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한다는 착각 - 멸종에서 살아남은 일곱 동물의 반격
프랑크 베스테르만 지음, 정신재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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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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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이 빙하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사진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사진 아래에는 대개 이런 문구가 붙는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함께'라는 단어가 편안하게 미끄러져 들어온다. 마치 인간과 북극곰이 같은 편인 것처럼, 같은 위기를 공유하는 동반자인 것처럼. 그러나 프랑크 베스터만의 책 <공존한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나는 그 '함께'라는 말이 얼마나 교묘한 위안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의 동물들, narwal, 레밍, 장어, 기러기, 북극곰, 순록, 킹크랩 등은 인간과 함께 세계를 나누어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세계 안에서 밀려나고, 줄어들고, 소멸한다. '공존'이란 인간 쪽에서 내민 손짓일 뿐, 상대방은 그 단어를 알지 못한다.


공존(共存)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이상한 비대칭이 숨어 있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허락'하는 쪽과 '허락받는' 쪽이 생긴다. 우리가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공존을 제안하고, 자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베스터만이 쓴 장어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다이크(한때 수리토목 기술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제방)는 장어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장어는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유럽의 강으로 올라오고, 성장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제방은 그 길을 막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학자들이 수치를 제시하고, 정치인들이 고심한다. 그러나 장어는 이 모든 논의 바깥에 있다. 논의의 대상일 뿐,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공존의 문법이다. 공존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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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에 관한 장에서 베스터만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끌어온다.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생산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 질병, 기근이 자연적 교정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밍이 개체 수가 과밀해지면 집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인간 사회도 어떤 임계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섬뜩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존의 가능성을 근본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맬서스적 세계에서 욕망의 제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파국이 강제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국을 경험한 뒤 잠시 수그러드는 존재일지 모른다. 한 세기 전의 제국주의자들도 '문명의 공존'을 말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을 '교화'하여 함께 발전하겠다고 했다. 오늘날의 환경 담론도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성장', '탄소 중립‘ , 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세련된 형태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흑기러기(rotgans)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흑기러기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시베리아의 굴라크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기러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통해 굴라크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25년 전에, 기러기들은 이미 그 참상을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나를 오래 붙들었다. 기러기들은 굴라크를 알지 못했다. 스탈린을 알지 못했고, 냉전을 알지 못했으며, 인간의 이념 갈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번식지로 가다가, 혹은 돌아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인간 세계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담고 있었다. 공존이 착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도덕을, 우리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기러기들은 인간 사회의 비극에 속절없이 휘말렸고, 그것을 '착취'라고 이름 붙일 언어도 없었다. 공존이란 적어도 두 주체가 서로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을 주체로 대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공존이라는 착각은 완전히 무익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착각에도 종류가 있다. 해로운 착각은 현실을 가리고 행동을 막는다. 그러나 이로운 착각은 현실보다 조금 앞서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을 향해 우리를 이끈다. 공존이라는 단어가 비록 지금의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향점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공존을 이미 달성한 것처럼 말할 때다. 그때 착각은 해로워진다. 북극곰 사진 아래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라고 쓸 때,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 위안이 행동을 대체한다. 공존을 선언하는 순간, 공존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멈춘다. 베스터만이 그린 세계에서 진짜 용기 있는 목소리들은 착각을 거부한다. 수문을 열어 장어의 이동 통로를 복원하라고 외치는 환경운동가들, 순록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국경 분쟁을 고발하는 연구자들, 킹크랩의 침입이 인간의 실험적 개입 때문임을 기록하는 해양생물학자들. 그들은 공존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베스터만의 책 제목은 <공존이라는 착각>이다. 책 속의 동물들은 실제로 공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다. 제목의 '공존'은 은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은유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주체가 되는 세계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장어가 자신의 이동 경로를 요구하고, 기러기가 번식지의 안전을 주장하고, 북극곰이 빙하의 보존을 요청할 수 있는 세계.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강이나 숲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왕가누이 강은 법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았다. 자연을 공존의 '대상'에서 '주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새로운 공존의 문법을 향한 첫 걸음일 수 있다. 공존은 인간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갖는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착각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착각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려면, 우리는 공존을 완성된 상태가 아닌 끝없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북극곰은 우리에게 공존을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요청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말 없는 자를 위해 말하는 것, 그것이 착각을 현실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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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게 태어난 사람들 - 불안은 어떻게 유전자에 각인되어 대물림되는가
