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과 WEB 3.0 장자철학으로 이해하다 - 고대 철학자 장자가 꿈꾸던 무위의 세상 블록체인 기술로 실현하다
박수억 지음 / 하움출판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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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철학을 과거의 학문으로, 기술을 미래의 도구로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철학은 늘 미래를 예견해왔던 사유의 지도였는지도 모른다. 2천여 년 전 장자가 꿈꾸었던 자유로운 세계와 오늘날 블록체인이 추구하는 탈중앙화된 미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갈구해온 자율성과 평등에 대한 열망이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된 결과일 것이다. 장자의 핵심 개념인 '무위자연'은 인위적인 통제와 강제를 거부하고, 사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놀랍게도 블록체인의 작동 원리와 맞닿아 있다. 중앙의 권위 없이도 네트워크가 스스로 합의에 도달하고, 누구의 강제 없이도 시스템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방식 말이다. 장자가 붕새의 비상으로 표현했던 무한한 자유의 경지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디지털 공간에서 실현하려는 개인 주권의 회복과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장자가 '쓸모없음의 쓸모'를 역설했던 것처럼, 블록체인 역시 기존 사회가 쓸모없다고 여겼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 권력이 없어도 신뢰가 형성되고, 거대 기업이 없어도 거래가 성립되며, 정부의 통제 없이도 공동체가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 시스템의 상식을 뒤집는다. 장자가 꿈꾸었던 이상향이 공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미래였음을 기술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인류 문명은 오랫동안 신뢰를 중앙기관을 통해 확보해왔다. 왕과 제사장, 은행과 정부, 그리고 오늘날의 거대 플랫폼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상 '제3자'를 믿음으로써 서로를 믿는 간접적 신뢰 구조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편중과 불평등을 낳았고, 중개자는 막대한 수수료와 영향력을 독점해왔다. 블록체인은 이 오래된 신뢰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중앙의 보증 없이도 암호학과 분산 네트워크를 통해 신뢰를 생성할 수 있다는 발견은 혁명적이다. 이것은 마치 장자가 말한 '도가 곧 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사상과 닮아 있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 자체에 신뢰가 내장되어 있는 구조 말이다. 특히 스마트 계약은 이러한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구현한 사례다. 계약의 이행을 법원이나 중재자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 자체가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실행되는 방식이다. 이는 인간의 개입과 자의적 판단을 최소화하고, 규칙 그 자체가 작동하도록 만든다. 장자가 꿈꾸었던 '사람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금융 영역에서 디파이(탈중앙화 금융)의 등장은 더욱 급진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은행 없이도 대출이 가능하고, 증권사 없이도 투자가 이루어지며, 중개인 없이도 글로벌 송금이 실시간으로 처리된다. 이것은 단순히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던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중앙의 허락 없이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시스템,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꿈꾸었던 평등한 세계의 현대적 구현이다.


웹 2.0 시대는 '참여의 시대'라고 불렸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 화려한 참여의 이면에는 씁쓸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만든 모든 콘텐츠, 우리가 남긴 모든 흔적은 결국 플랫폼 기업의 자산이 되었다. 우리는 콘텐츠를 생산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소유한 적은 없었다. 웹 3.0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핵심은 '소유'의 개념을 디지털 공간에 구현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NFT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진정한 소유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갤러리나 유통사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며, 음악가는 스트리밍 플랫폼의 불공정한 수익 배분에 종속되지 않는다. 창작자가 곧 플랫폼이 되고, 개인이 자신의 경제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는 장자가 말한 '각자의 본성대로 존재하는 것'과 깊이 연결된다. 외부의 기준이나 강제된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세계 말이다. 웹 3.0에서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누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수익은 어떻게 분배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인권 선언과도 같다. 게임 산업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수백 시간을 투자해 얻은 아이템과 캐릭터는 게임사의 소유물이었다. 게임사가 서버를 닫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진정한 소유자가 된다. 게임 내 자산을 다른 게임에서 사용하거나, 실제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수 있다. 이것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디지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가능하게 한다.


