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꼭 읽어야 할 20세기 세계사 - 세계를 바꾼 결정적 장면들
이영숙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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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며칠 전 아침 뉴스에서 중동 분쟁 소식이 흘러나왔다. 앵커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심화되 고 있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갈등의 뿌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또 싸우는구나" 하는 피상적인 이해만 있을 뿐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미중 패권 경쟁도, 브렉시트도 마찬가지였다. 뉴스는 매일 쏟아지는데, 나는 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까? 이번에 이영숙 작가의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20세기 세계사>를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 가 몰랐던 건 '오늘'이 아니라 '어제'였다. 20세기라는 거대한 뿌리를 모르니, 21세기라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오늘을 읽는 해독제 같은 책이었다. 책은 사진이라는 도구를 활용한다. 저자는 20세기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선별하고, 그 사진 한 컷에서 출발해 역사의 물줄기를 풀어낸다. 마치 사진관에 들어가 액자 속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 다보는 것처럼, 그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예를 들어 형형한 눈빛의 수도승 라스푸틴 사진은 한 인물의 조상이 아니다. 그 눈빛 너머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이, 러시아 혁명의 전야가, 그리고 권력에 기생하는 비선 실세의 끈질긴 생명력이 보인다. 손을 맞잡고 웃는 세 명의 지도자 사진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미소 뒤에는 중동의 피 묻은 역사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분쟁의 씨앗이 숨어 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지만, 저자는 그 순간의 전후를 촘촘하게 연결한다. 그래서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것처럼 1917년 러시아로, 1945년 히로시마로, 1989년 베를린으로 순간 이동한다. 이것이 바로 책이 지닌 마법 같은 힘이다.

저자는 고백한다. 책을 쓰는 동안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고 느꼈다고. 20세기의 무게가 그 이전 19세기까지의 모든 세계사를 합친 것과 견주어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 달았다고 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그 무게를 실감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가장 참혹한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냉전이라는 이념 대결로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동시에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했고, 인권과 평등을 향한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 전쟁과 평화, 억압과 자유, 증오와 화해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파편이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구성하고 있다. 유엔이 왜 생겼는지, NATO가 무엇인지, 중동이 왜 불안한지, 한반도가 왜 분단되었는지, 이 모든 질문의 답이 20세 기에 있다. 그러니 20세기를 모르고서는 오늘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이유다.

역사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딱딱한 연대기, 암기해야 할 인물과 사건들, 지루한 서술. 하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마치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혹은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사를 '공부'가 아닌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한다. 저자는 역사 속 인물들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 고뇌와 결단을 지닌 살아 있는 사람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그들의 눈물에 공감하고,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강대국의 오만이 약소국에게 남긴 상처를 다루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르완다 대학살을 다루며 이렇게 쓴다. "잘못은 강대국이 하고, 그 결과로서의 잔혹한 비극은 약소국이 떠안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마음대로 나누고 지배했다. 그들은 현지의 역사와 문화, 민족 구성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편의대로 국경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부주의하고 무 책임한 선택이 수십 년 뒤 끔찍한 인종 갈등과 대학살로 이어졌다. 한국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은 선이었다. 하지만 그 선 때문에 수백만 명이 죽고, 수천만 명이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약소국의 운명이 강대국의 회의실에서 결정되는 비극. 이것이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저자는 이러한 불평등한 세계 구조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한다. 국내 자료뿐 아니라 수 많은 외국 역사서와 사료를 연구한 덕분이다. 그래서 이 책은 편협한 민족주의나 특정 이념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세계 시민의 관점을 제공한다.

