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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한때 케이팝을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 숨겨두었던 감정의 서랍을 열고,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것들을 비트와 멜로디에 실어 내보내는 행위. 그래서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내미는 일과 같다. 복길의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평범한 문장이었다. ’노래는 죄가 없잖아요. 그냥 해요.‘ 이 짧은 말 안에 케이팝을 둘러싼 모든 윤리적 딜레마와 감정적 피로가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케이팝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 착취적 계약, 팬덤의 집단 광기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그 사랑에 공모의 혐의를 씌우며. 그러나 ' 노래는 죄가 없다 '는 말은, 음악을 면죄부로 삼자는 도피가 아니라, 감정을 죄로 만들지 말자는 선언에 가깝다. 사랑 자체를 심문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사람을 두 번 무너뜨리는 일이다. 케이팝은 언제나 과잉이다. 감정도, 서사도, 비주얼도. 그 과잉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적당함이 허용하지 않는 감정들을 마음껏 꺼내놓을 수 있다. 슬퍼도 너무 슬프고, 기뻐도 너무 기쁘고, 분노도 너무 격렬한 케이팝의 세계는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포장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구가 된다. 나는 케이팝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허상 안에서만 진짜가 될 수 있 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복길이 말하는 '비장미'는 미학적 취향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형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동방신기의 〈Rising Sun(순수)> 앞에서 느끼는 압도감은, 그 노래가 얼마나 완성도 있는 음악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래가 얼마나 과감하게 불완전한 감정을 무대 위에 올려놓았는가의 문제다. 기도하고, 저주하고, 중얼거리다, 절규하는 노래. 논리적 서사 없이 감정의 연쇄만으로 이루어진 그 노래는, 오히려 그 비논리성 덕분에 삶의 어떤 진실에 닿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도 사실 그렇게 생겼다. 슬픔이 분노로 변하고, 분노가 허탈함으로 가라앉고, 허탈함이 다시 어떤 결의로 굳어지는. 논리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케이팝이 그 엉망진창의 감정 지도를 음악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때, 듣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세상에 이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비장함은 또한 연대의 언어이기도 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봉의 불빛이 아름다운 것은, 그 빛들이 각자의 절망과 슬픔을 숨기면서도 함께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복길의 표현처럼, 빛이 어떤 절망 을 감추고 있는지 말하지 않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장함은 그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형식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워질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비장해지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경건해진다.
케이팝 산업이 만들어낸 폭력의 목록은 너무 길다. 불공정한 계약, 통제되지 않는 팬덤의 집단적 광기, 아이돌을 향한 테러와 살의, 조직적 성범죄 게이트. 그 목록 안에는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지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그 어디에도 완벽히 위치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케이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케이팝의 구조가 만들어낸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된 사람들.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방조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해의 분위기를 묵인한 공범 이기도 하다. 복길이 베이비복스 이야기를 꺼낼 때, 나는 한동안 멈추었다. '꺼져라'라는 연호를 들으며 공연했던 그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담은 택배를 받았던 그들. 그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특정한 몇 명의 악인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제거해도 좋다’ 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었고, 그 분위기를 만든 것은 침묵하거나 외면한 수많은 우리들이었다. 살의는 극단적인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라는 복길의 통찰은 케이팝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케이팝이다. 씨스타의 〈Give It to Me〉가 통속적인 삶의 고뇌를 홀가분하게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아웃사이더의 <외톨이>가 무거운 소외감을 무대 위에 올려 해방감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케이팝은 상처를 주는 동시에 그 상처를 언어화하고 형식화하고 함께 노래하게 만든다. 케이팝을 사랑하여 상처 받고, 그 상처를 또다시 케이팝으로 어루만지는 이 순환이 어쩌면 케이팝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속성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음악으로 시대를 감각하는 내면의 연표가 있다는 복길의 말처럼, 나 역시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시간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음악은 시간을 저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다. 멜로디 하나가 수십 년 전의 냄새와 온도와 감정을 고스란히 불러낸다. 그래서 어떤 케이팝은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된다. 복길 이20년 만에 처음으로 <Rising Sun(순수)>을 들으며 그 공백을 채웠듯,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비워두었던 연표의 칸들을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 거부감으로, 두려움으로, 혹은 그냥 게으름으로 외면해두었던 음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선명 하게 들려오는 순간. 그 순간은 단지 음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시간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케이팝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산업이냐 예술이냐, 윤리적 소비가 가능한가, 팬덤은 문화인가 병리인가. 그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복길이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이것일 테다. 우리의 사랑을 모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케이팝을 듣는다. 제대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 나처럼 제대로 살고 싶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듣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