장자는 이상적인 통치를 '무위지치', 즉 다스리지 않는 다스림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 시스템과는 정반대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DAO(탈중앙화 자율 조직)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DAO는 중앙의 CEO나 이사회 없이 운영되는 조직이다. 모든 구성원이 토큰을 보유하고, 주요 의사결정은 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규칙은 스마트 계약으로 코드화되어 있어, 누구도 임의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권력의 남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참여자 모두가 조직의 주인이 되는 구조를 만든다. 장자가 꿈꾸었던 '위계 없는 공동체'가 디지털 공간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DAO가 기존 조직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관료제의 복잡한 절차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제안이 올라오면 커뮤니티가 투표하고, 통과되면 즉시 실행된다. 이는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는 무위의 방식과 닮아 있다. 실물 자산의 토큰화(RWA)는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확장한다. 부동산이나 미술품 같은 고가의 자산을 여러 명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 수익을 투명하게 분배받을 수 있다. 소수의 자본가만이 독점하던 투자 기회가 일반 대중에게도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를 국가의 강제적 개입이 아니라, 기술을 통한 구조적 변화로 달성하려는 시도다.

장자의 사상 중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개념이 '쓸모없음의 쓸모'다. 세상은 유용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정작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더 오래 생존하고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오늘날 효율성과 생산성에 지배당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블록체인과 웹 3.0은 이러한 철학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기존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블록체인은 비효율적이다. 같은 데이터를 수천 대의 컴퓨터에 중복 저장하고, 합의 과정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중앙 서버 하나면 해결될 일을 굳이 복잡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비효율'이 시스템의 핵심 가치다. 중복과 분산이 있기에 검열이 불가능하고, 느린 합의 과정이 있기에 조작이 차단된다. DePIN(탈중앙화 물리적 인프라 네트워크) 같은 개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통신이나 에너지 인프라는 대규모 자본과 중앙 집중적 관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형 인프라는 개인들의 작은 기여가 모여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각자의 기여는 미미해 보이지만, 전체로서는 강력하고 복원력 있는 시스템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장자가 말한 '작은 것들의 큰 쓸모'가 아닐까. 메타버스와 가상 공간의 경제 활동도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가상 세계의 자산은 '실체 없는 것', 즉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실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실체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형의 것들이 더 자유롭게 유통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상인가,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세상인가.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신뢰인가, 시스템 자체에 내장된 신뢰인가. 개인이 플랫폼에 종속되는 구조인가, 개인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구조인가? 장자의 철학이 2천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갈망하고, 평등을 원하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기술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단순한 소비자나 관망자를 넘어서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데이터를 지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말이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의 문제다. 장자가 꿈꾸었던 소요유의 세계, 아무런 속박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는 어쩌면 디지털 공간에서 먼저 실현될지도 모른다. 물리적 세계의 제약을 넘어서, 국경과 인종과 계급의 벽을 허물고, 순수하게 개인의 가치만으로 평가받는 세상. 그것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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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측정법 - 강하고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드는 50개의 블록
한영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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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 기업가가 반세기 동안 쌓아올린 경영 철학을 접하면서, 나는 기업 경영이라는 것이 결국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지표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측기를 만드는 회사의 창업자답게, 그는 기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마치 센서로 측정하듯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왔다. 용기, 열정, 신용, 안전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조차 그의 손을 거치면 구체적인 측정 대상이 되어 경영의 도구로 활용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엔지니어의 사고방식이 경영 현장에 녹아든 결과물이다. 공학에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개선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온도를 측정할 수 없다면 온도를 조절할 수 없고, 압력을 측정할 수 없다면 압력을 관리할 수 없다. 저자는 이 강력한 원리를 기업 경영 전반에 적용했다. 직원의 역량, 협력사와의 신뢰, 품질의 수준, 심지어 창업 용기까지도 그는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제시하는 50개의 블록이 체크리스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 블록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블록이 흔들리면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건축물의 벽돌처럼, 각각의 블록은 독립적이면서도 전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러한 구조적 사고는 그가 오랜 시간 제조업 현장에서 체득한 시스템적 관점의 산물일 것이다.


