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분쟁을 막는 상속·증여와 기막힌 절세 비밀
김용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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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무게가 달라지는 때가 찾아온다. 30대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들이, 40대에 접어들면서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흰머리, 자녀의 훌쩍 자란 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재산의 이전'이라는 묵직한 현실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속이나 증여를 일부 자산가들만의 이야기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지금, 평범한 가정의 아파트 한 채가 수억 원을 훌쩍 넘 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상속세와 증여세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산층 가정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진지하게 고 민해야 할 생활 속의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 하면, 낯선 세법 용어와 수시로 바뀌는 제도 앞에서 손을 놓고 싶어진다. 책은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세금과 법률의 세계를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풀어내고, 무엇 보다 가족의 화목을 지키는 것이 목적임을 분명히 하는 책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나침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애들은 다 착해서 절대 싸우지 않을 거야."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믿는다. 그리고 많은 자녀들도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막상 재산 분배 앞에 서면 평생 함께해온 형제자매가 낯선 얼굴이 되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그것이 돈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간 가슴속에 쌓여온 서운함, 불공평함에 대한 기억, 그리고 서로 다른 기대치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상속 분쟁이 무서운 이유는 재산을 잃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법적 다툼으로 번진 가족 갈등은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말 한마디, 문서 하나가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유류분 소송, 상속회복 청구, 기여분 다툼,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했을 때 현실로 튀어나오는 법적 칼날들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그 위험성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치매에 걸린 부모를 홀로 십년 넘게 돌봐온 자녀가 정작 상속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타지에 사는 형제가 뒤늦게 나타나 자신의 법정 몫을 요구하는 경우, 혹은 재혼 가정에서 이복형제 간의 상속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 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미리 아는 것이다. 유언장의 종류와 법적 효력, 유류분 제도의 의미, 상속포기가 자녀 세대에까지 미치는 영향, 그리고 상속재산 분할 협의의 절차, 이 개념들을 사전에 이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다. 나아가 부모 생전에 자녀들과 함께 재산 분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두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법적 장치보다 강력한 분쟁 예방책이 된다.


분쟁 방지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제가 바로 절세다. 같은 재산을 물려줘도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납부해야 할 세금의 규모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달라진다. 이는 불법적인 탈세가 아니라, 세법 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합법적인 전략의 문제다. 상속세와 증여세의 세계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다양한 공제 항목과 특례 제도들이 숨어 있다. 배우자 공제만 해도 최대 30억 원까지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한 부모로부터 일정 금액 이하를 무이자로 차용할 경우 증여세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혼인 시 특별 증여 공제를 활용하면 신혼부부가 합법적으로 상당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특히 부동산과 관련된 절세 전략은 더욱 정교한 이해를 요구한다. 배우자 증여 공제를 활용한 양도세 절감 방법, 상속 후 일정 기간 내에 매도했을 때 적용되는 세제 혜택, 자경 농지나 가업 상속에 붙는 대규모 공제 제도 등은 그 내용을 모르고 지나치면 수억 원을 그냥 국가에 납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절세 전략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요건과 기한이 따른다. 세법은 허점을 막기 위한 다양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간과한 채 섣불리 움직였다가 오히려 더 큰 세금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증여 후 일정 기간 이내 매도 시 적 용되는 이월과세 규정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절세란, 세금을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세법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 하고 그 안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상속과 증여를 단순히 세금 문제로만 바라보면, 그 본질적인 의미를 놓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은 결국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일군 것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이 가족 간의 상처와 법적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또한 부모의 유산이 형제자매 사이를 갈라놓는 쐐기가 되기를 바라는 자녀 도 없다. 그러나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준비 없는 사랑은 때로 예상치 못한 갈등의 씨앗이 된다. 부모님 사망 후 한 달 이내, 세 달 이내, 여섯 달 이내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행정적 절차들을 모르고 기한을 놓치는 순간, 가산세라는 뜻하지 않은 부담이 더해진다. 감정적으로도 가장 힘든 시기에 법적•행정적 절차까지 혼란스러워지면, 가족 모두가 소진 되고 만다. 반대로, 미리 충분히 준비한 가족은 다르다. 유언장을 올바른 방식으로 작성해두고, 자녀들과 재산 분배에 대 한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나눠두고, 세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계적으로 증여를 진행해온 가족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 자체가 가족 간의 신뢰를 두텁게 하는 계기가 된다.


