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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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음에도 날씨가 있다는 걸, 어떤 날은 몸으로 먼저 안다.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기도 전에, 이미 가슴속 어딘가가 무겁다. 이유를 찾으려 해도 뚜렷한 까닭이 없다. 그냥, 오늘은 흐린 날이다. 안개가 낀 날이거나, 바람이 쏴하게 부는 날이거나, 폭풍이 치는 날이다. 하나영님의 에세이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바로 그런 날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저자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육아와 일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며, 남들과 비교하며 작아지는 순간들을 통과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미술관이었다. 말없이 걸려 있는 그림들 앞에서, 저자는 위로를 받았다. 치유의 처방전을 들고 간 것도, 해답을 구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물감으로 눌러 담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거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혼자 텅 빈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도 건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독한 화면 앞에 서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조용히 울린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였지만 비로소 누군가가 내 곁에 앉아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저자는 호퍼의 그림이 스마트폰으로 거리를 무심히 찍을 때의 구도와 닮았다고 말한다. 의도 없이 포착된 한 순간처럼, 그림 속 풍경은 그들만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힘들었던 날들에 나 역시 호퍼의 그림처럼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바라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고, 그저 나만의 무거운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피카소의 '청색 시기'를 소개하는 대목도 깊이 남는다. 친구의 죽음 이후, 그는 세상을 파란 색조로만 바라보았다. 그 시절의 그림들은 후대의 입체주의만큼 혁명적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기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세게 흔드는 이유는, 거기에 완성된 천재가 아닌 슬픔을 견디고 있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성취보다 고통의 흔적이 때로 더 진한 울림을 남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은 하나같이 순탄하지 않다. 프리다 칼로는 버스 사고로 평생 몸의 고통을 안고 살았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렘브란트는 빛나는 정점 이후 파산과 상실을 겪었고, 이중섭은 가족과 떨어져 가난과 그리움 속에서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고통이 예술가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시련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내린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다를 뿐이다. 젠틸레스키의 이야기는 특히 강렬하게 남는다. 그가 그린 유디트는 수동적인 영웅이 아니다. 두 손으로 단호하게 칼을 쥔 여인은 무언가를 단죄하고 있다. 저자는 그 그림 속 홀로페르네스가 실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징벌할 수 없었던 것을 캔버스 위에서 완성했다는 해석.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형태로 만들어내는 힘. 저자 역시 자신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선택했다. 칼로가 그림으로 고통을 풀어냈듯, 그는 문장으로 묵은 감정을 비워낸다. 베르트 모리조의 챕터를 읽으며 나는 오래된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재능이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던 그의 삶이, 먼 옛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리조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지지해주는 사람 곁에서 예술을 이어갔다. 저자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소중함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앙리 루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챕터처럼 느껴진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주말에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 마흔이 넘어 미술관 모사 허가증을 받고, 마흔아홉에 은퇴하고서야 전업 작가가 된 사람.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단체도 결성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루소의 그림은 투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 투박함 속에 진정성이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 기죽지 않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 용기가 있었다. 저자 역시 마흔을 이야기하며 묘한 안도감을 고백한다. 이제는 요절이라는 단어를 붙일 나이도 아니고, 뭔가를 이루기에 놀라울 만큼 이른 나이도 아닌 마흔.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는 위로가 된다고. 그 고백이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마네가 주류의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듯, 우리도 세상의 속도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이 책이 다른 미술 에세이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그림 앞에서 해설자가 아닌 동행자로 서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먼저 꺼내놓고, 그 옆에 화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세운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타인의 고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샤갈의 태양이 떠오르는 그림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모든 트라우마가 시간이 흐른다고 흐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나의 삶에도 밝은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새싹 하나, 작은 불씨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살다 보면, 아픈 기억도 언젠가 지나간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저자는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그 고통과 나란히 앉아 있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진실한 위로다. 조선 왕실의 십장생도 병풍 이야기로 끝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장에는 오래 살기를,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학, 사슴,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 그 소박하고도 애틋한 소망들 앞에서, 나 역시 비슷한 것을 원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삶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안녕하게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책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비유한다.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급히 들이키는 것이 아니라, 향을 음미하고 온기를 느끼며 식기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그림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그냥 오늘 마음이 흐리다면, 이 책을 들고 조용한 곳에 앉으면 된다. 거기에 나과 비슷한 날씨를 통과했던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비가 와도 괜찮다. 폭풍이 몰아쳐도 언젠가는 그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잠시 숨을 수 있는 그림 속이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 주름진 눈빛 앞에서, 칼로의 자화상이 품은 꽃과 상처 앞에서, 루소가 주말마다 혼자 그려낸 정글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조금씩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촛불처럼 흔들렸던 저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편지처럼 시작된 이 책은, 결국 흔들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한 위로의 말이 된다. 예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울어도 되고, 웃어도 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어도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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