저자의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과 관련된 블록들이다. 인재, 역량, 소통, 보상, 오너십 등 직원과 관련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는 계량화와 인간미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발견했다. 그는 직원의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는 냉혹한 경영자가 아니라, 측정을 통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보상보다 보람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 기업 경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전적 보상은 측정하기 쉽지만, 일에서 느끼는 보람은 측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람을 측정할 것인가? 아마도 저자는 직원들의 표정, 업무 몰입도, 자발적 참여, 회사에 대한 애착 등 다양한 비공식적 지표들을 통해 이를 파악해왔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측정이다. 숫자로만 표현되는 것이 측정이 아니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측정이다. 소통을 입이 아닌 발로 해야 한다는 그의 표현도 인상적이다. 말은 쉽게 측정할 수 있다. 몇 번 회의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공지사항을 발송했는지, 타운홀 미팅을 몇 차례 개최했는지 등은 모두 기록 가능한 지표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행동으로 입증된다. 약속을 지키는 것,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쌓여 신뢰라는 측정하기 어려운 자산이 형성된다.


저자가 품질을 절대우선순위에 놓는 이유는 명확하다. 제조업에서 품질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품질은 제품의 불량률이나 고객 만족도 같은 표면적 지표를 넘어선다. 품질은 하나의 철학이자 기업 문화이며,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점이다. QCD, 즉 품질, 가격, 납기라는 세 가지 요소는 제조업의 영원한 과제다. 이 세 가지는 항상 긴장 관계에 있다. 품질을 높이려면 비용이 증가하고, 가격을 낮추려면 품질이나 납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납기를 앞당기려면 품질이나 비용에 부담이 갈 수 있다. 저자는 이 삼각관계 속에서 품질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품질에 대한 타협 없는 자세는 협력사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협력사를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라 자사의 얼굴로 인식한다. 협력사의 품질은 곧 자사의 품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협력사 선정에 발품을 팔고, 신용을 쌓으며, 갈등을 관리하고, 상생을 추구한다. 각각의 과정이 모두 측정되고 관리된다. 협력사와의 거래 기간, 불량률 변화 추이, 커뮤니케이션 빈도와 질, 위기 상황에서의 대응 등이 모두 기록되고 평가의 근거가 된다.


2000년대 초 인도네시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경험은 저자에게 새로운 차원의 측정 능력을 요구했을 것이다. 해외 시장에서는 국내에서 통용되던 측정 기준과 방법론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문화가 다르고, 법과 제도가 다르며, 비즈니스 관행이 다르다. 이러한 환경에서 무엇을 측정하고,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는 전혀 새로운 도전이다. 저자는 국제화를 단순히 수출 증대나 시장 확대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며,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융합하는 작업이다. 현지화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핵심 가치는 유지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현지 직원을 채용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면서도, 품질에 대한 기준만큼은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히든 코스트에 대한 그의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해외 투자에는 눈에 보이는 비용 외에 수많은 숨겨진 비용이 존재한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소통 비용,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관리 비용, 현지 법규와 관행을 이해하는 데 드는 학습 비용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비용들을 미리 측정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글로벌 사업의 성패를 가른다. 감사함을 글로벌 비즈니스의 블록으로 제시한 것도 흥미롭다. 이는 단순한 정서적 태도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문화적 겸손함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자세다. 다른 문화를 대하는 태도, 현지 파트너를 존중하는 방식,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노력 등이 모두 감사함이라는 블록을 구성한다.

