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 숏폼, 데이팅 앱, 초가공식품은 나의 뇌를 어떻게 점령했는가
니클라스 브렌보르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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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있지만, 어느 순간 손은 과자 봉지를 향해 뻗어 있다. 영화가 끝 날 때쯤 봉지는 비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 행동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흔히 이 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냥 먹고 싶었던 거야. 내 선택이었어."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짜 우리의 선택이었을까? 덴마크의 생명공학 연구자 Nicklas Brendborg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충동들, 즉 배 가 고프지 않아도 손이 가는 과자, 특별한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스마트폰, 끝없이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 스크롤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의지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것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을 정밀하 게 조준한 산업의 설계물이며, 우리는 그 설계 안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의 기원은 인간이 아닌 새에게서 출발한다. 네덜란드의 과학자 Nikolaas Tinbergen은 조류 실험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장 안에 자신의 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색깔의 가짜 알을 넣어두었을 때, 새들은 예외 없이 가짜 알 위에 앉으려 했다. 이는 새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더 크고 선명한 알일수록 암컷의 건강 상태가 좋고 풍부한 먹이를 섭취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진화는 그 방향으로 본능을 설계해 두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연 속에는 새 자신의 몸집보다 큰 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진화는 그 욕구에 어떠한 상한선도 설정해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Brendborg가 초자극(superstimuli)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자극보다 더 크고, 더 강렬하고, 더 집중된 형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극들. 그것들은 우리의 본능이 원래 반응하도록 설계된 신호를 극단적으로 모방하여, 뇌가 저항하기 어려운 반응을 끌어낸다.

초자극은 식품 산업에서 그치지 않는다. Brendborg는 음식, 기술, 오락 산업이 모두 동일한 논리, 즉 인간 뇌의 보상 회로를 활성화하여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 위에 설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식품 회사들은 소비자를 뇌 스캐너에 넣고 어떤 맛의 조합이 보상 중추를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지 실험한다. 포화 상태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레시피를 조정하고, 짠맛과 단맛과 지방의 비율을 정교하게 계산한다. 제품은 우리가 충분히 먹었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다. 이는 상술이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을 겨냥한 정밀 공학이다. 영국 성인의 3분의 2가 과체중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이 설계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앱의 밝은 색상은 자연에서 잘 익은 열매를 가리키던 시각적 신호를 모방한 것이다. 알림음과 빨간 뱃지는 즉각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 신호로 기능하며, '좋아요'와 조회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증폭시킨다. 한두 명의 지인에게 칭찬받던 경험이 수백 명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경험으로 확장되고, 뇌는 그 자극을 실제 사회적 유대와 구분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최적화된다는 점이다. 수십억 개의 사용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거대 테크 기업들은 끊임없이 알고리즘을 수정하며 우리가 화면 앞에 더 오래 머물게 만든다. Brendborg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천억의 자본을 등에 업은 극도로 지능적인 사람들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의 의지력을 탓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전제이다.

