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한다는 착각 - 멸종에서 살아남은 일곱 동물의 반격
프랑크 베스테르만 지음, 정신재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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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북극곰이 빙하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사진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사진 아래에는 대개 이런 문구가 붙는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함께'라는 단어가 편안하게 미끄러져 들어온다. 마치 인간과 북극곰이 같은 편인 것처럼, 같은 위기를 공유하는 동반자인 것처럼. 그러나 프랑크 베스터만의 책 <공존한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나는 그 '함께'라는 말이 얼마나 교묘한 위안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의 동물들, narwal, 레밍, 장어, 기러기, 북극곰, 순록, 킹크랩 등은 인간과 함께 세계를 나누어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세계 안에서 밀려나고, 줄어들고, 소멸한다. '공존'이란 인간 쪽에서 내민 손짓일 뿐, 상대방은 그 단어를 알지 못한다.


공존(共存)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이상한 비대칭이 숨어 있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허락'하는 쪽과 '허락받는' 쪽이 생긴다. 우리가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공존을 제안하고, 자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베스터만이 쓴 장어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다이크(한때 수리토목 기술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제방)는 장어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장어는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유럽의 강으로 올라오고, 성장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제방은 그 길을 막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학자들이 수치를 제시하고, 정치인들이 고심한다. 그러나 장어는 이 모든 논의 바깥에 있다. 논의의 대상일 뿐,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공존의 문법이다. 공존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선언이다.

레밍에 관한 장에서 베스터만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끌어온다.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생산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 질병, 기근이 자연적 교정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밍이 개체 수가 과밀해지면 집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인간 사회도 어떤 임계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섬뜩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존의 가능성을 근본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맬서스적 세계에서 욕망의 제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파국이 강제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국을 경험한 뒤 잠시 수그러드는 존재일지 모른다. 한 세기 전의 제국주의자들도 '문명의 공존'을 말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을 '교화'하여 함께 발전하겠다고 했다. 오늘날의 환경 담론도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성장', '탄소 중립‘ , 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세련된 형태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흑기러기(rotgans)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흑기러기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시베리아의 굴라크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기러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통해 굴라크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25년 전에, 기러기들은 이미 그 참상을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나를 오래 붙들었다. 기러기들은 굴라크를 알지 못했다. 스탈린을 알지 못했고, 냉전을 알지 못했으며, 인간의 이념 갈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번식지로 가다가, 혹은 돌아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인간 세계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담고 있었다. 공존이 착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도덕을, 우리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기러기들은 인간 사회의 비극에 속절없이 휘말렸고, 그것을 '착취'라고 이름 붙일 언어도 없었다. 공존이란 적어도 두 주체가 서로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을 주체로 대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공존이라는 착각은 완전히 무익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착각에도 종류가 있다. 해로운 착각은 현실을 가리고 행동을 막는다. 그러나 이로운 착각은 현실보다 조금 앞서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을 향해 우리를 이끈다. 공존이라는 단어가 비록 지금의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향점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공존을 이미 달성한 것처럼 말할 때다. 그때 착각은 해로워진다. 북극곰 사진 아래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라고 쓸 때,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 위안이 행동을 대체한다. 공존을 선언하는 순간, 공존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멈춘다. 베스터만이 그린 세계에서 진짜 용기 있는 목소리들은 착각을 거부한다. 수문을 열어 장어의 이동 통로를 복원하라고 외치는 환경운동가들, 순록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국경 분쟁을 고발하는 연구자들, 킹크랩의 침입이 인간의 실험적 개입 때문임을 기록하는 해양생물학자들. 그들은 공존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베스터만의 책 제목은 <공존이라는 착각>이다. 책 속의 동물들은 실제로 공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다. 제목의 '공존'은 은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은유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주체가 되는 세계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장어가 자신의 이동 경로를 요구하고, 기러기가 번식지의 안전을 주장하고, 북극곰이 빙하의 보존을 요청할 수 있는 세계.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강이나 숲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왕가누이 강은 법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았다. 자연을 공존의 '대상'에서 '주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새로운 공존의 문법을 향한 첫 걸음일 수 있다. 공존은 인간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갖는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착각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착각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려면, 우리는 공존을 완성된 상태가 아닌 끝없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북극곰은 우리에게 공존을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요청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말 없는 자를 위해 말하는 것, 그것이 착각을 현실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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