저자가 현장 경영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보고서와 데이터는 현실의 일부만을 보여주지만, 현장은 모든 것을 드러낸다. 현장에는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정보가 존재한다. 직원들의 표정, 기계의 소리, 작업 동선의 효율성, 정리정돈 상태, 분위기 등은 모두 중요한 측정 대상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 철학도 현장에서 출발한다. 안전사고는 단순히 통계적 수치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아차사고의 빈도, 위험 요소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 수준, 안전 규정 준수율, 보호장구 착용률 등 다양한 선행 지표들을 통해 안전은 측정되고 관리된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징후를 포착하고 예방하는 것이 진정한 안전 관리다. 연구개발에 대한 그의 관점도 현장 중심적이다. 연구개발은 실험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고, 생산 공정의 비효율을 개선하며, 품질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이 연구개발이다. 따라서 연구개발의 성과는 특허 건수나 신제품 출시 횟수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현장의 문제 해결 속도, 개선 제안의 실행률, 공정 효율의 향상 등이 모두 연구개발의 지표가 된다.


50년을 경영해온 기업가가 100년 기업을 꿈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100년 기업은 단순히 오래 존속하는 회사가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본질적 가치는 유지하고,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성장하면서도 직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기업이다. 기업의 목적에 대한 그의 성찰은 깊다. 우리는 왜 사업을 하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기업의 모든 활동을 정당화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출하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며, 직원들에게 의미 있는 일터를 제공하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답이 나온다. 미래세대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본질은 유지하되 방법은 진화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측정하고 추적하며 제어한다는 기본 원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도구와 방법이 달라질 뿐이다. 미래의 리더들은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기업 경영의 근본 원칙은 지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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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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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다. 눈을 뜨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손끝 하나로 세계의 모든 일에 반응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그 속에서 정작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자주 막막해진다. 빠른 속도, 끊임없는 경쟁, 남의 시선에 맞춘 삶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바로 이때, 2,000년 전의 고전 <중용>이 우리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이 책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서 출발한다. 외부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성실을, 순간의 감정보다 지속되는 절제를 강조하며, 인간이 본래 지닌 ‘도(道)’를 일상 속에서 구현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지 ‘옛것의 지혜’ 때문이 아니다. <중용>은 21세기의 우리에게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우는 방법을 알려준다. 변화가 일상이고, 유혹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중용’은 균형과 절제의 언어로 ‘진정한 나’를 다시 일깨운다.이번에 박찬근님의 <중용>을 읽으며 그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중용>은 말한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 종교적 교리나 추상적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란 곧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올바름의 길, 즉 ‘양심의 방향’을 뜻한다. 주자는 이 구절에 대해, “사람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하늘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른다”고 해석했다. 이는 곧 우리가 타고난 ‘본성의 선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부의 기준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고 있음을 비판한 말이다. 21세기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선택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중심을 잃기도 쉽다. SNS의 피드 한 줄, 익명의 댓글 하나가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쉽게 흔든다. ‘좋아요’의 숫자가 나의 가치가 되고, 타인의 시선이 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그러나 ‘도’는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원칙을 잃지 않는 삶을 뜻한다. 그것은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중심을 세우려는 끊임없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용의 길’이다.

<중용>의 핵심 덕목 중 하나는 ‘신독(愼獨)’, 즉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는 가르침이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들이 늘 곁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진짜 나를 성찰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 말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산다. 오프라인에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온라인 익명 공간에서는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주자는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삼가고,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는 감시가 없을 때 비로소 윤리가 시험된다는 말이다. 익명 뒤에 숨은 말 한마디, 감정적인 댓글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시대, ‘신독’은 단순한 자기 절제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됨의 기준이 된다. ‘신독’을 21세기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용기’를 갖는 일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윤리이자, 나의 내면을 지키는 방패다.

