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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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나도 내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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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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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 시절 <태백산맥>을 통해 조정래 작가의 문학적 거대함에 감동했던 나에게, 이번에 발표된 신작 <서리꽃>은 마치 겨울날 창문에 맺힌 서리처럼 차갑고도 아름다운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때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운명을 그려내는 그의 필력에 압도당했다면, 지금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개인의 감정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느낌는 감정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웃음이 터져나온 장면은 이재이와 형의 대사였다. "형은 상속권을 마구 포기하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난 인생의 목적을 돈 많이 버는 것으로 세우고 있는 형을 바바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건 영원한 평행선이야." 책 전체를 정의하는 것 같았다. 물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부모님과 형과 달리, 이재이는 자신의 상속권까지 포기하며 윤소인을 돕는다. 그것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날로그 감성의 소유자 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스마트폰 한 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조정래는 그 질문을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재이가 문학이 아닌 철학으로 전공을 바꿀 때, 부모님은 격렬히 반발했다. 경영학이 아닌 철학, 그것은 자본주의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돈 없는 사람을 어찌 사람으로 보겠는가?"라는 부모님의 태도 앞에서, 이재이는 깊은 신을 소리를 물었다. "산도 높고 높은 산이었고, 바다도 깊고 깊은 바다였다. 그 산을 어찌 넘고, 그 바다를 어찌 헤쳐 나아가야 할 것인지 암담하고 가위가 눌렸다." 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생생 히 느꼈다. 개인의 사량과 신념은 얼마나 쉽게 계층과 자산 앞에 무너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이는 자신의 길을 꺽지 않는다. 대학 시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변용해 그린 시화, 그것이 윤소인과 이재이의 인 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은 그녀를 너무나 많이 변화시켰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남겨진 빚더미, 가난으로 인한 내적 피폐함,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질병까지. 이재이가 느낀 "바위가 가슴에 얹히는 듯한 압박 감"은 단순히 개인적 걱정이 아니라, 계층 문제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무참하게 짓누르는가를 보여주는 메타포였다. 저자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운다는 것이다. 이재이가 윤소인의 수술 후 전라남도 장흥으로 함께 떠나는 장면, 술잔을 부딪치며 눈물을 흘리는 네 사람의 모습 등이 모든 것이 설렘과 열정을 넘어선 그윽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SNS에서 "사랑해"를 너무나 쉽게 외치는 시대에, 조정래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희생으로 보여지는 사랑의 본질을 되묻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감 동시킨 것은 작가의 건강 상태였다. 복부대동맥 수술이라는 직업병 속에서 이 촘촘한 구성의 장편소설을 완성했다니. 책을 읽는 내내 한 발 물러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젊을 때는 사랑을 오직 설렘과 행복으로만 생각했 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랑의 의미는 다양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사랑은 때론 희생처럼 느껴지고, 때론 아프지만 아름답고 때론 침묵 속에서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것, 윤소인이 수술 후 회복되면서 겪는 희망과 절망의 진동, 이재이가 형과의 밀약으로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순간들 , 이 모든 것이 내 가슴을 한없이 뜨겁게 만들었다.  

1권에서 본 것은 이재이와 윤소인의 고통의 여정이었다면, 2권에서는 그들이 찾아낸 사랑의 진정한 모습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조정래의 신작은 <태백산맥> 만큼 거대한 역사를 그리지는 않지만, 미시적 개인의 감정 속에서 사랑의 의 미를 발견하게 한다. 그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랐고, 그의 작가정신에 다시한번 놀란다. 책을 읽으며 나도 내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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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시 필사 나는 쓴다 - 시니어를 위한 하루 10분 마음정리 예쁜글씨 교정! ㅣ 나는 쓴다
한용운 지음 / 비타민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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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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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젊었을 때는 이 질문을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고, 해야 할 일들은 늘 넘쳐났으며,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볼 여유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손끝의 감각이 예전 같지 않고, 글씨를 쓰다 보면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단숨에 써 내려가던 문장도 이제는 한 글자 한 글자 신경 써서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이 듦을 몸으로 실감하던 즈음, <나는 쓴다>라는 필사책을 만나게 되었다.


