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챕터처럼 느껴진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주말에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 마흔이 넘어 미술관 모사 허가증을 받고, 마흔아홉에 은퇴하고서야 전업 작가가 된 사람.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단체도 결성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루소의 그림은 투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 투박함 속에 진정성이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 기죽지 않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 용기가 있었다. 저자 역시 마흔을 이야기하며 묘한 안도감을 고백한다. 이제는 요절이라는 단어를 붙일 나이도 아니고, 뭔가를 이루기에 놀라울 만큼 이른 나이도 아닌 마흔.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는 위로가 된다고. 그 고백이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마네가 주류의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듯, 우리도 세상의 속도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이 책이 다른 미술 에세이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그림 앞에서 해설자가 아닌 동행자로 서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먼저 꺼내놓고, 그 옆에 화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세운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타인의 고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샤갈의 태양이 떠오르는 그림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모든 트라우마가 시간이 흐른다고 흐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나의 삶에도 밝은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새싹 하나, 작은 불씨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살다 보면, 아픈 기억도 언젠가 지나간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저자는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그 고통과 나란히 앉아 있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진실한 위로다. 조선 왕실의 십장생도 병풍 이야기로 끝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장에는 오래 살기를,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학, 사슴,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 그 소박하고도 애틋한 소망들 앞에서, 나 역시 비슷한 것을 원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삶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안녕하게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