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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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밟고 지나친다. 돌멩이, 낙엽, 그리고 이름도 모를 풀 한 포기. 아무도 멈추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밟히는 것들은 무엇을 느낄까? 아니, 더 정확히는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것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민들레는 참 이상한 식물이다. 꽃이 피면 줄기를 곧게 세우고, 꽃이 지면 땅으로 몸을 눕히고, 씨앗이 여물면 다시 일어나 홀씨를 바람에 내어준다. 어릴 적 우리는 이 홀씨를 입으로 후 불며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민들레가 왜 한 번은 눕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밝혀진 것도, 어떤 설명에 따르면, 민들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막 피어난 주변 꽃들이 벌과 나비의 눈에 더 잘 띄도록 비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신이 낮아짐으로써 다른 생명이 빛날 수 있도록.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췄다. 사람이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종종 패배라 부른다. 물러서는 것을 나약함이라 여기고, 양보를 손해라 계산한다. 하지만 민들레는 그 순간을 다르게 쓴다. 눕는 것이 곧 배려이고, 낮아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이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언제나 꼿꼿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듯이.

잡초는 강하다고 배웠다. 밟혀도 일어서고, 뽑혀도 다시 나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나는 잡초처럼 살겠다"고. 그런데 식물학 교과서는 뜻밖의 말을 한다—잡초는 강하지 않다고. 오히려 경쟁에 약한 식물이라고. 잡초는 강한 식물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자리, 자꾸 밟히고 훼손되는 척박한 곳에서 살아간다. 그 말인즉슨, 잡초는 이기는 전략 대신 비켜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포기한 대신 아무도 탐내지 않는 자리를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버티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잡초는 최소한 자신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밟히든, 꺾이든, 뽑히든) 씨앗을 남기는 것, 그 하나의 목표를 절대로 놓지 않는다. 화려하게 일어서는 대신, 엎드린 채로 꽃을 피운다. 그게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생명이란 결국 그 작은 완고함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주 '어떻게 보이느냐'에 에너지를 쏟는다. 쓰러졌다 일어서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역경을 이겨냈다는 서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는 잊어버릴 때가 많다. 잡초는 그 점에서 훨씬 현명하다. 엎드린 채로 피운 꽃 한 송이가, 화려하게 일어서다 결국 씨앗을 맺지 못한 식물보다 훨씬 더 오래 이 땅에 남는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했다. 어릴 때 풀밭에서 그것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있다. 찾으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고, 찾지 못하면 오늘의 운이 나쁜 것 같았다. 그런데 네잎클로버가 자주 발견되는 곳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밟고 지나가는 자리라는 사실은, 어쩐지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린다. 상처 때문에 생겨난 것이 행운이라고 불린다.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잎의 원기가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하나가 둘로 나뉘어 네 개의 잎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행운이란, 완벽한 조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틈에서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운이 좋다'고 부르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무언가 어긋났던 순간 뒤에 찾아온다. 계획이 틀어지고, 관계가 어그러지고, 믿었던 것이 흔들렸을 때—그 틈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리고, 스스로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한다. 네잎클로버가 그것을 알고 밟히는 곳을 택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많이 밟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피어난다. 행운은 고요하고 안전한 풀밭보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길 위에 더 자주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봄망초라는 꽃이 있다. 꽃봉오리일 때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 있다가, 꽃이 피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 의기소침하게 웅크리고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하고 일어서는 것처럼. 나는 이 식물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빨리 털고 일어나라고,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하지만 봄망초는 그 자세로 꽃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것이 포기가 아니라, 피어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떤 침묵은 준비이고, 어떤 움츠림은 도약이다.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무너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봄망초처럼, 안으로 무언가를 모으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식물을 들여다보는 일이 결국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타민들레는 눕는 법을 알고, 잡초는 엎드려 꽃을 피우고, 네잎클로버는 상처에서 피어나고, 봄망초는 고개를 숙인 채 꽃을 준비한다. 이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살아남는 것이 언제나 씩씩하게 서 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눕는 것이, 비켜서는 것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더 깊은 생의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 앞에서 발걸음을 한 번 멈춰보고 싶다. 저 작은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왔는지를,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 어쩐지, 나의 엎드림도 나의 침묵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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