대니얼 키팅 지음, 정지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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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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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불안을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로 치부한다. 쉽게 겁을 먹는 사람,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보며 왜 저렇게 나약한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자 대니얼 P. 키팅(Daniel P. Keating)는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불안이 성격적 결함이나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각인되고 세대를 넘어 전이될 수 있는 후성유전학적 현상임을 밝혀이야기 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본성 대 양육(nature vs. nurture)'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인간 발달을 이해해 왔다. 유전자가 인간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환경이 인간을 빚어내는가. 그러나 후성유전학 (epigenetics)의 등장은 이 낡은 논쟁을 해체하며 새로운 시각을 열어젖힌다. 유전자는 고정된 설계도가 아니라, 환경에 따라 발현 방식이 달라지는 유동적인 악보와 같다. 그리고 그 악보를 바꾸는 핵심 메커니즘이 바로 스트레스 메틸화 (stress methylation)이다.


후성유전학의 핵심 개념은 유전자 서열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유전자의 발현 방식은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DNA 메틸화(methylation)다. 메틸기(methyl group)가 특정 유전자 부위에 부착되면, 해당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되거나 활성화된다.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에 이 메틸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이를 '스트레스 메틸화'라고 부른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미니(Michael Meaney)의 연구는 이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입증 했다. 그는 쥐 실험을 통해 어미 쥐가 새끼를 충분히 핥아주고 돌보는 행위, 즉 양육의 질이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 유전 자의 메틸화 수준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충분한 돌봄을 받은 새끼 쥐는 스트레스 반응 유전자가 적 절히 조절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안정적인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유지했다. 반면, 방치된 새끼는 스트레스 반응 유전자가 과잉 활성화되어 평생 만성적인 불안과 과민 반응을 보였다. 양육이라는 환경적 경험이 유전자 발현 패턴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키팅은 이를 '생물학적 각인(biological embedding)'이라고 명명하며, 초기 생애 경험이 신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에서, 부모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경우 자녀들이 유사한 스트레스 반응 이상을 보이는 것이 확인되었다.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불안은 이처럼 유전자에 새겨져 세대를 건너 흐른다.


스트레스 메틸화가 가장 강렬하게 일어나는 시기는 임신 중 태아기와 생후 첫 1년이다. 키팅은 이 시기를 '결정적 시기 (critical period)라고 부르며, 이때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평생의 심리적 패턴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한다. 임신 중 어머니가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경험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cortisal)이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된다. 이 코르티솔 노출은 태아의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 axiS), 즉 스트레스 반응 체계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높은 수준의 코르티솔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태아는 스트레스 반응 관련 유전자에 메틸화가 일어나며, 이로 인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과민한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이가 '불안을 안고 태어나는(born anxious) 상태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 연구, 린(Lynn)과 제레미(Jeremy)의 아들 잭(Jack)은 이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임신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린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지속적으로 분비했고, 이는 태아 잭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태어난 잭은 분리 불안이 심하고 자기 진정(self-soothing) 능력이 낮으며, 작은 자극에도 강하게 반응하는 아이로 자랐다. 이것은 책의 성격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의 결과였다. 생후 첫 1년 역시 결정적이다. 이 시기의 양육 경험은 스트레스 메틸화를 강화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 충분한 신체 접촉, 일관된 정서적 반응, 따뜻한 돌봄은 과활성화된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진정시키고 메틸화 패턴을 긍정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 반대로, 방치나 지속적인 스트레스 환경은 이미 형성된 스트레스 반응 이상을 더욱 고착시킨다. 키팅이 강조하는 '슈퍼 양육(supernurturing)'의 개념은 바로 이 생물학적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돌봄이 유전자 발현 수준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의도와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불안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가득 찬 환경, 부모 자신의 스트 레스 조절 곤란, 사회적 고립은 의도치 않게 자녀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에 생물학적 흔적을 남긴다. 이처럼 불안의 대물림 은 개인의 의지나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과 환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현상이다.


