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
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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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의학의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이해한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미신에서 과학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그 관점에서 보면 한의학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유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흥미롭다. 기원을 둘러싼 논쟁, 국가 간 지식의 이동, 제도와 인간 사이의 긴장, 그리고 전통이 현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한의학의 역사 안에 촘촘히 얽혀 있다.


한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출발점 자체에서 나온다. 침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중국의 전통적인 답은 확고하다. 황제의 시대, 혹은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침의 원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생각보다 취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발굴된 바늘 같은 도구를 곧바로 침 도구로 단정하는 것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굴되는 동일한 형태의 도구도 침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뾰족한 도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경혈을 자극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증명되지 않은 긴 거리가 있다.

일본 학자 야마다 케이지는 이 문제를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뜸이 기원전 5세기, 침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경에 등장했다고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흔히 침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폄석이 실은 침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도구라는 지적이다. 폄석은 상처를 째고 고름을 빼내는 외과적 도구였고, 침은 건강한 피부에 자극을 주어 치료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의료 행위였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진화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연속성을 가정하지만, 실제로 두 도구의 용도와 원리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여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사료가 끼어든다. 1937년 처음 발굴되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 잊혔던 소영자 유적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조사를 통해 새로운 빛을 받는다.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발견된 수많은 바늘들 — 그것도 군사 지도자나 지역 유지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시신 위, 즉 가장 소중한 물건을 함께 묻는 자리에서 — 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직조 바늘이라면 여성의 무덤에, 방추차 같은 관련 유물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화살촉이라면 유기물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남은 가능성은 의료 도구였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침의 발원지를 한반도 북쪽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중국의 고전 황제내경이 세계를 인식하던 범위 바깥에, 이미 독자적인 의료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늘 기록된 것의 역사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발굴은 조용히 상기시킨다.

지식은 권력이다. 이 명제는 한의학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다. 고려가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문관 선발과 함께 의업 고시를 함께 도입한 것은 의료 인력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업과 주금업이라는 두 개의 의과 고시는,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자면 내과의와 외과의를 별도로 선발하는 체계에 해당한다. 치료하는 자의 자격을 국가가 인증한다는 발상은,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일부임을 뜻한다. 조선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세종 시대에 등장한 의서습독관이라는 직책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던 고유한 제도였다. 이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의서를 읽고 분류하고 요약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의료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번역이나 요약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하고 재편집하는 일이었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방대한 편찬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조용한 노동 덕분이었다. 역사는 이름을 남긴 편찬 책임자들을 기억하지만, 실제로 지식을 처리하고 연결한 것은 이름 없는 습독관들이었다.


의녀 제도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허도가 처음 건의했을 때의 명분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였지만, 실질적 이유는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 여성들을 선발해 훈련시킨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전문화된 의료 인력 집단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종기 치료, 침술, 산부인과적 처치, 약재 감별 — 이들이 담당한 업무의 범위는 단순한 보조 역할을 훨씬 넘어섰다. 성종 때 제정된 의녀권과조목은 실력이 없으면 퇴출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금이라는 의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술을 숨기지 않았다고 항변한 사건은, 그 기술이 얼마나 오랜 수련의 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 살에 시작해 열여섯에 겨우 터득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전통 의료 기술이 얼마나 체득에 의존하는 것이었는지를 느낀다.

