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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장강명의 《뤼미에르 피플》을 소개하는 이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경계'에 대한 것이었다. 뤼미에르 빌딩 8층에 거주하는 10세대의 인물들은 모두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박쥐 인간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가출 청소년, 반은 인간이고 반은 쥐인 반인반서들, 청각장애인과 왜소증 연인 등은 모두 주류 사회가 정의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의 기준들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배타적인지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들을 불쌍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만의 논리와 생존 방식을 가진 독립적인 개체로 묘사한다. 박쥐 인간이 "인간이 훨씬 더 음흉한 존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설정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신촌이라는 공간의 선택도 흥미롭다. 대학가이자 번화가인 신촌은 청춘과 활력의 상징이지만, 작가는 그 화려한 표면 아래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포착한다. 뤼미에르 빌딩의 주민들은 모두 이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소외와 배제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805호의 서술 방식이다. 채무자와 재벌 2세의 이야기를 좌우로 나누어 동시에 서술하는 방식은 기교적인 실험만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사회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맞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의 아이러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807호의 이야기에서 길고양이 업무를 둘러싼 공무원들의 책임 회피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푸른환경과와 보건위생과 사이의 업무 떠넘기기, 과장의 해외 연수로 인한 공석, 동창 관계를 이용한 업무 이관 등은 우리 사회 관료제의 비합리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런 디테일들이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작가는 거대한 사회 문제를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접근한다. 이는 기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취재를 통해 축적된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808호의 반인반서 이야기는 이 작품이 가진 환상적 요소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이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현실적이다. 생김새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어 절도나 원조교제로 생계를 유지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현실의 소외계층이 처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환상적 설정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반인반서라는 존재는 사회의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은유이다. 그들이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졸업장도 없는" 존재라는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제도적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한 것이다.
810호의 섬 이야기는 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섬이 꾸는 꿈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시다. "섬은 궁극의 악기가 되고자 했다"는 구절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서술은 자연과 예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름다움이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오해한다"를 통해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섬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섬이 자신을 악기로 만들어 영원히 노래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은 예술의 본질적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야기의 연결은 희미하다. 각 호수의 주민들은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서로 거의 만나지 않는다. 이는 현대 도시인들의 익명성과 고립을 반영한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인들의 삶의 양상을 작품의 구조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느슨한 연결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갇혀 살아가면서도,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뤼미에르 빌딩이라는 공간적 틀은 이런 현대인의 존재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뤼미에르'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의지가 바로 그 빛일 것이다. 각 인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박쥐 인간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전신마비 환자는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들의 변화는 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하다. 작가는 거창한 구원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작은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뤼미에르 빌딩의 '빛'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빛이 아닐까. 장강명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뤼미에르 피플임을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