스트레스 메틸화와 불안의 대물림이 개인적 수준의 문제라면, 해결책도 개인적 차원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키팅 은 이 문제의 뿌리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토양에 깊이 박혀 있음을 강조한다. 화이트홀 연구(Whitehall Study) 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건강 결과가 나빠지는 '사회적 기울기(social gradient)'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빈곤이 건강만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 그 자체가 만성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이것이 스트레스 반응 체 계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는 경제적 불안정, 주거 불안, 교육 기회의 박탈, 사회적 차별과 같은 복합적인 스트레스 요인을 수반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지속적인 스트레스 노출로 인해 스 트레스 메틸화가 더욱 강하게,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이 스트레 스가 세대를 넘어 축적된다. 만성적 스트레스를 경험한 부모는 스트레스 조절 능력이 저하되고, 이는 자녀 양육 방식에 영 향을 미친다. 경제적 빈곤은 부모가 '슈퍼 양육'을 실천할 여유와 자원을 박탈한다. 인종적•민족적 차별은 사회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추가적인 만성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렇게 불평등은 스트레스 메틸화의 사회적 증폭기로 기능하며, 불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키팅은 이것을 '스트레스 전염병(stress epidemic)'이라고 부른다. 불안은 개인 의 신경생물학적 취약성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이 취약성을 지역사회 전체로, 그리고 다음 세대로 확산 시키는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당뇨, 심혈관 질환, 우울증의 사회적 분포가 불평등의 분포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스트레스 메틸화가 집단적 수준에서 누적된 결과다.


불안은 유전자에 새겨진다. 임신 중 어머니의 만성 스트레스, 생애 초기의 부적절한 양육, 사회경제적 박탈과 차별이라는 환경적 경험이 스트레스 메틸화를 통해 유전자 발현 패턴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불안의 대물림은 나약함의 유산이 아니라, 생물학과 환경과 사회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키팅의 연구가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영구적이지 않다. 따뜻한 양육, 안정적인 환경, 지지 적인 사회관계망은 스트레스 메틸화 패턴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뇌는 청소년기에도, 성인기에도 변화한다. 마음챙김(mindfulness), 정서 조절 훈련,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생물학적 수준에서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만들어낸 구조적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 조기 아동 교육 지원, 부모 양육 프로그램,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적 투자야말로 불안의 세대 간 대물림 고리를 끊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다. 우리는 불안을 물려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회복력도 물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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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마음을 만든다 - 무기력 시대, 몸과 마음의 역량을 높이는 회복의 과학
윤대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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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도구가 있는데, 왜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가는 걸까. 스마트폰에는 명상 앱이 깔려 있고, SNS 피드에는 긍정 확언이 넘쳐흐르고, 서점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관한 책이 쏟아진다. 이 시대만큼 '마음 관리'에 대한 지식과 방법론이 풍부했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 환자 수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는 방법의 부족이 아니다. 방향의 착오다. 오랫동안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마음 안에서만 해결하려 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고, 의지를 다잡고, 더 강해지려 애썼다. 하지만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는 때로 상황을 악화시킨 다. 억지로 밀어넣은 긍정은 현실의 감정과 충돌을 일으키고, 그 간극은 자책과 무력감으로 돌아온다. 마음을 바꾸려다 오히려 더 깊이 무너지는 역설이다.