책을 읽으며 소름 돋았던 순간이 있었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이 21세기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라스푸틴 같은 비선 실세는 여전히 권력 주변에 존재한다. 뮌헨 협정처럼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약소국을 희생시키는 일은 지금도 벌어진다. 인종 갈등과 증오 범죄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20세기의 교훈을 제대로 배웠다면, 독재와 전 쟁, 차별과 혐오가 어떤 결말을 낳는지 알았다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한다. 역사를 잊지 말라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그것이 바로 역사를 배우는 진짜 이유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또 하나의 진실은, 역사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거대한 전쟁과 혁명, 협정과 조약 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결단을 내린 지도자, 희생당한 민중, 저항한 혁명가, 침묵한 방관자. 그들 모두가 역사를 만들었다. 저자는 그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두려움과 용기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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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
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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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국 국방부 예산이 사상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회계상의 이정표가 아니다. 윌리엄 하텅이 지적 하듯,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전쟁 산업을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재편되었음을 의미한다.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쏟아부은 돈만 8조 달러에 달한다. 이 돈이면 미국 전체의 전력망을 탄소 제로로 전환하고, 모든 학자금 대출을 탕감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돈은 사막과 산악 지대에서 증발했고,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참전 군인들에게는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상처만 남겼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된다. 왜일까? 하의 답은 명확하다. " 미국의 정책은 이윤에 기반한다. " 록히드 마틴, RTX(구 레이시온),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스, 노스럽그루먼 등 이른바 ' 빅 파이브' 방산업체들은 9/11 이후 2조 1천억 달러 이상의 국방 계약을 따냈다. 현재 미국 국방 예산의 절반 이상이 민간 계약업체로 흘러간다. 이들에게 전쟁은 사업이고, 평화는 손실이다. 베네수엘라 인근 해상에서 무고한 민 간인들이 " 마약 운반선"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혐의로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동안, 워싱턴의 방산업체 주가는 상승했다. 이 시스템에서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무기는 안보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생산된다. 국방부조차 필요 없다고 판단한 M1 에이브럼스 탱크가 계속 생산된 이유는 국방 계약업체들이 후원하는 싱크 탱크들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전투에 부적합하다고 경고한 연안 전투함(LCS, 일명 '형편없는 작은 배)이 계 속 건조된 것도 정치적 압력 때문이다. 전략이 아니라 로비가 무기 체계를 결정한다.


945명의 로비스트들이 국방 계약업체들을 위해 일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전직 국회의원, 국방부 관료, 심지어 국가 최고 지도자의 비서실장들이 퇴임 후 무기를 팔기 위해 문을 회전하듯 드나든다. 이들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보수를 받는다. 저널리스트 자말카슈끄지가 살해되었을 때, 미 의회는 잠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로비스트들이 무대 뒤에서 움직였고, 같은 주에 의원들의 선거 캠페인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이 모든 것이 뇌물처럼 보이지만, 완벽히 합법이다. 왜냐하면 군산복합체는 워싱턴의 법적, 규제적, 문화적 DNA 속에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화요일의 일상이다. 이 기계는 미디어도, 학계도, 심지어 할리우드도 포획했다. 국방부는 영화 제작자 들에게 군사 장비 사용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대본을 수정하게 한다. 방산업체가 후원하는 싱크탱크들은 더 많은 무기 구매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TV 네트워크는 전쟁 기획자들을 전문가로 출연시킨다. 존스 홉킨스 대학은 탄도 미사일 연구를 위해 연간 10억 달러를 받지만, 캠퍼스의 평범한 학생은 이 사실을 모른다. 연구소가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핵무기 연구소 운영을 돕지만, 학생들은 역시 모른다. 많은 언론사들은 이제 국방부 전담 기자조차 두지 않는다. 