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염병이다. 삼국시대 천연두는 신라 왕을 두 명이나 죽였고, 일본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은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사실상 구한 것도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역사는 군사력과 외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균은 어떤 지휘관도 내리지 않은 명령을 실행했다. 조선의 방역 체계는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1786년 홍역 유행 당시 정조가 시행한 대책을 보면, 의료진 당직제, 구역별 환자 배당, 무료 치료 대상자 지정, 치료 실적 보고, 교통편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염병 대응 매뉴얼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물론 그 당시의 치료가 효과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37만 명이 사망한 해에 서울에서 치료한 환자가 6000명 남짓이었다는 숫자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의료를 공공의 책임으로 조직화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전염병이 돌 때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동요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국가가 나서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 지도자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표현. 오늘날에도 대형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고 사과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공동체가 위기 앞에서 요구하는 것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19세기는 조선 의학이 자기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약용은 음양오행, 오장육부, 맥으로 오장의 상태를 읽는다는 전통의학의 이론 체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서양의 해부학을 접하며 인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조선에 소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전통 치료 기술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이론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유배지에서 수십 년간 지역민들의 의사 역할을 했고, 홍역 전문서를 저술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론과 실천은 때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왜 효과가 있는지 설명하는 언어가 틀렸더라도, 어떤 처치가 효과적이라는 경험적 축적은 별도로 존재한다. 현대 의학도 많은 치료법의 기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임상에서 활용한다. 설명의 정합성과 치료의 유효성은 동일하지 않다. 이제마의 사상체질의학은 이 맥락에서 특히 흥미롭다.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흘러오던 전통의학의 흐름에서 갑작스럽게 체질 분류 체계가 등장한다. 19세기 유럽에서도 골상학을 비롯한 다양한 체질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제마의 발상이 완전히 고립된 천재성의 산물이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럽의 체질론들이 도태된 반면 사상체질의학이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 경험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찰과 분류만으로는 의학이 되지 않는다. 그 분류가 실제 치료 결과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임상 언어가 된다.


한의학의 역사를 읽는 것은 지식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온 의서들이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고, 조선의 인삼이 일본으로 넘어가 새로운 산업을 낳고, 서양의 해부학이 동아시아의 기 개념으로 재해석된다. 지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송나라는 황제내경 영추 완본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요청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 텍스트는 고려가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의학은 여전히 과학의학과 마찰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다. 그 경계를 둘러싼 논쟁,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앎이 공인된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더 오래된 질문의 반복이다. 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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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AI가 만듦 - 기획부터 제작까지, 10배속 영화 제작의 비밀
한선옥.조인호.문현웅 지음, 무암(MooAm) 기획 / 파지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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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살았다. 찍고 싶은 장면이 있었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의 벽이 먼저였다. 장비가 없고, 편집을 모르고, 무엇보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손발을 묶었다. 그 꿈은 꿈인 채로 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 한 권이 그 오래된 자물쇠를 건드렸다. AI를 활용한 영상 제작을 다룬 책이었는데, 나를 가장 먼저 흔든 것은 기술 설명이 아니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대는 곧 누구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대"라는 문장이었다. 묘하게도 그 말이 나를 위축시키는 대신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경쟁이 시작됐다는 것은, 출발선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책에서는 생성형 AI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말한다. 어느 주의 한국 유튜브 조회수 1위가 AI로 제작된 동물 영상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AI가 만든 콘텐츠가 이미 '신기한 실험'의 단계를 넘어 사람들의 시간과 감정을 실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그 영상을 본 2천만 명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영상을 만든 사람이 어떤 대단한 전문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니, 지금도 두렵다. AI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내가 만든 것이 정말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혹여 누군가의 것을 침범하는 건 아닌지. 책은 이 불안도 피하지 않는다. 딥페이크, 저작권 침해, 허위정보 생성 — 기술의 이면에 도사린 그림자들을 솔직하게 다루면서, 그래서 더 신중하게, 그러나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 균형 잡힌 시선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책이 제시하는 'VISION'이라는 프레임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처음 8초 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후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좋은 장비보다 좋은 설계가 영상을 살린다는 것. 이 말들은 AI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어쩌면 글쓰기에도, 말하기에도, 모든 표현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결국 기술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가 핵심이라는 것을 책은 반복해서, 그러나 지겹지 않게 강조한다.