책은 한용운 선생의 시를 직접 따라 쓰도록 구성된 필사책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씨 교정을 위해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흐트러진 글씨체를 다시 바로잡고 싶었고, 무엇보다 손을 움직이는 일이 인지력과 기억력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님의 침묵>부터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사랑하는 까닭>과 같은 시들을 한 줄씩 따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시간이 단순한 글씨 연습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용운 선생은 시인이기 이전에 나라를 빼앗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분이었다. 그의 시에는 사랑과 이별의 정서만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간절함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삶의 고통을 견디는 힘이 함께 담겨 있다. 젊었을 때 이 시들을 읽었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만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이 시들을 한 글자씩 손으로 옮겨 적다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별을 노래하면서도 결국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마음, 상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 이러한 역설이 이제는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삶의 진실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잃어가는 것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이별도 하나둘 늘어가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한용운 선생의 시를 필사하며 깨달은 것은, 잃음이 곧 끝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룻배와 행인>에서 나룻배가 행인을 실어 나르며 비바람을 다 맞아도 다시 행인을 기다리듯이, 삶도 그렇게 견디고 또 기다리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기다림의 의미를, 이제는 손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가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루 10분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순간이 되었다.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시 한 구절을 옮기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눈앞의 문장에 집중하고, 한 획 한 획 정성을 들이는 일만 남는다. 이렇게 집중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예전보다 마음이 훨씬 차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 빨리 해내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오히려 속도를 늦추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용운 선생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자유와 희망을 끝내 놓지 않았던 분이다. 그의 시를 필사하며 나 역시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가는 지금, 잃어버린 것들에 마음 아파하기보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천천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채워가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오늘 써 내려간 한 줄의 시가, 내일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나에게 그런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해 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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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
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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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결혼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당연한 것으로 취급된다. 태어나고,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한다. 이는 마치 자연의 순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 혼인 건수의 증가라는 통계 뒤에는 역설이 숨어 있다. 뉴스를 보니 한동안 외면당했던 결혼 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2025년 혼인 건수는 24만 326건으로 전년대비 8.1퍼센트 증가했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부활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청년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스펙 과 자산으로 자신을 입증하려는 남성들, 외모와 나이로 평가받는 여성들, 로테이션 소개팅에 나서는 청년들의 모습. 그리고 TV와 OTT에 쏟아지는 결혼 예능 프로그램들.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혼이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 인지, 아니면 원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된 것인지 묻게 한다. 결혼은 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것을 선택하는가, 이 질문에 책은 여러 담론을 이야기 한다. 결혼 담론에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동화의 결말이다."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이야기는 결혼이 모든 고통의 종점이며, 거기서부터 영원한 행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OTT 예능에서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은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연출된다. 그것이 모든 갈등의 해결, 모든 기다림의 결말인 양... 그러나 실제로 청년들이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훨씬 현실적이고, 때로는 냉철하다 : 결혼은 보험이 다. 사랑의 증명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에 대비한 제도적 장치다. 떨어질 수 있는 연애 감정을 법적 구속으로 들어잠그는 것, 결혼하지 않으면 언제든 상대가 떠날 수 있지만, 결혼하면 법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믿음. 이것이 결혼이 제공하 는 유일한 안정"이다. 사회가 결혼만이 안정을 제공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면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형태의 안정 즉, 공동생활, 법적이지 않은 헌신적 관계, 친구들과의 깊은 연결 등은 "진정한 안정'"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결국 제도가 목적을 만들어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도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혼 시장은 낡은 성 역할이 가장 적극적으로 재생산되는 장소다. 남성에게 결혼은 "가장으로서의 증명"을 의미한다. 스펙, 자산, 직업 등 모든 것이 남성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혼자서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결혼하지 못한 남성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능력이 없는 " 남자가 아닌 존재"로 낙인찍힌다. 산업화 시대에조차 한 남성이 온 가족을 부양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신화는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있다. 한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가장으로서 남성에 대한 요구 는 특히 결혼을 중심으로 여전히 강고하다. 한편 여성들에게 결혼은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나이, 외모, 그리고 "남편보다 낮지 않으면서도 압도하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이라는 모순적인 요구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자율성을 양도한다. 인정하거나 제가 인정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여성이 서른다섯 넘으면 결혼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기준이 자신에게 작용한다. 이것이 제도적 폭력의 본질이다. 인식하면서도 피할 수 없다. 더 심 각한 것은, 결혼이 여성에게 자율성의 포기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것을 용해시킨다. 결혼의 최종 목표는 보통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청년들이 결혼의 필수 요소로 아이를 이야기했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삶의 안정은 오직 핵가족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수한 시 대적, 지역적, 경제적 발명인 핵가족을 동물적 본능의 차원으로 이해하게 하는 이유는 지금 한국에서 핵가족만이 임신- 출산육아, 그리고 이것 너머 생애 전반의 경제적, 관계적 측면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구성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지 기 때문이다. 핵기족은 현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만들어진 상대적으로 최근의 발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생물학적 본능으로 착각한다. 역사와 정치경제를 생물학으로 위장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안정을 원하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가져야 하고,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가 완성된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제도적 필연성이다.  