그저 국방부 보도자료를 베껴 쓰고, 마지막 32번째 문단에 하텅 같은 비판자의 짧은 인용을 넣어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전체 프레임 자체가 친군사적이다. 세계 어딘가에서무언가가 일어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군사적으로 개입할 때마다 재앙이 벌어지는데도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4년 선거 캠페인에서 "끝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젭 부 시와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며 정치적 자본을 쌓았다. 하지만 이것은 전술일 뿐이다. 트럼프는 필요할 때마다 이 도구를 꺼내 든다. 전쟁과 기업 복지에 지친 유권자층에게 보내는 신호다. 일부는 그가 덜 개입주의적일 것이라 믿고 투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베네수엘라 앞바다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폭격하고,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돕는 무기 지원을 계속하 며, 방산업체들에게 "돈을 주고 규제하지 않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선언했다. 국방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연설에서 무기 생산 속도를 높이고, 독립적인 무기 실험도 생략하겠다고 말했다. 하텅은 경고한다. " 무기에 있어서, 속도는 죽음을 초래한다." 트럼프의 첫 임기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가까워지며 기록적인 양의 무기를 판매했고, 사우디를 "미국의 일자리 창출자"라고 칭송했다. 실제로 방산업체들은 그를 정치적 동맹으로 본다. 그는 가끔 "핵무기가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정책적으로는 핵무기 지출을 늘리고 있다. 그의 발언은 일관성이 없지만, 목적은 명확하다. 전쟁에 회의적인 지지층을 붙잡아두는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실리콘밸리 군산복합체의 부상이다. 팔머러키 같은 인물들은 "2년 안에 중국과 전쟁이 날 것"이라며 더 많은 탄약을 외친다. 이들은 자신들이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양 행동하며, 스스로를 새로운 기술 메시아로 여긴다. 팔란티르는 가자 전쟁 중 이스라엘에서 이사회를 열었고, 폭격을 가속화하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다른 기업들에게 이스라엘 지지를 더 목소리 높여 표현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부통령 JD 밴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성장했고, 피터 틸에게 정치 경력을 빚지고 있다. 그가 부통령으로 지명되자 실리콘밸리에서는 샴페인 코르크가 터졌고, 막대한 자금이 트럼프에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록히드 마틴 같은 거대 기업들을 대체하려 한다. 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돈을 지불할 것이다. 록히드 마틴의 하드웨어, 안두의 소프트웨어. 1조 달러는 곧 뒷거울에 비칠 숫자가 될 것이다.


해외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국내로도 스며든다. 6,500개가 넘는 미국 경찰서가 '1033 프로그램'을 통해 70억 달러 상당의 국방부 잉여 장비를 받았다. 시위대는 이제 군용 소총, 장갑차, 음향 무기, 대반란 작전용으로 개발된 최루탄에 직면한다. 하텅과 프리먼은 "이것은 경찰이 아니라 준군사 조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부메랑'이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자행한 억압과 테러가 이제 미국 공동체로 돌아왔다. 더 충격적인 것은 경제적 정당성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군사 지출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일자리 창출 방식이 되었다. 의료, 교육, 기후 회복력, 청정 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든다. 록히드 마틴 같은 기업들은 노조 일자리를 역사적인 속도로 없애고 있으며, 혁신보다는 자사주 매입에 수십억 달러를 쓴다. 자동화는 곧 더 많은 일자리를 없앨 것이다. 군사주의와 고용을 연결하던 경제적 거래는 해체되고 있다. 하지만 하텅과프리먼은 절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기계는 무너뜨릴 수 있다. 역사는 내부자들이 저항하고, 내부고발자들이 책임을 강제하며, 활동가들이 해로운 프로그램을 중단시킨 순간들로 가득하다. 여론은 압도적 으로 새로운 핵무기, 끝없는 전쟁, 억압적 동맹국에 대한 백지수표 원조를 반대한다. 그들은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를 제 안한다. 빈곤, 인종적 불의, 감시, 기후 파괴, 권위주의 뒤에 군사주의가 통합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운동들의 연대다. 마틴 루터 킹의 비전에 기반한 '가난한 사람들의 캠페인'은 참전 용사, 노동자, 소외된 공동체를 경제적 착취와 전쟁에 맞선 공동 투쟁으로 끌어들인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다. 돈과 군사주의의 연결고리를 끊는 선거 자금 개혁, 싱크탱크의 이해 충돌을 폭로하는 투명성 법안, 부패에 맞서는 내부자를 보호하는 내부고발자 보호법, 끝없는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중심에 두는 연방 지출 우선순위 재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방어를 중심으로 외교정 책을 재구상하는 것이다. 전쟁 기계는 어디에나 있다. 예산, 로비, 대학, 영화, 경찰서, 정치 캠페인, 스포츠 경기, 그리고 우리가 정치, 사회, 문화, 삶을 논할 때 사용하는 언어 속에. 하지만 괴물은 길들여질 수 있다. 방해받고, 재정 지원이 끊기고, 정당성을 잃고, 대체될 수 있다.