상속과 증여에 관한 지식은, 결코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뤄도 좋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준비는 여유가 있을 때 해야 빛을 발한다. 막상 현실이 닥쳤을 때 허둥대며 찾은 정보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도 함께 갖춰야 한다. 세금을 아끼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가족에게 남겨주는 일이고, 분쟁을 예방하는 것은 가족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다. 오늘 단 한 페이지의 공부가, 훗날 가족 모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미리 알면 가족의 화목은 깊어지고, 세금은 줄어들며, 남겨진 사람들은 덜 아프다. 그것이 상속과 증여를 공부해야 하는 가장 솔직하고 강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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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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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한때 케이팝을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 숨겨두었던 감정의 서랍을 열고,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것들을 비트와 멜로디에 실어 내보내는 행위. 그래서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내미는 일과 같다. 복길의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평범한 문장이었다. ’노래는 죄가 없잖아요. 그냥 해요.‘ 이 짧은 말 안에 케이팝을 둘러싼 모든 윤리적 딜레마와 감정적 피로가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케이팝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 착취적 계약, 팬덤의 집단 광기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그 사랑에 공모의 혐의를 씌우며. 그러나 ' 노래는 죄가 없다 '는 말은, 음악을 면죄부로 삼자는 도피가 아니라, 감정을 죄로 만들지 말자는 선언에 가깝다. 사랑 자체를 심문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사람을 두 번 무너뜨리는 일이다. 케이팝은 언제나 과잉이다. 감정도, 서사도, 비주얼도. 그 과잉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적당함이 허용하지 않는 감정들을 마음껏 꺼내놓을 수 있다. 슬퍼도 너무 슬프고, 기뻐도 너무 기쁘고, 분노도 너무 격렬한 케이팝의 세계는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포장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구가 된다. 나는 케이팝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허상 안에서만 진짜가 될 수 있 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복길이 말하는 '비장미'는 미학적 취향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형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동방신기의 〈Rising Sun(순수)> 앞에서 느끼는 압도감은, 그 노래가 얼마나 완성도 있는 음악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래가 얼마나 과감하게 불완전한 감정을 무대 위에 올려놓았는가의 문제다. 기도하고, 저주하고, 중얼거리다, 절규하는 노래. 논리적 서사 없이 감정의 연쇄만으로 이루어진 그 노래는, 오히려 그 비논리성 덕분에 삶의 어떤 진실에 닿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도 사실 그렇게 생겼다. 슬픔이 분노로 변하고, 분노가 허탈함으로 가라앉고, 허탈함이 다시 어떤 결의로 굳어지는. 논리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케이팝이 그 엉망진창의 감정 지도를 음악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때, 듣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세상에 이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비장함은 또한 연대의 언어이기도 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봉의 불빛이 아름다운 것은, 그 빛들이 각자의 절망과 슬픔을 숨기면서도 함께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복길의 표현처럼, 빛이 어떤 절망 을 감추고 있는지 말하지 않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장함은 그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형식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워질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비장해지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경건해진다.

