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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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밟고 지나친다. 돌멩이, 낙엽, 그리고 이름도 모를 풀 한 포기. 아무도 멈추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밟히는 것들은 무엇을 느낄까? 아니, 더 정확히는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것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민들레는 참 이상한 식물이다. 꽃이 피면 줄기를 곧게 세우고, 꽃이 지면 땅으로 몸을 눕히고, 씨앗이 여물면 다시 일어나 홀씨를 바람에 내어준다. 어릴 적 우리는 이 홀씨를 입으로 후 불며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민들레가 왜 한 번은 눕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밝혀진 것도, 어떤 설명에 따르면, 민들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막 피어난 주변 꽃들이 벌과 나비의 눈에 더 잘 띄도록 비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신이 낮아짐으로써 다른 생명이 빛날 수 있도록.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췄다. 사람이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종종 패배라 부른다. 물러서는 것을 나약함이라 여기고, 양보를 손해라 계산한다. 하지만 민들레는 그 순간을 다르게 쓴다. 눕는 것이 곧 배려이고, 낮아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이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언제나 꼿꼿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듯이.

잡초는 강하다고 배웠다. 밟혀도 일어서고, 뽑혀도 다시 나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나는 잡초처럼 살겠다"고. 그런데 식물학 교과서는 뜻밖의 말을 한다—잡초는 강하지 않다고. 오히려 경쟁에 약한 식물이라고. 잡초는 강한 식물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자리, 자꾸 밟히고 훼손되는 척박한 곳에서 살아간다. 그 말인즉슨, 잡초는 이기는 전략 대신 비켜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포기한 대신 아무도 탐내지 않는 자리를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버티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잡초는 최소한 자신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밟히든, 꺾이든, 뽑히든) 씨앗을 남기는 것, 그 하나의 목표를 절대로 놓지 않는다. 화려하게 일어서는 대신, 엎드린 채로 꽃을 피운다. 그게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생명이란 결국 그 작은 완고함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주 '어떻게 보이느냐'에 에너지를 쏟는다. 쓰러졌다 일어서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역경을 이겨냈다는 서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는 잊어버릴 때가 많다. 잡초는 그 점에서 훨씬 현명하다. 엎드린 채로 피운 꽃 한 송이가, 화려하게 일어서다 결국 씨앗을 맺지 못한 식물보다 훨씬 더 오래 이 땅에 남는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했다. 어릴 때 풀밭에서 그것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있다. 찾으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고, 찾지 못하면 오늘의 운이 나쁜 것 같았다. 그런데 네잎클로버가 자주 발견되는 곳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밟고 지나가는 자리라는 사실은, 어쩐지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린다. 상처 때문에 생겨난 것이 행운이라고 불린다.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잎의 원기가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하나가 둘로 나뉘어 네 개의 잎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행운이란, 완벽한 조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틈에서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운이 좋다'고 부르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무언가 어긋났던 순간 뒤에 찾아온다. 계획이 틀어지고, 관계가 어그러지고, 믿었던 것이 흔들렸을 때—그 틈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리고, 스스로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한다. 네잎클로버가 그것을 알고 밟히는 곳을 택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많이 밟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피어난다. 행운은 고요하고 안전한 풀밭보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길 위에 더 자주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봄망초라는 꽃이 있다. 꽃봉오리일 때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 있다가, 꽃이 피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 의기소침하게 웅크리고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하고 일어서는 것처럼. 나는 이 식물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빨리 털고 일어나라고,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하지만 봄망초는 그 자세로 꽃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것이 포기가 아니라, 피어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떤 침묵은 준비이고, 어떤 움츠림은 도약이다.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무너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봄망초처럼, 안으로 무언가를 모으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식물을 들여다보는 일이 결국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타민들레는 눕는 법을 알고, 잡초는 엎드려 꽃을 피우고, 네잎클로버는 상처에서 피어나고, 봄망초는 고개를 숙인 채 꽃을 준비한다. 이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살아남는 것이 언제나 씩씩하게 서 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눕는 것이, 비켜서는 것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더 깊은 생의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 앞에서 발걸음을 한 번 멈춰보고 싶다. 저 작은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왔는지를,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 어쩐지, 나의 엎드림도 나의 침묵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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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와의 안전 이별 - 보복 없이 손해 없이 나르시시스트와 멀어지는 법
레베카 정 지음, 고영훈 옮김 / 생각정거장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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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사람을 만난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말도 잘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으며, 나를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 내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 내 말이 무시당하는 경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 주위를 맴도는 위성이 되어 있고, 내 삶의 중심은 온통 그 사람의 감정을 맞추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에는 깊고 어두운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에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한다. 화려한 성공을 과시하거나, 타인을 조종하고 지배함으로써 잠시나마 그 공허함을 달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구멍이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빼앗아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지배해도, 그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가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항상 명백하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은밀한 나르시시스트', 즉 내향형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배려 있으며 심지어 피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군림하는 대신, 조용한 무시와 은근한 비교, 교묘한 죄책감 심기로 상대를 무너뜨린다. "내가 그런 말을 했나요? 기억이 나지 않는데"라고 말하며 상대방의 현실 인식 자체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른다. 피해자는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보이지 않는 사슬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멍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내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게 된 사람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나르시스트와의 관계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오래 참았을까.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 자책은 부당하다. 나르시시스트는 바로 그 눈치채지 못하도록 설계된 방식으로 관계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스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 뇌과학적 관점도 중요하다. 그들의 뇌는 반복적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다르게 발달했다. 감정과 생존 본능을 관장하는 변연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그 결과 위협을 느끼는 순간 이성이 아닌 생존 본능이 작동한다. 그들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르시스트를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만 규정하는 것이 때로는 불완전한 이해라는 이유다. 물론, 이해가 곧 용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르시스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이상적인 답은 물론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함께 아이를 키우는 관계라면, 오랜 직장 동료라면, 혹은 가족이라면 완전한 단절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다르게 싸워야 한다. 나르시스트와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상대방이 언젠가는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논리나 공감으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상대를 흔드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스트와 마주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흔들리는 나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대응은 감정을 걷어 낸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공격에 동요하지 않는 태도, 의도적인 침착함, 그리고 전략적인 정보 관리가 필요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들의 모순과 거짓을 조용히 수집해 두는 것, 그리고 그 증거를 가장 유리한 순간에 활용하는 것. 이것은 비겁한 전략이 아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 그 규칙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생존의 지혜다. 그러나 이 모든 전략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의 내면적 힘을 되찾는 일이다. 나르시스트는 상대방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유지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내 자신의 가치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한, 그들의 공격은 빗나간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폭풍이 지나가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와의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란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나르시스트와의 관계를 끝내거나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길고 고통스럽다. 그 관계에서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은 그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린다.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말들이 내면의 독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회복의 과정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겪는 이 고통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적인 따뜻함과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나르시스트의 조종에 더 취약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도 우리처럼 느끼고, 변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나르시스트와의 관계로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고, 지치고, 무너지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나 "왜 진작 떠나지 않았냐"는 질문 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고통은 실재한다"는 인정이며, 당신은 이 관계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다.