미국이 이번 세기에 단 한번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8조 달러를 쓰고, 수십만 명에게 정신적 상처를 입히고, 전 세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안보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질문을 바꿀 때다. "우리는 왜 전쟁을 계속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멈출 것인가?" 정보를 얻고, 대표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내부고 발자를 지지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미디어를 따르고 강화하며, 군사주의에 맞서는 운동을 만들고 참여하고, 끝없는 전쟁이 삶과 자유와 시민권의 대가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전쟁 기계를 멈출 권한과 힘, 그리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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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만난 수업 - 죽음이 가르쳐준 후회 없는 삶
에리카 하야사키 지음, 이은주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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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3년을 기다려야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다. 뉴저지의 한 대학에서 노마 보우 교수가 가르치는 <죽음에 대한 관점>이라는 수업이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이토록 인기 있는 강좌가 될 수 있다니, 처음엔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에리카 하야사키의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이 역설이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깨닫게 된다. 젊음의 한가운데 서 있는 학생들이야 말로 죽음에 대해 가장 절실한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마 교수는 학생들을 호스피스로, 교도소 로, 영안실로, 묘지로 데려간다. 때로는 묘비 사이에서 수업을 진행한다. 그녀가 보기에 묘지는 역사책이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숨 쉬는 곳이었다. 우리 발밑에 놓인, 간과되고 활용되지 않은 교실이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배움의 공간을 외면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변두리로 밀어내고, 애도를 사적인 영역으로 격리시키며, 상실을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노마의 교실은 정반대의 철학 위에 세워져 있다. 죽음을 중심에 두고, 애도를 공유하며, 상실을 통해 배운다. 간호사였던 노마는 죽음을 임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올 때 나타나는 신체의 징후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이 이야기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물음들을 던진다. 어떤 학생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슬픔을 안고 수업에 온다. 또 어떤 학생은 가족의 자살 시도, 약물 중독, 폭력의 경험을 이해하려 애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수업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에리카 하야사키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취재한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그 이후로 수년간 죽음의 무자 비함과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노마를 인터뷰한 후, 그녀는 연구 목적으로 교수를 따라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노마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저자는 반드시 수업에 온전히 참여해야 한다는 것. 관찰자가 아니라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이 조건이 책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하야사키는 학생들과 함께 묘지를 걸었 고, 자신의 추도사를 썼고, 작별 편지를 썼다. 각 장 사이에 삽입된 과제들 예를 들어, " 잃어버린 누군가에게 작별 편지를 쓰세요 ", “당신 자신의 추도사를 작성하세요 " 은 때로는 학생들의 답변으로, 때로는 하야사키 자신의 답변으로 채워진다. 기자와 취재 대상 사이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순간들이다. 노마 보우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 같다.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와 마피아와 연루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결국 할머니 손에 자란 여자. 보통 사람들은 흔돈과 역기능에서 도망치지만, 노마는 오히려 그쪽으로 달려갔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때마다 말이다. 학생들은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감지한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위로와 연민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교재다. 버려졌지만 생존했고, 상처받았지만 치유자가 되었으며,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지만 삶을 가 르치는 사람. 노마의 만트라는 간결하다. 다른 사람을 도우라. 그리고 그녀는 말한 대로 산다. 학생들이 고민을 안고 찾아 오면,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상담하고 돕는다. 그녀의 학생들도 그 본을 따른다. '변화가 되자(Be the Change)'라는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협력하고 함께 일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법을 배운다.

책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읽기 편하지 않다. 약물 남용, 자살 시도, 정신 질환, 폭력에 대해 읽고 싶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케이틀린과 그녀의 남자친구 조나단, 조나단의 형제 조시의 이야기는 정신 질환, 중독, 살인, 자살을 포함한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희망적인 선율을 울린다. 나는 이 불편함이 책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책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회피일 것이다. 하야사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선택했다. 한 특정한 시간의 한 특정한 교실 이야기. 보편적인 죽음의 탐구라기보다는, 매우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험의 기록. 나는 이것이 정직함이라고 본다. 죽음과 삶에 대한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각자의 씨름, 각자의 질문, 각자의 의미 만들기뿐이다. 하야사키는 자신이 그 정답을 찾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한 학기 동안, 그리고 그 후 3년 반 동안 노마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목격한 것을 보여준다. 소설처럼 읽히는 서사 구조, 각 장마다 초점을 바꾸며 여러 이야기 선을 엮어가는 방식은 책에 중독성있게 한다.