케이팝 산업이 만들어낸 폭력의 목록은 너무 길다. 불공정한 계약, 통제되지 않는 팬덤의 집단적 광기, 아이돌을 향한 테러와 살의, 조직적 성범죄 게이트. 그 목록 안에는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지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그 어디에도 완벽히 위치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케이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케이팝의 구조가 만들어낸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된 사람들.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방조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해의 분위기를 묵인한 공범 이기도 하다. 복길이 베이비복스 이야기를 꺼낼 때, 나는 한동안 멈추었다. '꺼져라'라는 연호를 들으며 공연했던 그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담은 택배를 받았던 그들. 그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특정한 몇 명의 악인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제거해도 좋다’ 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었고, 그 분위기를 만든 것은 침묵하거나 외면한 수많은 우리들이었다. 살의는 극단적인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라는 복길의 통찰은 케이팝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케이팝이다. 씨스타의 〈Give It to Me〉가 통속적인 삶의 고뇌를 홀가분하게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아웃사이더의 <외톨이>가 무거운 소외감을 무대 위에 올려 해방감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케이팝은 상처를 주는 동시에 그 상처를 언어화하고 형식화하고 함께 노래하게 만든다. 케이팝을 사랑하여 상처 받고, 그 상처를 또다시 케이팝으로 어루만지는 이 순환이 어쩌면 케이팝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속성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음악으로 시대를 감각하는 내면의 연표가 있다는 복길의 말처럼, 나 역시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시간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음악은 시간을 저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다. 멜로디 하나가 수십 년 전의 냄새와 온도와 감정을 고스란히 불러낸다. 그래서 어떤 케이팝은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된다. 복길 이20년 만에 처음으로 <Rising Sun(순수)>을 들으며 그 공백을 채웠듯,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비워두었던 연표의 칸들을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 거부감으로, 두려움으로, 혹은 그냥 게으름으로 외면해두었던 음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선명 하게 들려오는 순간. 그 순간은 단지 음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시간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케이팝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산업이냐 예술이냐, 윤리적 소비가 가능한가, 팬덤은 문화인가 병리인가. 그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복길이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이것일 테다. 우리의 사랑을 모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케이팝을 듣는다. 제대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 나처럼 제대로 살고 싶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듣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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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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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름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명을 붙여주고, 출생 후에는 오래 살기를, 건강하기를,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이름을 짓는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당도했음을 인정하는 최초의 행위이자, 그를 사랑의 언어로 호명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받지 못한 존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름 없는 자는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문학과 영화, 시와 음악이 오래도록 씨름해온 물음이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어느 순간 불현듯 솟아오르는 질문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 닿아 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크리처는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이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름의 부재가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빅터는 크리처를 창조했으나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생명을 부여했으나 이름을 주지 않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나 세상 안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름은 단지 글자가 아니다. 이름은 "너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향해 "나는 네가 여기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처에게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감정을 느꼈지만, 이름 없이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름은 타인이 나를 향해 뻗어오는 언어적 손길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크리처가 오두막집 가족들을 몰래 관찰하며 가장 먼저 배운 것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 아들, 딸.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그 작은 행위 안에서 사랑과 연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훔쳐보며 자신에게는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갔을 것이다.


이름을 처음부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가진 이름을 빼앗기거나 왜곡당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송곳니 속 세 남매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폐쇄된 세계 안에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부를 때 큰애, 작은애, 아들 정도로만 지칭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다. 이름의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크리스티나뿐이다. 이름은 경계를 표시한다. 이름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경계, 세계 안에 속한 자와 세계 바깥에 놓인 자 사이의 경계. 큰딸이 비밀리에 외부 세계의 비디오를 보면서 깨닫는 것도 바로 그 경계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 단순한 발견이 큰딸의 내면에 균열을 만든다. 큰딸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부르스. 이소룡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세 글자. 동생에게 "날 부르스라고 불러줘, 그러면 내가 돌아볼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서러운 순간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해 돌아본다는 것. 그 작은 순환 안에서 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부르스라는 이름이 생긴 순간부터 큰딸의 얼굴에 비로소 살아 있는 표정이 깃든다.