나는 만들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윤곽은 있다. 내가 자라난 지역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려하지 않고, 넓지도 않은 세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신선할 수 있는 장소다. 전문 카메라도, 조명 장비도, 편집팀도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 없음이 더 이상 '불가능'의 이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암이라는 제작사가 AI를 활용해 대규모 군중 장면이나 판타지 요소를 구현했다는 사례는, 예산이 아니라 발상이 콘텐츠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의 한계가 창의력의 한계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다고 AI가 모든 것을 대신해줄 거라는 환상을 품지는 않는다. 책에서 말하는 AI는 '감독'이 아니라 '조감독'이다. 지루한 반복 작업을 대신하고, 상상을 시각화하는 데 힘을 보태주지만, 무엇을 찍을지, 왜 찍을지, 누구를 향해 말을 거는지는 결국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이야말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AI는 무한한 가능성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기술의 파도가 온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파도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모래사장에 서서 구경만 했다. 겁이 나기도 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파도는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 안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밀려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차라리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는 쪽이 낫지 않을까. 나는 이제 조금씩 시작해보려 한다. 완벽한 첫 작품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담고 싶은 장면 하나를 AI와 함께 구현해보는 것, 그 경험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출발이다. 언젠가 그 작은 출발이 쌓여, 내 이름이 담긴 영상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조금 두렵다. 하지만 이제 그 두려움이 나를 멈추게 하는 이유가 아니라,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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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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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남성은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간다. 가부장제의 틀은 여전히 그들에게 강인함과 지배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시대는 공감하고 돌볼 줄 아는 남성성을 목마르게 찾는다. 이 간극 속에서 수많은 남성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내면의 혼란을 안고 산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놀랍게도 그 지도는 수천 년 전 그리스인들이 상상한 신들의 세계에 숨어 있다. 심층심리학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인간 무의식에 내재한 보편적 패턴, 곧 '원형(archetype)'으로 이해한다.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 이 신들은 저마다 인간 내면의 특정한 힘과 충동, 결핍과 가능성을 형상화한다.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읽는 일이다. 모든 남성의 내면에는 '아버지'라는 원형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경험한 아버지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집단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는 이 아버지 원형의 진화를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라는 세 세대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 준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땅속 깊이 가두어 버린다. 새 생명이 빛을 보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이 이미지는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 개인의 의식이 태동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는 내면의 힘을 가리킨다. '나는 늘 이렇게 해왔다', '이게 내가 배운 방식이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성, 집단의 규범과 관습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남성의 내면에는 우라노스가 살아 있다. 우라노스적 의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개인의 자각과 통찰이 자랄 틈이 없다. 억압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심리적·신체적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는 두통, 원인 불명의 피로, 잠재된 분노가 그 신호다. 우라노스는 비단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수많은 남성의 내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묻고 있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며 세상을 해방시킨다. 억압적 질서에 맞선 영웅적 반란이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크로노스는 태어나는 자식을 삼켜 버리는 독재자로 변한다. 자신이 타도했던 바로 그 억압을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 패턴을 끝없이 반복해 왔다. 혁명을 내걸고 등장한 지도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철권 통치자가 되는 것은 크로노스 원형의 집단적 발현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 드라마는 조용히 반복된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아들이 막상 아버지가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통제한다. 직장에서 상사의 억압에 분개하던 직원이 관리자가 되자 부하를 더 억압한다. 크로노스의 혁명은 내면이 미성숙한 채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결국 두려움이 지배 욕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 특히 오늘날 '잿빛 미래'를 사는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무력감과 우울은, 크로노스처럼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기성 세대의 구조적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제우스는 앞선 두 아버지와 다르다. 그는 자식을 감금하거나 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올림포스의 다양성을 꽃피운다. 제우스의 통치 방식은 명령과 지배가 아니라 경청과 중재에 가깝다. 서로 다른 신들이 갈등하고 충돌할 때 그는 각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배타적 왕정보다 의회 민주주의에 가까운 리더십이다. 주목할 것은 제우스가 여성성 에너지에 둘러싸인 신이라는 점이다. 어머니 레아와 할머니 가이아, 딸 아테나, 수많은 여신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고 유지한다. 그는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숙한 남성성이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내면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것임을 제우스는 보여 준다. 물론 제우스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를 넘어 제우스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 남성에게 열려 있는 아버지 원형의 진화다.

