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바이킹의 습격. 우리는 뿔 달린 투구와 용머리 뱃머리를 떠올리지만, 그 약탈은 냉정하게 보면 경제적 행위였다. 9세기 유럽은 생산성이 낮았고, 잉여를 축적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직접 생산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경우가 많았다. 폭력은 일종의 사업 모델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약탈로 시작한 세력들이 일정 규모에 이르면, 계속 약탈하는 것보다 정착하여 세금을 걷는 편이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민을 죽이면 그 해의 곡식을 빼앗을 수 있지만, 살려두고 보호해주면 매년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렇게 약탈자가 보호자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국가라는 제도가 탄생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명제인 '국가가 전쟁을 만들고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이 역설적 진실을 담고 있다. 전쟁 자금 조달의 필요성은 국가 제도 전반을 혁신했다. 잉글랜드 은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1694년 설립된 이 기관의 창립 목적은 물가 안정이나 금융 시스템 감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이 중앙은행을 낳았고, 중앙은행은 근대 금융 시스템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채, 지폐, 복식부기 등 근대 금융의 핵심 도구들은 상당 부분 전쟁의 필요에서 발명되거나 정교화되었다. 죽음을 위한 회계가 삶을 위한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이전의 전쟁에서 국민총생산의 10~15%를 군비에 쏟아붓는 것은 대단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비율을 50%까지 끌어올렸다. 경제의 절반이 전쟁을 위해 돌아가는, 이른바 총력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공장이 전장만큼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무너진 것은 전선의 패배 이전에 경제의 붕괴였다. 농촌 인구의 85%를 차지하던 러시아는 전쟁이 길어지자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군수품 생산을 위해 공장들이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자, 농민들은 팔 물건이 없어진 도시에 식량을 팔 이유가 없어졌다. 경제적 교환의 사슬이 끊어지며 도시는 굶주렸고, 평화와 빵을 외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막혀 무너진 것이다. 반면 영국은 역설적이게도 식량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음에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견뎌냈다. 그 비결은 유연성에 있었다. 식량을 스스로 기르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농업 인구가 적다는 뜻이었다. 영국은 그 인력을 공장과 군대로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었다. 해상 수송로만 지킨다면, 세계의 자원이 곧 영국의 자원이었다. 자급자족이 강점이 아니라 개방과 연결이 강점이 되는, 경제적 전쟁의 역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