그러나 이름이란 늘 붙들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아리아 스타크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에 극도로 집착하는 소녀다. 원수들의 이름을 매일 밤 기도처럼 중얼거리고, 자신이 아리아 스타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다독인다. 그녀의 스승 자켄은 이름 없는 자들의 세계에서 온 암살자다. 그는 아리아에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역설이 흥미롭다. 이름 없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아리아는 수련 과정에서 수없이 맞으면서 "넌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신의 이름과 역사와 원한을 말할 때마다 채찍이 날아온다. 결국 그녀는 다른 얼굴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라고 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리아가 된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이름이 살아난다는 이 역설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름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종종 이름이 가리키는 본래의 자기를 잃는다. 아리아가 "나는 아리아 스타크다"고 외쳐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는 아리아가 아니었다. 이름은 불려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기도 하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에서 출발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히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다. 죽음이 가른 경계 너머로 손을 뻗는 행위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 이름의 주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쓴다. 돌이 되어도 부르겠다는 이 선언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플라워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름의 문제를 건드린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은 이를 향해 그녀는 말한다. "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살 수 있어. 내 이름은 내가 혼자 모래에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해준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할 수 있어." 타인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는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혹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들이 있다. 이름을 받지 못해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 했던 이들,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로 불렸던 이들. 그 이름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크리처는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이름 없는 존재가 던진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라는 절규는 2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이름 없는 자의 외침이 이름 있는 모든 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영화 <송곳니>의 부르스는 아마 그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불러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세계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의 계약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그 앎으로 살아간다. 이 계약이 깨질 때, 이름의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자라나는 것도 있다. 이름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부르스가 쇠망치로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부수며 웃었던 것처럼, 그 피투성이 얼굴의 미소 속에는 어떤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기억한다는 것, 호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작은 윤리적 행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부르는 일이 곧 살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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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한다는 착각 - 멸종에서 살아남은 일곱 동물의 반격
프랑크 베스테르만 지음, 정신재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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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이 빙하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사진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사진 아래에는 대개 이런 문구가 붙는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함께'라는 단어가 편안하게 미끄러져 들어온다. 마치 인간과 북극곰이 같은 편인 것처럼, 같은 위기를 공유하는 동반자인 것처럼. 그러나 프랑크 베스터만의 책 <공존한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나는 그 '함께'라는 말이 얼마나 교묘한 위안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의 동물들, narwal, 레밍, 장어, 기러기, 북극곰, 순록, 킹크랩 등은 인간과 함께 세계를 나누어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세계 안에서 밀려나고, 줄어들고, 소멸한다. '공존'이란 인간 쪽에서 내민 손짓일 뿐, 상대방은 그 단어를 알지 못한다.


공존(共存)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이상한 비대칭이 숨어 있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허락'하는 쪽과 '허락받는' 쪽이 생긴다. 우리가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공존을 제안하고, 자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베스터만이 쓴 장어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다이크(한때 수리토목 기술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제방)는 장어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장어는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유럽의 강으로 올라오고, 성장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제방은 그 길을 막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학자들이 수치를 제시하고, 정치인들이 고심한다. 그러나 장어는 이 모든 논의 바깥에 있다. 논의의 대상일 뿐,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공존의 문법이다. 공존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선언이다.