아폴론은 현대인이 가장 깊이 내면화한 신이다. 합리성, 명료함, 목표 지향, 감정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이것들이 오늘날 '이상적인 남성'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 2천 년의 서양 문명은 아폴론의 빛 아래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이 수학으로 우주의 법칙을 해명하고,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한 것은 바로 이 아폴론적 정신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폴론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명료함과 객관성을 추구한다. 복잡하고 통제 어려운 감정과는 굳건한 담을 쌓는다. 머리가 가슴을,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다. 이렇게 억압된 충동이 가장 파괴적인 법이다. 신화 속에서 아폴론은 연인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막무가내 돌진형'으로 돌변한다. 평소 그가 혐오하던 바로 그 날 것의 충동을 야만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아폴론적 남성은 종종 '영웅의 귀'로 세상을 듣는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해결해 버림으로써 그 에니그마를 영원히 사라지게 한 것처럼, 삶의 모호함과 역설을 제거해 버리려는 충동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진정한 지혜는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깊은 물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아폴론의 빛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오니소스는 현대인이 가장 오해하는 신이다. 술과 광란의 신이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진 그의 본질은 '조이(joy, 희열)'와 '엑스터시(ecstasy, 황홀경)'다. 이 신은 불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허벅지라는 두 자궁에서 두 번 태어난 '양성의 신'이다. 그는 여성 혐오가 없고, 몸과 자연과 본능의 세계에 친숙하다. 위계와 격식을 혐오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자였다. 신화는 분명히 경고한다. 디오니소스를 억압하고 무시한 자들(트라키아의 리쿠르고스 왕, 테바이의 왕자 펜테우스)은 광증의 벌을 받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한다. 이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오직 이성과 통제로만 살아가는 남성이 어느 순간 예측 불가한 분노 폭발이나 중독으로 무너지는 것은, 디오니소스라는 원형이 그림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청교도적 억압이 강한 사회일수록 카니발이 성행하고, 유교적 위계가 철저한 문화일수록 밤 문화가 발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것도 위험하다. 제어되지 않는 강렬함을 신성으로 착각하는 것은 자신을 태워버린 세멜레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선물(황홀경, 공동체적 해방감, 몸과 자연과의 합일)은 엄격한 의례와 경계 안에서만 온전히 받을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광대함에 담겨야 한다'는 페루 속담처럼, 이 신을 위한 자리를 삶 안에 마련하는 것이 현대 남성에게 주어진 과제다.


