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의 시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에서 출발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히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다. 죽음이 가른 경계 너머로 손을 뻗는 행위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 이름의 주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쓴다. 돌이 되어도 부르겠다는 이 선언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플라워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름의 문제를 건드린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은 이를 향해 그녀는 말한다. "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살 수 있어. 내 이름은 내가 혼자 모래에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해준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할 수 있어." 타인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는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혹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들이 있다. 이름을 받지 못해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 했던 이들,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로 불렸던 이들. 그 이름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크리처는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이름 없는 존재가 던진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라는 절규는 2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이름 없는 자의 외침이 이름 있는 모든 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영화 <송곳니>의 부르스는 아마 그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불러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세계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의 계약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그 앎으로 살아간다. 이 계약이 깨질 때, 이름의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자라나는 것도 있다. 이름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부르스가 쇠망치로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부수며 웃었던 것처럼, 그 피투성이 얼굴의 미소 속에는 어떤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기억한다는 것, 호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작은 윤리적 행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부르는 일이 곧 살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