나르시스트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왜 그 관계에 머물렀는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진 자신을 만나게 된다.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고,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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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
나이토 이즈미 지음, 위지영 옮김 / 마음의숲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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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죽음을 병원의 일로 여겨왔다. 하얀 커튼 너머, 모니터의 숫자들 사이에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임종. 그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진 죽음의 표준적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마지막인가. 나이토 이즈미의 기록을 따라 가다 보면, 그 질문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한 냄새가 배어 있는 방, 오래 앉아 있던 창가의 의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그 안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책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인구 구조의 거대한 전환점을 통과하고 있다. 2025년 현재,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 며 초고령사회에 공식적으로 진입했다. 통계청의 추산에 따르면,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노인이 많아진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 사회 전체의 과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불길하게 여기는 문화, 호스피스를 '포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그리고 재택 돌봄을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의 미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있는 한, 우리는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권리를 사실상 갖지 못한다. 그래서 나이토 이즈미의 이야기는 일본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마주해야 할 거울이기도 하다.

재택 호스피스는 병원 대신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제도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삶의 연장선 위에 놓겠다는 철학적 선언에 가깝다. 사람은 살아온 방식으로 떠난다는 명제는,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순간의 환경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완성하거나 훼손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원은 치료를 위한 공간이다. 그 설계의 중심에는 생명 연장이라는 목표가 있으며, 죽음은 그 목표의 실패로 읽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병원에서의 임종은 종종 관계보다 기계가, 온기보다 절차가 앞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의료진의 헌신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스템의 구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 구조 안에서 환자는 주체가 되기 어렵고, 마지막 순간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자유를 빼앗기는 경우가 생긴다. 반면 재택 호스피스는 환자를 삶의 공간으로 돌려보낸다. 거기서 그는 여전히 가족의 밥상을 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장부의 계절을 눈에 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나이토 이즈미의 기록 속 인물들 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도 '지금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을 끝까지 열어두고, 봄날 딸기를 으깨어 우유를 만들고, 손자에게 삶의 졸업장 이야기를 전하던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의 마지막 챕터를 가장 자기답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것이 재택 호스피스가 복지 제도를 넘어 하나의 가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다. 어디서 죽는가의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재택 의료 체계를 꾸준히 정비해왔다. 방문 진료와 방문 간호를 중심으로 한 재택 호스피스 모델은 지역사회 의료와 연계되어 있으며, 환자가 자택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닌 사회적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나이토 이즈미가 설립한 후지 내과병원의 사례는 그러한 흐름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의 현실은 다소 다른 지점에 있다. 물론 완화의료 및 호스피스 제도는 법적으로 정비되어 있고,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제정 이후 제도적 틀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의 층위에서는 여전히 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재택형 호스피스 서비스의 접근성이다. 전국적으로 재택 호스피스를 제공하는 기관은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지역 간 편차도 크다. 대도시와 농촌 지역 사이의 격차는 단순한 서비스 밀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돌봄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가족, 특히 여성 가족 구성원에게 집중되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재택 돌봄이 확대되는 만큼, 그 부담을 누가 감당하는가에 대 한 사회적 논의와 지원이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제도는 되레 특정 계층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있다. 인식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호스피스는 여전히 '치료를 포기하는 것, '마지막 선택지'라는 이미지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호스피스를 치료의 실패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전환이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 려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삶의 마무리를 사전에 설계하고 논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이토 이즈미는 말한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건강할 때 휘파람을 불며 해야 한다. 역설이 아니다. 죽음을 일상의 언어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곧 삶을 더 진지하게 살아가는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재택 호스피스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적 확충만이 아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감수성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책은 초고령화 사회는 우리에게 제도적 과제를 던지는 동시에,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사회 전체 앞에 내려놓는다. 재택 호스피스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응답이다. 하지만 그 응답이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먼저 그 질문을 두려움없이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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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의 가만히 듣는 마음 - 음악으로 감정을 사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메르헨 지음 / 더웨이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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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을 나는 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경계의 틈새. 