'The Death Class'를 읽으며 나는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내 추도사에 무엇이 쓰이기를 바라는가? 내가 작별을 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되돌리기 버튼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해방적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 결국 더 온전하게 사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노마가 가르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음을 관점에 두고(in perspective) 삶을 바라보는 법. 끝이 있기에 지금이 소중하다는 것. 상실을 피할 수 없기에 연결이 의미 있다는 것.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평등하게 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책은 한 학기의 수업에 대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훨씬 더 큰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떻게 고통을 의미로 전환할 것인가? 어떻게 상실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배우며 삶을 더 깊이 살 것인가? 하야 사키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함께 걷는다. 묘지를 거닐고, 과제를 쓰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한다. 이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여정에 동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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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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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음에도 날씨가 있다는 걸, 어떤 날은 몸으로 먼저 안다.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기도 전에, 이미 가슴속 어딘가가 무겁다. 이유를 찾으려 해도 뚜렷한 까닭이 없다. 그냥, 오늘은 흐린 날이다. 안개가 낀 날이거나, 바람이 쏴하게 부는 날이거나, 폭풍이 치는 날이다. 하나영님의 에세이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바로 그런 날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저자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육아와 일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며, 남들과 비교하며 작아지는 순간들을 통과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미술관이었다. 말없이 걸려 있는 그림들 앞에서, 저자는 위로를 받았다. 치유의 처방전을 들고 간 것도, 해답을 구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물감으로 눌러 담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거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혼자 텅 빈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도 건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독한 화면 앞에 서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조용히 울린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였지만 비로소 누군가가 내 곁에 앉아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저자는 호퍼의 그림이 스마트폰으로 거리를 무심히 찍을 때의 구도와 닮았다고 말한다. 의도 없이 포착된 한 순간처럼, 그림 속 풍경은 그들만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힘들었던 날들에 나 역시 호퍼의 그림처럼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바라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고, 그저 나만의 무거운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피카소의 '청색 시기'를 소개하는 대목도 깊이 남는다. 친구의 죽음 이후, 그는 세상을 파란 색조로만 바라보았다. 그 시절의 그림들은 후대의 입체주의만큼 혁명적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기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세게 흔드는 이유는, 거기에 완성된 천재가 아닌 슬픔을 견디고 있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성취보다 고통의 흔적이 때로 더 진한 울림을 남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은 하나같이 순탄하지 않다. 프리다 칼로는 버스 사고로 평생 몸의 고통을 안고 살았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렘브란트는 빛나는 정점 이후 파산과 상실을 겪었고, 이중섭은 가족과 떨어져 가난과 그리움 속에서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고통이 예술가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시련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내린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다를 뿐이다. 젠틸레스키의 이야기는 특히 강렬하게 남는다. 그가 그린 유디트는 수동적인 영웅이 아니다. 두 손으로 단호하게 칼을 쥔 여인은 무언가를 단죄하고 있다. 저자는 그 그림 속 홀로페르네스가 실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징벌할 수 없었던 것을 캔버스 위에서 완성했다는 해석.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형태로 만들어내는 힘. 저자 역시 자신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선택했다. 칼로가 그림으로 고통을 풀어냈듯, 그는 문장으로 묵은 감정을 비워낸다. 베르트 모리조의 챕터를 읽으며 나는 오래된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재능이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던 그의 삶이, 먼 옛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리조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지지해주는 사람 곁에서 예술을 이어갔다. 저자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소중함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앙리 루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챕터처럼 느껴진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주말에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 마흔이 넘어 미술관 모사 허가증을 받고, 마흔아홉에 은퇴하고서야 전업 작가가 된 사람.