우라노스의 억압, 크로노스의 독재, 제우스의 다양성. 아폴론의 이성, 디오니소스의 열정. 이 원형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올림포스는 열두 신이 갈등하고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다중심적 세계다. 건강한 내면이란 그 모든 힘들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다. 아폴론의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의 불길로 삶을 뜨겁게 살아내는 것. 제우스처럼 다름을 수용하는 너른 마음으로 내면의 모순을 견뎌내는 것이다. 신화는 '이렇게 살아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듣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면, 억압해온 충동, 인정하기 두려운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림자 속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는 말은 빈 수사가 아니다. 내가 가장 부정하고 싶은 나의 모습 안에, 온전한 나로 나아가는 문이 숨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완벽한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신들도 질투하고 실수하고 상처받는다. 그것이 오히려 이 이야기들을 수천 년이 지나도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현대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아버지, 완벽한 이성, 완벽한 열정이 아니다. 자신 안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인정하면서도 제우스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아폴론의 빛을 들고 디오니소스의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그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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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미래 - AI 이후, 세계는 로봇으로 재편된다
공경철 지음 / 와이즈맵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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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21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무대 위에 처음 '로봇'이라는 존재를 올려놓았을 때, 관객들은 경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 낯선 피조물을 바라봤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도록 설계된 그 존재는 결국 창조자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불안을 건드린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로봇은 더 이상 무대 위의 상상이 아니다. 공장에서, 병원에서, 거리에서, 심지어 우리 집 거실에서도 로봇은 조용히 그 존재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인간과 로봇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로봇 기술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것이 단순한 공학의 산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로봇은 언제나 그 시대의 욕망과 두려움, 상상력과 기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 속에서 로봇공학의 세 가지 원칙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픽션의 장치가 아니었다.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기 위해 어떤 윤리적 기준이 필요한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물음에 대한 선구적인 사유였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오늘날 인공지능 윤리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961년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 '유니메이트'가 제너럴 모터스 공장에 투입되었을 때, 노동자들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그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로봇은 수많은 반복적이고 위험한 작업에서 인간을 밀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형태의 직업과 산업이 생겨났다. 기술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증기기관이 직조공의 일자리를 앗아갔지만, 동시에 철도 산업과 근대 도시를 만들어냈듯이 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로봇 기술에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로봇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일본이 정작 재앙 앞에서 로봇 한 대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술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었다. 화려한 시연 영상과 실험실의 성공이 실제 세계의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그 충격은 역설적으로 로봇 공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SF 영화 속의 영웅적인 로봇을 꿈꾸던 시대에서, 실제 환경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각성이 찾아온 것이다. 이후 2015년 DARPA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대한민국 KAIST 팀이 우승을 거머쥔 사건은 단순한 기술 경연의 승리가 아니었다. 로봇 기술의 패권이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가 보여준 압도적인 운동 능력, 그리고 한국의 DRC-HUBO가 보여준 안정성과 다기능성은 서로 다른 철학과 접근법이 로봇 공학의 지평을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오늘날 로봇 산업은 단일 기술의 영역을 훌쩍 넘어섰다.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정밀 모터, 클라우드 컴퓨팅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로봇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가상 훈련 플랫폼, 아마존의 물류 자동화 인프라, 테슬라의 자율주행 데이터 네트워크, 이 모든 것이 로봇이라는 중심축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로봇은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고,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서비스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소프트 로보틱스'의 부상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빅 히어로 6'에 등장한 포근하고 말랑한 로봇 베이맥스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그것은 캐릭터의 인기만이 아니었다. 로봇이 반드시 차갑고 딱딱한 강철 덩어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을 돌보는 로봇이라면 그 물리적 형태도 인간에게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은, 이후 웨어러블 로봇, 협동 로봇, 돌봄 로봇 등 새로운 범주의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KAIST 공경철 교수 연구팀이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거둔 성과는 이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웨어러블 로봇 '워크온슈트'를 착용하고 스스로 걷는 장면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상된 능력을 회복시키고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기술의 가장 아름다운 쓰임새는 바로 이런 것이다.

피드백 제어라는 로봇 공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묘한 울림을 준다. 목표를 설정하고, 현재 상태를 측정하고, 그 차이를 줄여나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기술의 원리이기 이전에, 인간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목표로 설정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있는 현실은 어디인가.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로봇은 도구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이 투영된 거울이기도 하다. 로봇이 강하고 위험하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복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로봇이 부드럽고 돌보는 존재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연대와 공감 능력이 기술로 구현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로봇을 만드느냐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는 질문과 정확히 겹쳐진다. 카렐 차페크가 백 년 전에 제기한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동을 대신할 존재를 창조할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기술자의 연구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써내려가야 하는 이야기다. 로봇의 미래는 곧 인간의 미래이고, 그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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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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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목원 가드너 황금비님의 첵 <숲으로 출근합니다>를 읽고 나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정확히는, 덮었지만 자꾸 다시 펼치게 됐다. 특종을 쫓던 기자가 잡초를 뽑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 단순한 서사가, 읽는 내내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이 책이 다시 꺼내 들었다.

나무의사 다이어리라는 형식이 흥미롭다. 다이어리는 본래 시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책의 시간은 마감 시계나 회의 일정이 아니라, 목련이 꽃눈을 맺는 계절, 삼색참죽나무 새순이 세 번 색을 바꾸는 두 달, 무궁화가 매일 아침 새 꽃을 피우고 그날 저녁 지는 주기로 흐른다. 인간이 정한 달력이 아닌, 식물이 정한 달력 위에서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삶. 그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가장 낯설고 가장 매혹적인 감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은 저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억 6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온 목련은 공룡이 어슬렁거리던 백악기에 이미 꽃을 피웠다. 우리가 이른 봄 길가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는 그 탐스러운 꽃망울 안에, 인류의 역사 전체보다 훨씬 긴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봄날의 목련 한 그루는 이전과 같은 나무가 아니게 된다.