레밍에 관한 장에서 베스터만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끌어온다.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생산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 질병, 기근이 자연적 교정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밍이 개체 수가 과밀해지면 집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인간 사회도 어떤 임계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섬뜩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존의 가능성을 근본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맬서스적 세계에서 욕망의 제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파국이 강제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국을 경험한 뒤 잠시 수그러드는 존재일지 모른다. 한 세기 전의 제국주의자들도 '문명의 공존'을 말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을 '교화'하여 함께 발전하겠다고 했다. 오늘날의 환경 담론도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성장', '탄소 중립‘ , 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세련된 형태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흑기러기(rotgans)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흑기러기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시베리아의 굴라크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기러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통해 굴라크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25년 전에, 기러기들은 이미 그 참상을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나를 오래 붙들었다. 기러기들은 굴라크를 알지 못했다. 스탈린을 알지 못했고, 냉전을 알지 못했으며, 인간의 이념 갈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번식지로 가다가, 혹은 돌아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인간 세계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담고 있었다. 공존이 착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도덕을, 우리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기러기들은 인간 사회의 비극에 속절없이 휘말렸고, 그것을 '착취'라고 이름 붙일 언어도 없었다. 공존이란 적어도 두 주체가 서로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을 주체로 대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공존이라는 착각은 완전히 무익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착각에도 종류가 있다. 해로운 착각은 현실을 가리고 행동을 막는다. 그러나 이로운 착각은 현실보다 조금 앞서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을 향해 우리를 이끈다. 공존이라는 단어가 비록 지금의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향점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공존을 이미 달성한 것처럼 말할 때다. 그때 착각은 해로워진다. 북극곰 사진 아래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라고 쓸 때,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 위안이 행동을 대체한다. 공존을 선언하는 순간, 공존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멈춘다. 베스터만이 그린 세계에서 진짜 용기 있는 목소리들은 착각을 거부한다. 수문을 열어 장어의 이동 통로를 복원하라고 외치는 환경운동가들, 순록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국경 분쟁을 고발하는 연구자들, 킹크랩의 침입이 인간의 실험적 개입 때문임을 기록하는 해양생물학자들. 그들은 공존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베스터만의 책 제목은 <공존이라는 착각>이다. 책 속의 동물들은 실제로 공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다. 제목의 '공존'은 은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은유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주체가 되는 세계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장어가 자신의 이동 경로를 요구하고, 기러기가 번식지의 안전을 주장하고, 북극곰이 빙하의 보존을 요청할 수 있는 세계.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강이나 숲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왕가누이 강은 법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았다. 자연을 공존의 '대상'에서 '주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새로운 공존의 문법을 향한 첫 걸음일 수 있다. 공존은 인간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갖는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착각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착각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려면, 우리는 공존을 완성된 상태가 아닌 끝없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북극곰은 우리에게 공존을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요청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말 없는 자를 위해 말하는 것, 그것이 착각을 현실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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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게 태어난 사람들 - 불안은 어떻게 유전자에 각인되어 대물림되는가
대니얼 키팅 지음, 정지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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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불안을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로 치부한다. 쉽게 겁을 먹는 사람,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보며 왜 저렇게 나약한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자 대니얼 P. 키팅(Daniel P. Keating)는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불안이 성격적 결함이나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각인되고 세대를 넘어 전이될 수 있는 후성유전학적 현상임을 밝혀이야기 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본성 대 양육(nature vs. nurture)'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인간 발달을 이해해 왔다. 유전자가 인간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환경이 인간을 빚어내는가. 그러나 후성유전학 (epigenetics)의 등장은 이 낡은 논쟁을 해체하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젖힌다. 유전자는 고정된 설계도가 아니라, 환경에 따라 발현 방식이 달라지는 유동적인 악보와 같다. 그리고 그 악보를 바꾸는 핵심 메커니즘이 바로 스트레스 메틸화 (stress methylation)이다.


후성유전학의 핵심 개념은 유전자 서열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유전자의 발현 방식은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DNA 메틸화(methylation)다. 메틸기(methyl group)가 특정 유전자 부위에 부착되면, 해당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되거나 활성화된다.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에 이 메틸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이를 '스트레스 메틸화'라고 부른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미니(Michael Meaney)의 연구는 이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입증 했다. 그는 쥐 실험을 통해 어미 쥐가 새끼를 충분히 핥아주고 돌보는 행위, 즉 양육의 질이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 유전 자의 메틸화 수준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충분한 돌봄을 받은 새끼 쥐는 스트레스 반응 유전자가 적 절히 조절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안정적인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유지했다. 반면, 방치된 새끼는 스트레스 반응 유전자가 과잉 활성화되어 평생 만성적인 불안과 과민 반응을 보였다. 양육이라는 환경적 경험이 유전자 발현 패턴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키팅은 이를 '생물학적 각인(biological embedding)'이라고 명명하며, 초기 생애 경험이 신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에서, 부모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경우 자녀들이 유사한 스트레스 반응 이상을 보이는 것이 확인되었다.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불안은 이처럼 유전자에 새겨져 세대를 건너 흐른다.


