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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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름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명을 붙여주고, 출생 후에는 오래 살기를, 건강하기를,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이름을 짓는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당도했음을 인정하는 최초의 행위이자, 그를 사랑의 언어로 호명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받지 못한 존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름 없는 자는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문학과 영화, 시와 음악이 오래도록 씨름해온 물음이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어느 순간 불현듯 솟아오르는 질문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 닿아 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크리처는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이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름의 부재가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빅터는 크리처를 창조했으나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생명을 부여했으나 이름을 주지 않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나 세상 안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름은 단지 글자가 아니다. 이름은 "너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향해 "나는 네가 여기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처에게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감정을 느꼈지만, 이름 없이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름은 타인이 나를 향해 뻗어오는 언어적 손길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크리처가 오두막집 가족들을 몰래 관찰하며 가장 먼저 배운 것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 아들, 딸.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그 작은 행위 안에서 사랑과 연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훔쳐보며 자신에게는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갔을 것이다.


이름을 처음부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가진 이름을 빼앗기거나 왜곡당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송곳니 속 세 남매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폐쇄된 세계 안에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부를 때 큰애, 작은애, 아들 정도로만 지칭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다. 이름의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크리스티나뿐이다. 이름은 경계를 표시한다. 이름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경계, 세계 안에 속한 자와 세계 바깥에 놓인 자 사이의 경계. 큰딸이 비밀리에 외부 세계의 비디오를 보면서 깨닫는 것도 바로 그 경계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 단순한 발견이 큰딸의 내면에 균열을 만든다. 큰딸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부르스. 이소룡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세 글자. 동생에게 "날 부르스라고 불러줘, 그러면 내가 돌아볼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서러운 순간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해 돌아본다는 것. 그 작은 순환 안에서 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부르스라는 이름이 생긴 순간부터 큰딸의 얼굴에 비로소 살아 있는 표정이 깃든다.


그러나 이름이란 늘 붙들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아리아 스타크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에 극도로 집착하는 소녀다. 원수들의 이름을 매일 밤 기도처럼 중얼거리고, 자신이 아리아 스타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다독인다. 그녀의 스승 자켄은 이름 없는 자들의 세계에서 온 암살자다. 그는 아리아에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역설이 흥미롭다. 이름 없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아리아는 수련 과정에서 수없이 맞으면서 "넌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신의 이름과 역사와 원한을 말할 때마다 채찍이 날아온다. 결국 그녀는 다른 얼굴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라고 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리아가 된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이름이 살아난다는 이 역설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름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종종 이름이 가리키는 본래의 자기를 잃는다. 아리아가 "나는 아리아 스타크다"고 외쳐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는 아리아가 아니었다. 이름은 불려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기도 하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에서 출발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히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다. 죽음이 가른 경계 너머로 손을 뻗는 행위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 이름의 주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쓴다. 돌이 되어도 부르겠다는 이 선언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플라워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름의 문제를 건드린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은 이를 향해 그녀는 말한다. "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살 수 있어. 내 이름은 내가 혼자 모래에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해준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할 수 있어." 타인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는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혹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들이 있다. 이름을 받지 못해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 했던 이들,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로 불렸던 이들. 그 이름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크리처는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이름 없는 존재가 던진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라는 절규는 2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이름 없는 자의 외침이 이름 있는 모든 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영화 <송곳니>의 부르스는 아마 그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불러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세계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의 계약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그 앎으로 살아간다. 이 계약이 깨질 때, 이름의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자라나는 것도 있다. 이름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부르스가 쇠망치로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부수며 웃었던 것처럼, 그 피투성이 얼굴의 미소 속에는 어떤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기억한다는 것, 호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작은 윤리적 행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부르는 일이 곧 살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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