<중용>은 ‘몸을 닦는 일(修身)’에서 시작해 ‘하늘의 이치를 아는 일(知天)’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자신을 바르게 세우지 않으면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타인을 이해할 수 없으며, 타인을 알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21세기의 인간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의 우리는 ‘세상을 바꾸자’는 거대한 구호에 익숙하지만, 정작 ‘나를 바꾸는 일’에는 서툴다. 그러나 중용은 말한다. 모든 변화는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수신’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진정한 성찰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부모를, 타인을,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 ‘수신에서 지천으로’ 이어지는 중용의 단계는,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하나로 엮는다. 즉, 나의 작은 성찰 하나가 결국 세상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중용이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성(誠)’, 곧 ‘진실함’이다. 주자는 말한다. “성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히 행함은 사람의 도이다.” 하늘은 거짓이 없고, 인간은 그 하늘을 본받아 ‘진정성’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겉으로 꾸미는 것에 익숙하지만, 내면의 진실함을 유지하는 일에는 서툴다. SNS의 세계에서는 꾸며진 삶, 연출된 행복이 넘쳐난다. 그러나 진정한 ‘성’은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정직한 태도다. 성실함은 단순히 노력의 의미를 넘어, 존재의 깊은 진정성을 뜻한다. 내가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정직할 때, 비로소 타인에게도 진정한 신뢰를 줄 수 있다. ‘성’은 하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다.

<중용>은 완벽한 삶의 기술서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혜의 지도다. 21세기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중용』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진실하게 존재하는 법을 일깨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뜻하고, ‘용(庸)’은 그것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삶의 지속성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중심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중용’의 길이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마음의 기술이다. 명절을 맞이하면서 고전을 읽는 기쁨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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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과학
이선 크로스 지음, 왕수민 옮김, 김경일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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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감정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그것들과 함께 춤추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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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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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장강명의 《뤼미에르 피플》을 소개하는 이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경계'에 대한 것이었다. 뤼미에르 빌딩 8층에 거주하는 10세대의 인물들은 모두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박쥐 인간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가출 청소년, 반은 인간이고 반은 쥐인 반인반서들, 청각장애인과 왜소증 연인 등은 모두 주류 사회가 정의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의 기준들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배타적인지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들을 불쌍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만의 논리와 생존 방식을 가진 독립적인 개체로 묘사한다. 박쥐 인간이 "인간이 훨씬 더 음흉한 존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설정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신촌이라는 공간의 선택도 흥미롭다. 대학가이자 번화가인 신촌은 청춘과 활력의 상징이지만, 작가는 그 화려한 표면 아래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포착한다. 뤼미에르 빌딩의 주민들은 모두 이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소외와 배제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805호의 서술 방식이다. 채무자와 재벌 2세의 이야기를 좌우로 나누어 동시에 서술하는 방식은 기교적인 실험만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사회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맞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의 아이러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807호의 이야기에서 길고양이 업무를 둘러싼 공무원들의 책임 회피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푸른환경과와 보건위생과 사이의 업무 떠넘기기, 과장의 해외 연수로 인한 공석, 동창 관계를 이용한 업무 이관 등은 우리 사회 관료제의 비합리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런 디테일들이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작가는 거대한 사회 문제를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접근한다. 이는 기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취재를 통해 축적된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808호의 반인반서 이야기는 이 작품이 가진 환상적 요소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이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현실적이다. 생김새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어 절도나 원조교제로 생계를 유지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현실의 소외계층이 처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환상적 설정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반인반서라는 존재는 사회의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은유이다. 그들이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졸업장도 없는" 존재라는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제도적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한 것이다.

810호의 섬 이야기는 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섬이 꾸는 꿈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시다. "섬은 궁극의 악기가 되고자 했다"는 구절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서술은 자연과 예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름다움이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오해한다"를 통해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섬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섬이 자신을 악기로 만들어 영원히 노래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은 예술의 본질적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야기의 연결은 희미하다. 각 호수의 주민들은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서로 거의 만나지 않는다. 이는 현대 도시인들의 익명성과 고립을 반영한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인들의 삶의 양상을 작품의 구조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느슨한 연결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갇혀 살아가면서도,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뤼미에르 빌딩이라는 공간적 틀은 이런 현대인의 존재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뤼미에르'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의지가 바로 그 빛일 것이다. 각 인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박쥐 인간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전신마비 환자는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들의 변화는 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하다. 작가는 거창한 구원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작은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뤼미에르 빌딩의 '빛'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빛이 아닐까. 장강명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뤼미에르 피플임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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