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단체도 결성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루소의 그림은 투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 투박함 속에 진정성이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 기죽지 않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 용기가 있었다. 저자 역시 마흔을 이야기하며 묘한 안도감을 고백한다. 이제는 요절이라는 단어를 붙일 나이도 아니고, 뭔가를 이루기에 놀라울 만큼 이른 나이도 아닌 마흔.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는 위로가 된다고. 그 고백이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마네가 주류의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듯, 우리도 세상의 속도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이 책이 다른 미술 에세이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그림 앞에서 해설자가 아닌 동행자로 서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먼저 꺼내놓고, 그 옆에 화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세운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타인의 고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샤갈의 태양이 떠오르는 그림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모든 트라우마가 시간이 흐른다고 흐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나의 삶에도 밝은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새싹 하나, 작은 불씨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살다 보면, 아픈 기억도 언젠가 지나간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저자는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그 고통과 나란히 앉아 있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진실한 위로다. 조선 왕실의 십장생도 병풍 이야기로 끝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장에는 오래 살기를,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학, 사슴,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 그 소박하고도 애틋한 소망들 앞에서, 나 역시 비슷한 것을 원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삶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안녕하게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책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비유한다.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급히 들이키는 것이 아니라, 향을 음미하고 온기를 느끼며 식기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그림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그냥 오늘 마음이 흐리다면, 이 책을 들고 조용한 곳에 앉으면 된다. 거기에 나과 비슷한 날씨를 통과했던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비가 와도 괜찮다. 폭풍이 몰아쳐도 언젠가는 그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잠시 숨을 수 있는 그림 속이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 주름진 눈빛 앞에서, 칼로의 자화상이 품은 꽃과 상처 앞에서, 루소가 주말마다 혼자 그려낸 정글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조금씩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촛불처럼 흔들렸던 저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편지처럼 시작된 이 책은, 결국 흔들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한 위로의 말이 된다. 예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울어도 되고, 웃어도 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어도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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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 폭력이 펼쳐지는 시대마다 누가 숨은 이득을 챙기는가
던컨 웰던 지음, 윤종은 옮김 / 윌북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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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오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전쟁은 언제나 두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하나는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서류가 가득한 회계실이다. 역사는 대개 전자만 기억한다. 영웅의 이름과 결전의 날짜, 깃발이 꽂힌 언덕의 이름을 기록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패를 결정한 것은 종종 후자였다. 군량미가 얼마나 남았는지, 국채를 누가 사주는지, 세금을 얼마나 걷을 수 있는지가 전쟁의 운명을 갈랐다.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인 던컨 웰던은 그의 저작에서 이 오래된 진실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는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전쟁의 뿌리가 보인다고 주장한다. 역사 속의 전쟁은 가시적인 총칼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더 깊은 흔적을 남긴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도 했다. 돈을 둘러싼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역사속의 바이킹의 습격. 우리는 뿔 달린 투구와 용머리 뱃머리를 떠올리지만, 그 약탈은 냉정하게 보면 경제적 행위였다. 9세기 유럽은 생산성이 낮았고, 잉여를 축적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직접 생산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경우가 많았다. 폭력은 일종의 사업 모델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약탈로 시작한 세력들이 일정 규모에 이르면, 계속 약탈하는 것보다 정착하여 세금을 걷는 편이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민을 죽이면 그 해의 곡식을 빼앗을 수 있지만, 살려두고 보호해주면 매년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렇게 약탈자가 보호자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국가라는 제도가 탄생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명제인 '국가가 전쟁을 만들고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이 역설적 진실을 담고 있다. 전쟁 자금 조달의 필요성은 국가 제도 전반을 혁신했다. 