Brendborg가 제시하는 또 다른 핵심 개념은 둔감화(desensitisation)다. 특정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우리의 감각은 점점 그 자극에 무뎌진다. 더 자극적인 맛을 원하게 되고, 더 강렬한 자극이 없으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에 산업은 더 강한 자극으로 응답하고, 인간은 또다시 둔감해진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의 구조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 록 현실은 점점 평범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맛은 심심해지고, 조용한 시간은 불안해지며,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덜 흥미롭게 보인다. 주의력, 휴식, 관계는 스크린과 경쟁해야 하고, 현실의 사회적 유대는 소셜 미디어의 즉각적인 반응 과 경쟁해야 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장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사람들을 보여주며,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 을 그들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이것이 통제라는 착각이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비교의 기준 자체가 이 미 조작되어 있다. 우리가 욕망한다고 느끼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원하도록 설계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Brendborg는 금욕이나 강박적인 절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특정 음식을 금지하거나 스마트폰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구조적 접근을 권한다. 즉, 의지력 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노출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식단과 관련해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식사를 더 단 조롭게 만들 것을 제안한다. 다양성은 과식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이며, 음식의 자극이 줄어들수록 뇌는 더 빠르게 만족 신 호를 보낸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3개월간 설탕 섭취를 줄인 실험 참가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같은 디저트를 40퍼센트 더 달게 느꼈다. 초자극에서 멀어질수록, 자연적인 자극이 다시 충분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감화는 가역적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함의 복권이다. 지루함은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각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잠깐의 여백조차 채우려 하고, 침묵이 오면 곧바로 화면을 켠다. 하지만 Brendborg는 바로 그 지 루함이야말로 뇌를 재설정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채우지 않는 공간이 우리를 다시 현실과 연결시킨다. 통제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책이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중 동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이 진짜 나의 것인지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것과, 먹도록 설계되 어 있어서 먹는 것은 다르다. 연결되고 싶어서 소셜 미디어를 여는 것과, 열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설계를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설계를 이해하는 순간, 최소한의 여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여백 속 에서 비로소 진짜 선택이 시작된다. 통제는 강철 같은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던 착각을 인식하는 것에서 조용히 되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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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근력
짐 머피 지음, 지여울 옮김 / 윌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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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근력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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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근력
짐 머피 지음, 지여울 옮김 / 윌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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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리더십을 외부에서 찾는다.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권한, 더 뛰어난 전략. 성과 지표를 달성하고, 팀을 이끌며, 조직을 성장시키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많은 리더들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한 가지 공통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고 탁월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전략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다른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1월, NFL 와일드카드 경기 도중 필라델피아 이 글스의 와이드리시버 AJ 브라운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경기 중에. 그 책은 짐 머피(Jim Murphy)의 <Inner Excellence>였다. 그 한 장면은 엄청난 화제거리였다. 하나의 메시지였다. 진정한 탁월함은 경기장 밖, 즉 내면에서부터 준비된다는 것이다. 책은 이 메시지에서 출발한다. 내면 근력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이 현대의 리더 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키워갈 수 있는가.

'근력'이라는 단어는 본래 신체적인 힘을 뜻한다. 근육이 저항을 이겨내는 힘.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저항은 신체 적인 것만이 아니다. 실패의 두려움, 타인의 시선, 불확실한 미래, 끊임없이 속삭이는 자기 의심의 목소리. 이 모든 심리적 저항을 이겨내는 힘, 그것이 바로 내면 근력이다. 내면 근력은 긍정적 사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될 거야'라고 되뇌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내면 근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그 현실에 압도되지 않는 능력이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다. 폭풍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 풍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능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짐 머피는 이를 '탁월한 수행 능력'의 핵심으로 본다. 외부 조 건이 완벽하게 갖춰졌을 때만 최선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오늘 컨디션이 최악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면 근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물이다.

내면 근력을 이야기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나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본래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감정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 낭떠러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 이런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지혜다. 문제는 우리의 뇌가 물리적 위협과 심리적 위협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회의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에 뛰어드는 것, 진심을 담아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 이런 순간에도 뇌 는 동일한 경고 신호를 보낸다. "위험하다. 멈춰라."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익숙한 것, 예측 가능한 것,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것. 이 길은 분명히 편안하다. 그러나 편안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성장의 포기, 가능성의 축소,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이게 전부인가'라는 공허함이다. 머피는 두려움의 본질을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에서 찾는다. 이것은 이기심과는 다르다. 지나치게 자신의 실패, 자신의 평판, 자신의 고통에 집중한 나머지, 더 넓은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되는 상태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 틀리면 어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좁은 시야 속에서 두려움은 더욱 크게 자란다. 반면, 자신의 시선을 더 큰 무언가로 돌릴 때, 두려움은 조금씩 그 힘을 잃는다. 이것이 역설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나는 더 강해진다. 내면 근력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두려 움보다 더 강한 무언가를 내면에 키우는 것이다.