스트레스 메틸화가 가장 강렬하게 일어나는 시기는 임신 중 태아기와 생후 첫 1년이다. 키팅은 이 시기를 '결정적 시기 (critical period)라고 부르며, 이때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평생의 심리적 패턴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한다. 임신 중 어머니가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경험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cortisal)이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된다. 이 코르티솔 노출은 태아의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 axiS), 즉 스트레스 반응 체계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높은 수준의 코르티솔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태아는 스트레스 반응 관련 유전자에 메틸화가 일어나며, 이로 인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과민한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이가 '불안을 안고 태어나는(born anxious) 상태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 연구, 린(Lynn)과 제레미(Jeremy)의 아들 잭(Jack)은 이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임신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린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지속적으로 분비했고, 이는 태아 잭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태어난 잭은 분리 불안이 심하고 자기 진정(self-soothing) 능력이 낮으며, 작은 자극에도 강하게 반응하는 아이로 자랐다. 이것은 책의 성격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의 결과였다. 생후 첫 1년 역시 결정적이다. 이 시기의 양육 경험은 스트레스 메틸화를 강화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 충분한 신체 접촉, 일관된 정서적 반응, 따뜻한 돌봄은 과활성화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진정시키고 메틸화 패턴을 긍정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 반대로, 방치나 지속적인 스트레스 환경은 이미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이상을 더욱 고착시킨다. 키팅이 강조하는 '슈퍼 양육(supernurturing)'의 개념은 바로 이 생물학적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돌봄이 유전자 발현 수준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의도와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불안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가득 찬 환경, 부모 자신의 스트 레스 조절 곤란, 사회적 고립은 의도치 않게 자녀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에 생물학적 흔적을 남긴다. 이처럼 불안의 대물림 은 개인의 의지나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과 환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현상이다.


스트레스 메틸화와 불안의 대물림이 개인적 수준의 문제라면, 해결책도 개인적 차원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키팅 은 이 문제의 뿌리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토양에 깊이 박혀 있음을 강조한다. 화이트홀 연구(Whitehall Study) 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건강 결과가 나빠지는 '사회적 기울기(social gradient)'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빈곤이 건강만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 그 자체가 만성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이것이 스트레스 반응 체 계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는 경제적 불안정, 주거 불안, 교육 기회의 박탈, 사회적 차별과 같은 복합적인 스트레스 요인을 수반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지속적인 스트레스 노출로 인해 스 트레스 메틸화가 더욱 강하게,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이 스트레 스가 세대를 넘어 축적된다. 만성적 스트레스를 경험한 부모는 스트레스 조절 능력이 저하되고, 이는 자녀 양육 방식에 영 향을 미친다. 경제적 빈곤은 부모가 '슈퍼 양육'을 실천할 여유와 자원을 박탈한다. 인종적•민족적 차별은 사회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추가적인 만성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렇게 불평등은 스트레스 메틸화의 사회적 증폭기로 기능하며, 불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키팅은 이것을 '스트레스 전염병(stress epidemic)'이라고 부른다. 불안은 개인 의 신경생물학적 취약성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이 취약성을 지역사회 전체로, 그리고 다음 세대로 확산 시키는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당뇨, 심혈관 질환, 우울증의 사회적 분포가 불평등의 분포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스트레스 메틸화가 집단적 수준에서 누적된 결과다.


불안은 유전자에 새겨진다. 임신 중 어머니의 만성 스트레스, 생애 초기의 부적절한 양육, 사회경제적 박탈과 차별이라는 환경적 경험이 스트레스 메틸화를 통해 유전자 발현 패턴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불안의 대물림은 나약함의 유산이 아니라, 생물학과 환경과 사회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키팅의 연구가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영구적이지 않다. 따뜻한 양육, 안정적인 환경, 지지 적인 사회관계망은 스트레스 메틸화 패턴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뇌는 청소년기에도, 성인기에도 변화한다. 마음챙김(mindfulness), 정서 조절 훈련,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생물학적 수준에서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만들어낸 구조적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 조기 아동 교육 지원, 부모 양육 프로그램,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적 투자야말로 불안의 세대 간 대물림 고리를 끊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다. 우리는 불안을 물려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회복력도 물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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