잉글랜드 은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1694년 설립된 이 기관의 창립 목적은 물가 안정이나 금융 시스템 감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이 중앙은행을 낳았고, 중앙은행은 근대 금융 시스템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채, 지폐, 복식부기 등 근대 금융의 핵심 도구들은 상당 부분 전쟁의 필요에서 발명되거나 정교화되었다. 죽음을 위한 회계가 삶을 위한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이전의 전쟁에서 국민총생산의 10~15%를 군비에 쏟아붓는 것은 대단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비율을 50%까지 끌어올렸다. 경제의 절반이 전쟁을 위해 돌아가는, 이른바 총력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공장이 전장만큼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무너진 것은 전선의 패배 이전에 경제의 붕괴였다. 농촌 인구의 85%를 차지하던 러시아는 전쟁이 길어지자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군수품 생산을 위해 공장들이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자, 농민들은 팔 물건이 없어진 도시에 식량을 팔 이유가 없어졌다. 경제적 교환의 사슬이 끊어지며 도시는 굶주렸고, 평화와 빵을 외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막혀 무너진 것이다. 반면 영국은 역설적이게도 식량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음에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견뎌냈다. 그 비결은 유연성에 있었다. 식량을 스스로 기르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농업 인구가 적다는 뜻이었다. 영국은 그 인력을 공장과 군대로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었다. 해상 수송로만 지킨다면, 세계의 자원이 곧 영국의 자원이었다. 자급자족이 강점이 아니라 개방과 연결이 강점이 되는, 경제적 전쟁의 역설이었다.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선을 열었다. 바로 경제 봉쇄와 자원 차단의 전쟁이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향한 해상 봉쇄를 실시하며 흥미로운 무기를 동원했다. 회계사들이었다. 네덜란드처럼 중립국을 통한 우회 수입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은 해당 국가의 전전 수입 통계를 분석하여 그 이상의 물자가 들어오면 독일로 흘러간다고 간주하고 차단했다. 장부와 통계표가 무기가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략 폭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미군은 독일의 합성 연료 공장, 볼베어링 공장 등 전쟁 경제의 목줄을 끊으면 전쟁이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를 배반했다. 현대 경제는 한 고리가 끊어지면 전체가 붕괴하는 사슬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연결로 얽힌 그물망이었다. 독일은 대체재를 찾고, 생산 공정을 바꾸고, 비축분을 소진하며 버텼다. 경제는 폭격보다 질겼다. 이 교훈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 제재는 그 논리적 계승자다. 러시아를 향한 서방의 제재가 전쟁을 빠르게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대 경제의 그 질긴 그물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물망을 완전히 잘라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죽는다.


전쟁이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의 또 다른 얼굴은, 전쟁이 경제적 오판에 의해 시작된다는 것이다. 1909년 저널리스트 노먼 앤젤은 '거대한 환상'에서 국가들이 서로 너무나 긴밀하게 경제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전쟁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 분석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5년 후 세계는 4년간의 대학살을 경험했다. 역사는 경제적 이익이 전쟁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거듭 증명해왔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처음에는 황금을 향한 욕망으로 시작되었지만, 거대한 은 유입이 오히려 본국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오고 산업을 피폐화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부를 위한 전쟁이 부를 갉아먹었다. 냉전이 끝난 후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학자들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지만, 21세기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군비 분야에서도 경제적 유인이 분석을 왜곡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냉전 시절 미국의 각 군은 소련의 위협을 자신들의 관할 영역에서 가장 크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이 강해야 예산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도 서방 군사 전문가들이 러시아군을 과대평가했던 것 역시, 수십 년간 러시아를 강한 적으로 규정해온 제도적 유인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에 대한 분석 자체가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결국 돈의 문제인가? 웰던 자신도 인정하듯, 7점짜리 대답이 가장 정직하다. 경제는 전쟁의 결정적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경제적 논리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물론 에너지 자원, 공업 지대, 흑해 접근권 같은 경제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푸틴의 행동에는 구소련 제국의 영광 회복이라는 역사적 강박과, 슬라브 민족의 통합이라는 문명적 집착이 깔려 있다. 그것은 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라 역사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없었다면 20세기는 어떻게 달랐을까? 이 가정적 질문은 개인과 광기와 이념이 경제적 구조만큼이나 역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경제는 전쟁의 토양이지만, 씨앗을 뿌리는 것은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 돈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환율 조작과 관세 전쟁, 기술 수출 통제와 공급망 재편, 에너지 가격 무기화와 금융 제재. 총성은 없지만 그 피해는 실제적이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언제, 어떻게 가시적인 폭력으로 전환되는지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 전환점에는 언제나 경제적 논리와 인간적 감정이 뒤엉킨 복잡한 방정식이 있었다. 그 방정식을 읽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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