결혼은 나쁜 제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진정한 지지와 사랑의 관계가 된다. 마지막 독자가 아내와 함께 불안정한 삶을 견디는 것처럼, 결혼이 의미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결혼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착각이다. 현재의 한국 청년들이 결혼으로 수렴하는 것은 들이 결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걸을 보이게 하는 것,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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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진 사람으로 살아라 - 원하는 삶을 현실로 만드는 16강 수업
주느비에브 베런드 지음, 박수민 옮김 / 노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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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단순한 외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신념과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명제이다. 책에서 반복되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정신의 영역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되는 첫 번째 레슨에서, 제자가 "집, 남편, 자녀"를 원한다고 고백할 때, 스승은 물질적 형태를 직접 추구하기 전에 그것의 영적 원형(spiritual prototype)에 먼저 접근할 것을 권고한다. 단순히 집"이 아니라 "보호, 피난, 안전감, 자유"라는 본질적 감정에 먼저 도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을 대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외부의 조건과 환경에 우리 삶이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란드는 오감 의식(5-sense consciousness)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현재의 제한된 상황을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게 되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신적 근원, 창조적 에너지에 연결될 때, 현재의 조건은 더 이상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단순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받는다"는 법칙의 재발견이다. 베련드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받으면 그 다음에 주겠다"는 순서로 생각하는 오류를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적 법칙 자체라고 주 장한다. 마리(Marie)라는 간호사의 이야기는 이 법칙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피로와 불만으로 가득 찼던 마리가 환자의 호출을 "주인(Master)의 부르심"으로 재해석했을 때,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화한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을 어떤 정신 상태에서 수행하는가에 따라 그것이 창조하는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법칙의 역설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이웃을 위하는 마음, 신을 섬기는 마음으 로 행동할 때-역설적으로 우리는 더욱 풍요해진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 상태 자체가 이미 우리를 풍의 근원과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부족함과 결핍의 의식에서 주는 것은 축소이지만, 풍요와 신성함의 의식에서 주는 것은 확장이다 책 곳곳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상상력의 창조적 힘이다. 베런드에 따르면, 상상력은 단순한 꿈꾸기나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 전의 정신적 틀(mental mald)"이다. 우리 가 어떤 것을 강렬하게,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실함의 느낌을 가지고 상상할 때, 우리는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가 그 방향으로 흐르도록 "길을 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기 회로에 플러그를 연결하는 것과 같다. 현재의 제한된 환경이나 가농성의 부족함은 이 창조 과정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적 창조의 원리는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항상 작동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베런드가 이것을 "운"이나 "마법"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명확히 규정한다는 것이다. 전기 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우리가 청소기를 켤 수 있듯이, 우주의 창조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법착에 따라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베란드가 이 책을 정신과학"의 틀 안에서 제시하는 이유이다.  

책이 제시하는 가르침의 중심은 의식의 전환 이다.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긍정적 사고나 자기 암시의 기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본질적:진실을 환기시 키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외부의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느낀다. 시장의 변동, 사회적 압박, 타인의 기대, 과거의 상처-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러나 베런드의 가르침은 이러한 외적 조건들 너대에 여전히 우리의 창조적 자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먼저 우리 내면의 의식이고, 그 변화가 자연스럽게 외부 현실을 재형성한다는 통찰은, 무 력감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권력과 책임을 회복하게 해준다. 책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깊다: 우리가 현재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삶을 사 랑하고 사는 것"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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