세상이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이어폰을 꽂는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이루마의 건반이 첫 음표를 떨구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무너진다는 표현이 두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슬픔의 무너짐이 아니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버텨왔던 것들이, 이제는 좀 쉬어도 된다는 듯 스르르 내려앉는 느낌.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그런 고요한 무너짐이다. 나는 음악이 위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위로란 누군가가 건네는 말, 등을 토닥이는 손길,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것 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새벽, 에릭 사티의짐노페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음악은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위로받 아도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걸.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율로만,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이 맞다고 조용히 끄덕 여 주는 것이라는 걸. 조용한 마음이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느끼되, 그 감정에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다. 그냥 흘러가도록,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그냥 나를 통과하도록 두는 것. 음악은 그 허락을 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조금 무서워진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 슬픔이라 부르기엔 너무 아름답고, 기쁨이라 부르기엔 너무 쓸쓸한,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 있는 감정들이다. 올라푸르 아르날즈의 음악이 흐를 때, 나는 감정의 관찰자가 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파동들을 바라보되, 그 파동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파동 안에 완전히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틈을 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마음 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거다.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았다는 신호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건, 마음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불협화음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조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갈망이 있는 한, 우리는 음악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어지러운 마음을 음악에게 맡기는 법을 배웠다. 정리하려 하지 않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음악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내 마음의 어지러운 실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실들이 엉켜있어도 아름 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눈동자 속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 분명히 나인데, 분명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데, 왜인지 처음 보는 사람 같은. 그 당혹스러운 낯섦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음악을 들었다. 가브리엘 포레의시칠리엔이 흐르기 시작하자, 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나를 완전히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방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방들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낯선 마음은 길을 잃은 마음이 아니다.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마음이다. 계절이 다섯 번째 얼굴을 가진다면 어떨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하지만 그 모든 계절의 기억을 품은 계절. 내 마음이 꼭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감정으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지만, 모든 감정의 결을 동시에 지닌. 음악은 그 다섯 번째 계절에 이름을 붙여준다. 말이 아닌 선율로 다가온다. 마지막 축제라는 말이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슬플 수 있을까. 끝이 있기 때문에 축제는 눈부신 것이다. 영원한 축제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 것 이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의 그 여운. 마지막 음표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침묵이 내려앉는 그 찰나의 시간.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음 악을 듣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너무 거창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어제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바람이 지나갈 때 피부가 느끼는 온도의 미세한 차이. 커피 한 모금을 넘길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 이런 것들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음악은 그 기적을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선율이 흐를 때, 나는 잊고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특별히 생각하려 한 것도 아닌데, 음표 하나가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그 문 너머에서 오래된 얼굴이 걸어나온다.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할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불러낼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움은 상실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시간이, 그 감정이, 한때 내 삶에 존재했다는 증거다.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살았다는 뜻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음악은 계속 흐른다. 귀에 들리지 않아도, 이어폰을 뽑았어도, 선율은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조용히 따라온다. 어떤 냄새가 기억을 불러오듯, 어떤 음표는 감정을 불러온다. 그것이 음악이 가진, 언어가 닿지 못하는 자리까지 뻗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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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중용 필사책
공자.자사 지음, 최종엽 편저 / 유노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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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써보자 싶었다. 논어와 중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한자가 빽빽한 지면이 주는 낯섦,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논해온 그 깊이에 압도될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읽다가 덮고, 또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필사라는 방식이 달랐다. 이해하려는 부담 없이, 그냥 한 글자씩 따라 써도 된다는 것. 어쩌면 그 허락이 나를 다시 앉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논어를 필사하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쓰는 속도에 맞추어 생각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흘려 지나쳤을 문장들이 손끝에서 잠시 머물다 갔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쓸 때 나는 얼마나 아는 척을 하며 살아왔는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남의 기준으로 달려가다 정작 나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린 건 아닌가.