우리는 오래된 편견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의 문제는 정신과에서, 몸의 문제는 내과에서 다룬다는 구분이다. 이 구분은 편의를 위한 제도적 경계일 뿐, 실제 인체의 작동 방식을 반영하지 않는다. 뇌는 몸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이다. 체중의 약 2%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20% 이상을 사용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이 설명된다. 혈당이 불안정하고, 염증 수치가 높고, 세포 속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저하되면, 뇌는 충분한 연료를 공급 받지 못한 채 작동해야 한다. 그 결과는 피로, 집중력 저하, 감정 기복, 무기력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의 문제다. 최근 의학계에서 주목받는 대사정신의학이다. 우울, 불안, 무기력 같은 정신적 증상 을 혈당, 콜레스테롤, 염증 반응, 호르몬 균형, 장 건강이라는 몸의 언어로 함께 읽으려는 시도다. 스탠퍼드 의대와 하버드 의대 부속 병원에서도 관련 임상•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일부 선진적인 의사들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라, 의학 전체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음을 뜻한다. 흥미로운 임상 사례가 있다. 오랫동안 가족 관계의 갈등으로 상담을 받아 온 중년 남성이 있었다. 수년간 대화를 나눠도 나아지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혈액 검사 결과를 함께 살펴보니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고 혈당은 당뇨 전 단계였다. 고지혈증 약과 오메가3를 처방한 지 3개월 후, 그는 "이상하게 예전보다 덜 예민해졌다"고 말했다. 심리 상담도, 관계 훈련도 아닌, 콜레스테롤 수치의 안정이 감정의 파도를 잠재운 것이다. 몸과 마음은 이토록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마음의 고통이 기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임상적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부정적 감정은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지속적인 분비를 유발하고, 이는 혈관 건강을 해치고, 혈압을 올리고, 내장 지 방을 축적시키고, 세포의 노화를 앞당긴다. 마음속의 고통은 혈액 수치에 흔적을 남기고, 세포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끈질기고 은밀한 감정 독소는 '반추'다. 반추란 지나간 일을 계속 되새기며 그 안에 머무는 사고 패턴이 다. "나는 왜 이럴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답 없는 질문의 반복. 이 과정에서 우리 몸은 이미 지나간 사건을 지금 이 순간의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시간이 흘러도 몸의 스트레스 반응은 꺼지지 않는다. 과거는 끝났지만 신체는 여전히 그 순간 속에 갇혀 반응하는 것이다. 반추는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반주의 본질이 다. 뇌가 위협과 불확실성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패턴이기 때문에, 의지만으로는 끊어내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반 추가 시작되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추상적인 생각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환하며, 어떤 신체 상태에서 어떤 생각이 반복 되는지 패턴을 파악하는 훈련이다. 반추를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개입 가능한 '과정'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그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다. 더 많은 긍정적 사고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몸-마음 시스템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작지만 직접적인 개입이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숲에서 20분을 걷는 일. 불안이 치솟을 때 4초 들이마시고 6초 내쉬는 호흡 하나. 무기력한 날 단백질이 풍부한 따뜻한 국물 한 그릇. 이것들은 자기계발서에서 흔 히 보는 표면적인 처방이 아니다. 코르티솔을 낮추고, 미주신경을 활성화하고, 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생리학적 개입이 다. 몸을 먼저 안정시킴으로써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 이것이 대사정신의학이 제안하는 회복의 순서다. 특히 AI가 일상을 빠르게 재편하는 지금, 인간의 뇌는 전례 없는 정보 과부하에 시달리고 있다. '브레인 프라이'라는 신조 어가 등장할 만큼,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계가 더 많은 일 을 처리해줄수록, 정작 인간의 뇌는 더 많은 판단과 선택의 부담을 지게 된다. AI는 피로를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몸을 가진 존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 시대일수록 몸의 기반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마음을 억지로 다잡는 기술보 다, 몸이 마음을 받쳐줄 수 있도록 대사 역량을 키우는 일이 먼저다.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완벽한 평온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후에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 그것이 진정한 회복 탄력성이다. 그 힘은 의지에서만 오지 않는다. 잘 먹고, 충분히 자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 혈당이 오르내리는 패턴을 살피고, 수면이 부족할 때 불안이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 반추가 시작될 때 생각 대신 몸을 움직이는 것. 이 모든 작은 선택들이 쌓여 몸-마음 시스템을 다시 세운다. 우리는 지금 질문을 바꿔야 할 시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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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종말 - 디지털 화폐부터 조개껍데기까지, 거꾸로 읽는 돈의 역사
