있다.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했는 데, 한 시간 뒤에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희미해진다. 빠름은 많은 것을 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흘려보내는 방식 이기도 하다. 그런데 손으로 옮겨 적을 때는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머무는 시간이 생긴다. 그 느린 속도 안에서 문장 이 눈에서 손으로, 손에서 다시 마음으로 들어온다. 머릿속의 엉킨 실들이 천천히 풀리는 느낌. 급하게 매듭을 당기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놔두었을 때 스스로 풀리는 것처럼. 필사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바깥이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안이 조용해진다. 말이 없어도, 설명이 없어도, 손이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머릿속의 소음이 잦아든다. 그것이 필 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필사를 해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어떤 밤은 잠이 오지 않고, 여전히 타인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흔들릴 때가 있다.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으려 해도 어느 순간 또 신경이 쓰이고,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안다. 얼음이 녹는 것은 한 순간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온도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그 변화가 쌓이면서, 어느 날 보면 물이 되어 있는 것이 다. 번뇌도 그렇다. 오늘 한 줄을 쓴다고 해서 내일 당장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한 줄이, 그다음 날의 한 줄과 겹쳐지 고, 또 그다음 날의 한 줄과 이어지면서, 아주 천천히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번뇌를 없애려 하기보다, 번뇌를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더 깊은 자유의 방향일지 모른다.

거창한 각오는 필요 없다. 오늘 하루가 유독 무거웠다면, 책을 펼치고 한 줄만 따라 써본다. 왜 쓰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도 괜찮다. 느낌이 없어도 괜찮다. 그냥 손을 움직이는 것, 그 작은 행위 안에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 모든 깨달음은 어쩌면 이렇게 소박하게 온다. 대단한 수행이나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 잠시 멈추고 손으로 한 문장을 써내려 가는 그 순간 안에서. 번뇌는 종료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것과 더 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