공자의 말은 거창하지 않았다. 배우고 익히는 것, 남을 대할 때의 태도, 작은 성실함, 이런 일상의 덕목들이 쌓여 삶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결이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필사를 하며 몸으로 느꼈다.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다. 한 획을 정성껏 긋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정돈되었다. 논어가 전하고자 했던 것이 어쩌면 바로 이 감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중용은 더 어려웠다. '중도를 지킨다'는 말은 알 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극단을 피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딱 맞는 적정한 지점을 찾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 보니 중용이 이야기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것을 인정하되,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의 노력, 그것이 중용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불완전함 위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겉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움직이게 된다.

​이 문장 앞에서 한참 멈추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머리로만 알았던 것 같다. 필사를 하며 이 문장을 손으로 쓰는 순간, 그것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영웅은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의 하루를 맑게, 분명하게 살아내는 사람이 바로 영웅이라는 것이다. 숏츠와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소음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휩쓸렸는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에 감정을 소비하고, 남의 고통을 구경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날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손끝에서 새겨졌다.

필사는 느리다. 그 느림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빠르게 읽고 빠르게 넘어가는 습관이 몸에 밴 나에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시간은 낯설었다. 그런데 그 느림 속에서 고요함이 왔다. 헐렁해진 마음이 조금씩 조여드는 느낌, 소란했던 안이 잠잠해지는 느낌. 문장이 끝날 때쯤이면 내가 쓴 것인지 문장이 나를 쓴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 내용이 마음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결심을 새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지냈던 기준들을 다시 꺼내어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논어와 중용을 읽으며 내가 발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싶은지.

다산이 유배지에서 글을 베끼며 정신을 다듬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작은 책상 앞에서 손끝으로 마음의 근육을 키운 것 같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정성의 반복. 그것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을 덮으며, 그 답이 손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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