현대의 삶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스마트폰 알림, 끊임없는 업무 메시지, 뉴스 피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의 소음. 머피는 이 내면의 소음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내면의 비평가(Inner Critic)다.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번에도 실패했잖아." 이 목소리는 우리가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가장 크게 들린다. 결정을 앞두고, 발표를 앞두고,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이 목소리는 과거의 실패와 상처로 만들어진 경고 시스템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우리를 정의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두 번째는 산만한 마음(Monkey Mind)이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쉼없이 뛰어다니듯,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대화, 지금 이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분산된 주의력은 리더십의 질을 떨어뜨리고, 관계의 깊이를 얕게 만들며, 판단 력을 흐린다. 세 번째는 기만하는 마음(Trickster)이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일 하면 되잖아. 지금 상황이 적절하지 않아." 이 목소리는 교묘하게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회피가 있다. 어렵고 불편한 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충동이 이성적인 언어로 포장된 것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의 소음에 공통적으로 효과적인 처방은 알아차림(awareness)이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 "아, 지금 내 내면의 비평가가 말하고 있구나.""이것은 원숭이 마음의 소음이야."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목소리와 나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나는 그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비로소 선택이 가능해진다. 내면 근력은 이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 의 그 찰나의 공간을 넓히는 능력.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의 극한 상황 속에서 발견한 그 자유.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 속에 우리의 성장과 자유가 있다."

내면 근력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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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사이드 - 손해 보지 않고 똑똑하게 살아내는 행동경제학 수업
정태성 지음 / 더블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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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주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뉴스를 챙겨보고, 재무제표를 훑어보고,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늘 비슷했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올랐다. 처음엔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엔 시장이 이상하다고 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문제가 시장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닐까. <히든 사이드>는 바로 그 의심에 정확하게 답을 건네는 책이다. 저자 정태성은 책을 통해 우리가 반복적으로 틀린 선택을 하는 이유가 정보의 부족이나 지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원인은 훨씬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태생적으로 지닌 인지의 구조,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동하는 수많은 편향과 심리 패턴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의 판단을 실제로 이끄는 것은 눈에 보이는 논리가 아니라 숨겨진 심리의 이면, 바로 '히든 사이드'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고, 따져보고, 결론을 내린다고 느낀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그 믿음에 조용히 균열을 낸다. 실제로 인간의 의사결정은 논리보다 감정이, 분석보다 직관이 훨씬 먼저 작동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감정과 직관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생존에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복잡한 경제 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우리를 함정으로 이끄는 경우가 더 많다.

책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두드린 개념은 '확증 편향'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종목이 오를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 이후에는 오를 것이라는 뉴스만 눈에 들어오고, 위험 신호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의도적인 외면이 아니다.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래서 확신은 강해지고, 판단은 점점 좁아지고, 결국 손실은 깊어진다. 이와 함께 손실 회피 본능은 투자에서 가 장 치명적인 심리 중 하나다. 인간은 100만 원을 버는 기쁨보다 100만 원을 잃는 고통을 약 두 배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이 비대칭적인 감각이 우리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를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미 손실이 난 종목을 팔지 못하는 것, ‘물타기'를 반복하는 것, 손해를 확정짓는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워 더 큰 손실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 등 이 모든 행동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우리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문제는 그 반응이 금융 시장에서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책이 투자 심리 가이드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같은 원리를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정치적 뉴스를 접할 때, 사람을 판단할 때,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조차 히든 사이드는 작동하고 있다.