황금비가 나무의사로서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식물의 이름이나 학명, 개화 시기가 아니다. 그는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들에서 삶의 방식을 읽어낸다. 목련꽃이 북쪽을 향해 피는 이유는 겨우내 햇빛을 받은 꽃눈의 남쪽 부분이 더 단단하게 자라 꽃이 열리는 순간 그 무게에 밀리기 때문이다. 단지 성장의 차이가 빚어낸 방향이다. 그런데 그 방향이 흔들림 없이 북쪽을 가리킨다. 의도 없이 완성된 나침반. 삼색참죽나무의 새순이 처음엔 짙은 분홍, 다음엔 베이지, 마지막엔 초록으로 변하는 것은 자외선으로부터 여린 잎을 보호하기 위해 안토시아닌이 방패막이 되어주다가 엽록소가 충분히 만들어진 후에야 물러나는 과정이다.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워진다.

기생식물인 야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뿌리도 없고 잎도 없이, 억새의 뿌리에 기대어 8월 말 단 한 철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야고. 저자는 이 식물을 두고 수목원 생태계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말한다. 수목병리학 교과서는 기생식물을 방제의 대상으로 분류하지만, 수목원의 가드너들은 억새잎을 걷어 야고를 탐방객에게 보여준다. 잡초와 야생화를 가르는 것은 식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라는 오래된 말이 여기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1인분을 못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으면서, 저자는 야고를 통해 다양함이 곧 건강함이라는 수목원의 철학을 조용히 꺼내 놓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화려한 식물도감적 지식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삶을 식물의 언어로 번역하는 방식이다. 노루오줌을 심으며 저자는 식물이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찾아주는 일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쓴다. 그늘지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노루오줌을 양지에 심으면 타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토양에 억지로 뿌리를 내리려 했던 서울에서의 10년을 그는 조용히 돌아본다. 빠른 것이 미덕인 도시에서 느린 것들을 견뎌내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마을버스가 서는 태안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0.7배속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직업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이제 매 시간 발행되는 뉴스의 속도가 아니라, 겨울 내내 꽃눈을 부풀려가는 목련의 속도로 시간을 감각한다. 늦가을 수목원을 산책하며 통통해지는 꽃눈을 바라보고 내년 봄의 개화를 기대하는 그 감각은, 내일의 주가나 다음 달의 성과와는 전혀 다른 시간관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위해 지금의 겨울을 기꺼이 견디는 것. 그것이 나무의사의 달력이다.

나무의사라는 직업 자체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나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문가. 그런데 이 책에서 나무의사는 나무를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읽어내는 사람에 가깝다. 벚나무가 병해충에 약한 것은 벚나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토심이 얕고 배수가 나쁜 도심 환경에 억지로 이식된 결과다. 잘못된 가지치기, 줄기를 감는 현수막 끈, 콘크리트 위의 좁은 토양. 나무가 아프면 먼저 환경을 봐야 한다. 이 원칙은 식물학을 넘어서 어딘가 낯익은 윤리처럼 들린다.

동백나무 장에서 저자는 천리포수목원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30년에 걸쳐 태안 곳곳에 동백나무를 심어온 이야기를 전한다. 수목원에서 키운 삽수를 무료로 나누고, 재배 기술을 공유하고, 그 나무들이 지금은 마을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18만 평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수목원의 역사가 지역의 일상 속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다음 세대의 숲이 된다는 것. 나무의사의 다이어리가 단지 식물 기록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조용하다.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목련이 북쪽을 향하는 이유를, 야고가 억새 아래 숨어 사는 방식을, 금목서 향이 만 리까지 퍼진다는 말의 뜻을 천천히 들려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이 어떤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지금의 환경이 자신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곳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의사의 다이어리는 결국 처방전이 아니라 관찰 일지다. 식물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것들이 기특해 보이는 순간이 온다고 저자는 쓴다. 여린 새순이 자외선을 막기 위해 붉게 물드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금을 버티고 있다. 그 버팀을 기특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숲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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