이완배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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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오래된 서랍을 정리하다가 교통카드 하나를 꺼냈다. 플라스틱 카드였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 있다. 서랍 한켠에는 10년 전 해외여행에서 쓰다 남은 지폐 몇 장도 있었다. 색이 바래고 구겨진 그 종잇조각을 보 며 문득 생각했다. 이것이 여전히 '돈'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물음이 뒤따랐다. 애초에 '돈'이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매일 돈을 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만지는 것은 이제 돈이 아니다. 화면 속 숫자를 탭 한 번으로 옮기고, QR코드를 들이 밀고, 손목의 워치를 단말기에 가져다 댄다. 지폐는 점점 낯선 물건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미 완전히 낯선 물건이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교회 헌금도 카드로 낸다. 노르웨이의 일부 버스는 아예 현금을 받지 않는다. 중국 에서는 노점상 앞에도 QR코드가 붙어 있다. 화폐의 물리적 실체는 인류의 손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단순한 결제 방식의 진화가 아니다. 이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온 신뢰의 형태 자체가 바뀌는 사건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폐허 속에서 사토시나카모토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논문 한 편을 공개했다. 그것이 비트코인의 시작이었다. 당시 세계는 리먼브라더스의 붕괴를 목격하며 중격에 빠져 있었다. 수십 년간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금융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은행이 아니라 은행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비트코인은 그 환멸 위에서 태어났다. 국가도, 은행도, 어떤 중앙 권력도 없이 작동하는 화폐. 수학적 알고리즘과 블록체인 기술이 신뢰를 보증하는 화폐. 이 아이디어는 인류가 수천 년간 국가와 기관에 위탁해 온 '신뢰'를 코드로 대체하겠다는 철학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약속한 바를 완전히 이행하지 못했다. 탈중앙화를 외쳤지만, 결국 소수의 대형 채 굴자들이 네트워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치의 안정성을 표방했지만, 하루에 30퍼센트가 폭락하고 다음 날 다시 20퍼 센트가 오르는 롤러코스터를 반복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교환의 수단'으로 쓰기보다 '투 기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커피를 사는 사람은 없다. 비트코인을 들고 내일의 가격을 기다리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실패한 실험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비트코인은 화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세상에 던졌다. "우리는 정말 국가가 보증하는 신뢰가 필요한가?" 이 질문은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이어진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의 가격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달러나 실물 자산에 가치를 고정함으로써, 암호화폐의 기 술적 장점은 살리되 가격 변동성은 억제하겠다는 시도다. USDT, USDC 같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실제로 전 세계 가상자산 거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2022년 루나•테라 사태는 스테이블코인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알고리즘'에 의해 달러 가치에 연동된다던 테라UST는 단 며칠 만에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었다. 시가총액 수십 조 원이 증발했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재산을 잃었다. 알고리즘이 신뢰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결국 알 고리즘도 인간의 신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배웠다. 여기서 화폐의 본질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화 폐는 기술이 아니다. 화폐는 신뢰다. 그 신뢰가 국가에 의해 보장되든, 알고리즘에 의해 보장되든,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보장되든,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화폐는 존재를 멈춘다.


