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共存)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이상한 비대칭이 숨어 있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허락'하는 쪽과 '허락받는' 쪽이 생긴다. 우리가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공존을 제안하고, 자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베스터만이 쓴 장어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다이크(한때 수리토목 기술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제방)는 장어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장어는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유럽의 강으로 올라오고, 성장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제방은 그 길을 막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학자들이 수치를 제시하고, 정치인들이 고심한다. 그러나 장어는 이 모든 논의 바깥에 있다. 논의의 대상일 뿐,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공존의 문법이다. 공존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선언이다.
레밍에 관한 장에서 베스터만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끌어온다.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생산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 질병, 기근이 자연적 교정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밍이 개체 수가 과밀해지면 집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인간 사회도 어떤 임계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섬뜩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존의 가능성을 근본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맬서스적 세계에서 욕망의 제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파국이 강제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국을 경험한 뒤 잠시 수그러드는 존재일지 모른다. 한 세기 전의 제국주의자들도 '문명의 공존'을 말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을 '교화'하여 함께 발전하겠다고 했다. 오늘날의 환경 담론도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성장', '탄소 중립‘ , 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세련된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