마트에서 9,900원짜리 상품을 보며 '싸다'고 느끼는 것, 한정 수량이라는 문구 앞에서 갑자기 손이 빨라지는 것, 이것은 단순한 소비 행태가 아니다. '기준점 효과'와 '희소성 편향'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정교하게 작동한 결과다.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감각에 의해 가치를 인식한다. 그리고 마케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가짜 뉴스가 사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이유, 혐오와 갈등이 이성 적 토론보다 더 쉽게 확산되는 이유, 그 답 역시 같은 곳에 있다. 인간은 사실에 반응하기 전에 감정에 먼저 반응한다. 분노와 두려움은 공유를 자극하고, 공유는 확산을 낳고, 확산은 사실처럼 보이는 거짓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의도치 않게 조작의 일부가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 모든 편향은 '나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논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심지어 행동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이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지식이 면역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인식이 잠시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줄 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멈춤'이다. 어떤 선택의 순간, "지금 내가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능력. 군중이 환호할 때 거리를 두고, 공포가 퍼질 때 냉정을 유지하고, 확신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반대 증거를 찾아보는 습관. 이것이 책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다. 우리는 지금 AI와 알고리즘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는 내가 좋아할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쇼핑 앱은 내가 살 것 같은 물건을 먼저 보여주며, 뉴스 피드는 내 성 향에 맞는 정보만 걸러서 제공한다. 이 구조 속에서 확증 편향은 더욱 강화되고, 우리의 세계관은 점점 좁은 거품 안에 갇힌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판단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하게 설계된 유도 안에 놓이게 된다. 히든 사이드는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책이다. 단순히 심리학 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직시하고, 그 앎을 바탕으로 조금 더 의식적으로 살아가라는 권유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과거의 실패들이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였다. 그건 운이 나빠서도, 시장이 나빠서도 아니었다. 내 안의 패턴이 반복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패턴을 안다면, 이제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논리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는다. <히든 사이드>는 그 구조를 보는 눈을 건네주는 책이다. 똑똑하게 살아내는 것은 더 많이 아는 것 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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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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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파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베끼는 일이라 생각했다. 종이 위에 남의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손목이나 조금 피로하겠거니 하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릴케의 첫 행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무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손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받침 하나, 쉼표 하나에서 멈추게 된다. 활자로 읽을 때는 눈이 미끄러지듯 지나쳐 버렸던 것들이, 손으로 쓸 때는 발목을 잡는다. 필사를 시작한 건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계절의 끝 무렵, 오래 묵혀두었던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마침 읽고 있던 릴케의 시집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첫 구절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그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목적도, 의지도 아닌 그냥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그래요,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나를 잃어가며
내 손에서조차 나를 놓습니다

— 릴케, 사랑에 빠진 여인

쓰다가 한참을 멈췄다. 내 손에서조차 나를 놓는다. 손으로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내 손에서 무엇을 쥐고 있는 것인지, 또는 놓아버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릴케의 말은 그렇게 작동한다. 읽는 사람의 내부에 들어와, 본래 그 사람의 것이었던 무언가를 건드린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잊고 있던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릴케는 자신의 묘비에 짧은 시 하나를 남겨달라고 유언했다 한다.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 그의 무덤 앞에 서면 그 말을 직접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장미와 모순과 눈꺼풀에 관한 말. 나는 아직 그 무덤 앞에 가본 적이 없지만, 필사하는 동안 여러 번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말들을 내 손이 다시 한 번 세상에 쓴다는 것이 묘하게 엄숙하고, 또 묘하게 가까웠다. 죽음 직전까지도 그는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백혈병으로 떠난 그가 장미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 만큼, 그의 삶과 장미는 하나의 이미지로 엉켜 있다. 필사하면서 나는 자꾸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꽃을 꺾으려 손을 뻗는 시인의 손목. 붉어지는 피부. 그리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눈빛.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하려다 상처를 입는 일. 그것이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사를 마친 노트를 덮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지식이나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말의 무게를 손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시인이 고른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침묵이 담겨 있는지를, 읽어서는 알 수 없고 써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 릴케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아름다움과 죽음을 노래했지만, 그것이 추상적인 주제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언어가 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손으로 받아 쓰는 동안, 나도 잠시 그 통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오늘도 노트를 편다. 펜을 고른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한 줄을 찾는다.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내가 필요로 하는 한 줄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 나는 릴케가 백 년 전 어딘가에서 손수 쓴 것처럼, 조금 천천히, 한 글자씩 받아 적는다. 그 느린 시간이 하루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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