민간 영역에서 디지털 화폐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국가들은 결코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화를 수억 명의 국민에게 보급하기 시작했다. 유럽중앙은행은 디지털 유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조차 디지털 달러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즉 CBDC는 기존 화폐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중간 매개자인 상업은행 없이 중앙은행이 개인에게 직접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할 수 있다. 둘째, 모든 거래가 디 지털로 기록된다. 셋째, 정부가 화폐의 사용 조건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돈, 특정 기간 안에 쓰지 않으면 소멸하는 돈, 특정 품목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돈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 이것은 혁명적 편의성인 동시에 전례 없는 통제의 가능성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화폐 권력을 손에 쥔 국가는 항상 그 권력을 지배의 도구로 활용해 왔다. 조선 말기 고종 정부가 당백전을 남발해 경제를 붕괴시킨 것도, 일제가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경제 주권을 박탈한 것도, 박정희 정부가 화폐개혁으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려 했던 것도, 모두 화폐 권력이 정치 권력과 불가분의 관 계임을 보여 준다. CBDC가 완전히 구현된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민의 계좌를 동결하거나, 특정 정치적 행동에 연루된 사람의 자금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거나, 정권에 비협조적인 기업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즉각 실행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편의성의 이면에는 감시와 통제라는 어두운 가능성이 도사 리고 있다. 그럼에도 CBDC의 도입은 피하기 어려운 흐름처럼 보인다. 금융 소외 계층에 대한 접근성 확대, 현금 관리 비 용의 절감, 불법 자금 흐름의 차단 같은 명분들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의 도입 여부가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설계되느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확립했다. 세계는 달러를 믿었고, 달러를 통해 거래했다. 그 믿음의 근거는 명확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금 보유국이었고, 달러는 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화폐였다. 1971년 닉슨이 금 태환을 포기하면서 그 근거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달러 패권은 유지되었다. 이번에는 금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석유 결제에서의 독점적 지위가 달러를 지탱했다. 세계는 미국을 믿었고, 미국을 믿었기 때문에 달러를 믿었다. 그러나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의 달러 자산을 동결하자, 세계 각국은 충격을 받았다. 달러 자산이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을 중심으로 한 탈달러화 움직임은 '달러라는 신뢰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지정학적 선택이다. 무역 분쟁을 전방위로 일 으키며 동맹국에도 관세 폭탄을 던지는 미국의 행보는, 역설적으로 달러 패권의 기반이었던 '아틀라스로서의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는 순간, 세계가 그 대가로 달러에 부여했던 신 뢰도 함께 약해진다. 그렇다면 달러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는 하나의 패권 통화가 몰락한 후, 새로운 통화가 즉각 그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축통화의 교체는 수십 년에 걸친 지각 변동이다. 파운드가 달러에 자리를 넘겨주는 데도 수십 년이 걸렸다. 그 과도기 동안 세계는 혼돈과 불안 속에서 새로운 신뢰의 닻을 찾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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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화폐 역사를 가로질러 온 이 여정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진실에 다다른다. 화폐는 언제나 바뀌었다. 조개껍데기에서 금속 주화로, 금속 주화에서 지폐로, 지폐에서 신용카드로, 신용카드에서 디지털 코드로. 그러나 화폐가 바뀌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신뢰다. 인류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을 화폐로 삼았다. 금을 믿었을 때는 금화를 썼고, 국가를 믿었을 때는 지폐를 썼고, 기술을 믿기 시작하자 비트코인을 만들었다. 그 믿음의 대상이 바뀔 뿐, 신뢰를 거래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폐의 종말'이라는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폐는 언제나 그 시대 사람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우리가 지금 어떤 화폐를 만들어 가느냐는,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믿고 어떤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화폐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있다면, 그 빈자리에 무엇을 채울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불안이 아니라 지혜로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화폐의 탄생은 곧, 새로운 신뢰의 탄생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뢰는 언제나 인간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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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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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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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우리는 무언가를 다짐하며 집을 나선다. 오늘은 좀 더 잘해보자, 오늘은 참아보자, 오늘은 모른 척해보자. 그 다 짐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나는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일터는 생각보다 언어가 많은 곳이다. 회의에서 오가는 말, 메일로 주고받는 문장, 복도에서 스치는 눈빛. 그런데 그 수많은 언어 속에서 정작 자신을 설명하는 말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일하는 여성들에게, 일터의 언어는 때로 자신을 담기에 너 무 좁거나, 자신을 표현하기에 너무 위험한 그릇처럼 느껴진다. 그 좁고 위험한 자리에서, 그래도 나를 지우지 않는 방법 을 묻는 책이다.


우리는 종종 '표현이 거칠다'는 말을 듣는다. 혹은 반대로, 너무 조심스럽다는 말을,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같은 행동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언어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똑같이 꼼꼼하게 일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철저하다'는 말이 돌아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민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의견을 강하게 밀면 누구는 '소신 있다'는 평을 받고, 누구는 이기적이 다는 평을 받는다. 이 언어의 격차는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어떤 자리에 있어도 된다고 여겨지는가에 대한 사회의 무의식이 말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그리고 타인에게 증명하는 행위에 가깝다.


