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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의 가만히 듣는 마음 - 음악으로 감정을 사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메르헨 지음 / 더웨이브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을 나는 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경계의 틈새. 세상이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이어폰을 꽂는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이루마의 건반이 첫 음표를 떨구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무너진다는 표현이 두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슬픔의 무너짐이 아니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버텨왔던 것들이, 이제는 좀 쉬어도 된다는 듯 스르르 내려앉는 느낌.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그런 고요한 무너짐이다. 나는 음악이 위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위로란 누군가가 건네는 말, 등을 토닥이는 손길,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것 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새벽, 에릭 사티의짐노페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음악은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위로받 아도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걸.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율로만,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이 맞다고 조용히 끄덕 여 주는 것이라는 걸. 조용한 마음이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느끼되, 그 감정에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다. 그냥 흘러가도록,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그냥 나를 통과하도록 두는 것. 음악은 그 허락을 준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조금 무서워진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 슬픔이라 부르기엔 너무 아름답고, 기쁨이라 부르기엔 너무 쓸쓸한,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 있는 감정들이다. 올라푸르 아르날즈의 음악이 흐를 때, 나는 감정의 관찰자가 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파동들을 바라보되, 그 파동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파동 안에 완전히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틈을 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마음 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거다.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았다는 신호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건, 마음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불협화음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조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갈망이 있는 한, 우리는 음악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어지러운 마음을 음악에게 맡기는 법을 배웠다. 정리하려 하지 않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음악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내 마음의 어지러운 실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실들이 엉켜있어도 아름 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눈동자 속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 분명히 나인데, 분명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데, 왜인지 처음 보는 사람 같은. 그 당혹스러운 낯섦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음악을 들었다. 가브리엘 포레의시칠리엔이 흐르기 시작하자, 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나를 완전히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방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방들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낯선 마음은 길을 잃은 마음이 아니다.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마음이다. 계절이 다섯 번째 얼굴을 가진다면 어떨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하지만 그 모든 계절의 기억을 품은 계절. 내 마음이 꼭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감정으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지만, 모든 감정의 결을 동시에 지닌. 음악은 그 다섯 번째 계절에 이름을 붙여준다. 말이 아닌 선율로 다가온다. 마지막 축제라는 말이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슬플 수 있을까. 끝이 있기 때문에 축제는 눈부신 것이다. 영원한 축제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 것 이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의 그 여운. 마지막 음표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침묵이 내려앉는 그 찰나의 시간.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음 악을 듣는지도 모른다.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너무 거창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어제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바람이 지나갈 때 피부가 느끼는 온도의 미세한 차이. 커피 한 모금을 넘길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 이런 것들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음악은 그 기적을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선율이 흐를 때, 나는 잊고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특별히 생각하려 한 것도 아닌데, 음표 하나가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그 문 너머에서 오래된 얼굴이 걸어나온다.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할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불러낼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움은 상실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시간이, 그 감정이, 한때 내 삶에 존재했다는 증거다.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살았다는 뜻이다.책을 덮고 나서도, 음악은 계속 흐른다. 귀에 들리지 않아도, 이어폰을 뽑았어도, 선율은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조용히 따라온다. 어떤 냄새가 기억을 불러오듯, 어떤 음표는 감정을 불러온다. 그것이 음악이 가진, 언어가 닿지 못하는 자리까지 뻗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