쿠션어를 어디서 쓰고 어디서 걷어낼지, 침묵을 언제 견디고 언제 깨뜨릴지, 왜냐하면 이라는 한 단어가 어떻게 말의 무게를 달리 만드는지, 이 모든 것들이 일터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언어의 근육이다. 그리고 이 언어의 근육은 혼자 키우기 어렵다. 말을 꺼내도 튕겨나오는 분위기, 의견을 냈을 때 무시되는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결국 말을 삼키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해도 된다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내 말이 어떤 공간에서는 가치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이 쌓여야, 말하는 연습도 의미를 갖는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 정리하는 행위는, 내가 겪은 일을 나만의 지식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록된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훗날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발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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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오래, 그리고 잘 살아남은 여성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라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남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 그 독립심은 분명 대단하다. 그러나 그 결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조용히 끊어진다. 네트워킹이라는 단어는 종종 불편하게 느껴진다. 목적있는 관계, 이해관계로 얽힌 인맥 그런 인상 때문에 진정성 있는 사람일수록 의식적으로 멀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네트워킹의 본질은 이해타산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서로의 사다리가 되어주는 일이다. 술자리를 함께 해야만 만들어지는 관계라면, 술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망 밖에 놓인다. 접근 가능한 경로 자체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자리에 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른 방식의 연결을 만들 것인가다.


가볍게 안부를 묻는 것,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 누군가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이런 작은 접속들이 모여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망이 된다. 책임있는 자리에 올라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쁜 결정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 그 결정은 어차피 이루어진다. 다만 다른 사람이 내릴 뿐이다. 더 많은 사람이 결정하는 자리에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의 현실이 결정에 반영된다. 그것이 성취를 넘어, 광의의 협업이 되는 지점이다. 관계에서 또 하나 놓치기 쉬운 것은, 같은 여성 동료에 대한 태도다. 경쟁적인 환경에 서 오래 살아남다 보면 비슷한 처지의 동료를 경쟁자로 먼저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를 경쟁자로 보는 순간, 서로의 사다리가 될 가능성도 사라진다. 다른 여자를 존중하는 일은 도덕적 당위이기 전에, 자신이 속한 구조를 조금씩 바꾸는 실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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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이라는 말이 이렇게 흔해진 시대에도, 정작 번아웃이 오기 전에 멈추는 사람은 드물다. 할 일 목록이 눈앞에 있고, 번아웃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재능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최고 수준이라는 데 있다. 성실함과 자기착취는 때로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분산이다. 재테크의 분산투자처럼, 인생에서도 에너지와 의미를 한 곳에만 몰아넣지 않는 것. 일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하면, 일이 흔들릴 때 자신 전체가 흔들린다. 일 외의 관계, 일 외의 관심사, 일 외의 시간이 실은 일을 오래 지속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능숙함은 재능과 다르다. 재능은 타고날 수 있지만, 능숙함은 반드시 꾸역꾸역의 나날을 통과해야 온다. 재미없는 것을 참아내는 시간 없이 재미있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공정한 말이기도 하다. 누구도 처음부터 능숙하지 않았다. 지금 어설픈 것은 부족한 게 아니라, 아직 그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라는 뜻 이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만성질환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포기가 아니 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해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을 수 있다. 해결하려다 지치는 것과, 안고 가면서 나머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잘 못하는데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때로는 무모해 보이지만, 현실에 기반한 신중함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에 이르게 해주기도 한다. 허술해 보이는 다리를 냅다 건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길은 충분히 준비된 다음에야 열리는 게 아니라, 일단 걸어 들어가야 열린다.


책이 말하는 '주문'은 마법이 아니다. 현실을 바꿔주는 주문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말이다. 그것은 회의실에서 말을 꺼내기 전의 작은 다짐일 수도 있고, 퇴근 후 오늘 있었던 일을 몇 줄로 적어두는 습관일 수 도 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동료에게 안부를 묻는 메시지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다른 단어를 찾아보는 노력일 수도 있다. 일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나 더 완벽한 전략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조금 덜 닳고, 내일의 나와 연결될 수 있는 언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그리고 아직 나는 나아가고 있다는 작은 확신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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