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남을 혼내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 혼내는 사람, 혼내지 않는 사람을 혼내는 사회
무라나카 나오토 지음 / 도서출판 더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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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커피숍에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의 목소리, 회의실에서 부하직원을 질책하는 상사의 어조, SNS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댓글들. 우리 일상은 '혼내기'라는 행위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토록 끊어내기 어려운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왜 우리는 남을 혼내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흥미로운 책이다. 혼내기란 큰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지금 나는 혼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찬찬히 설명하는 척하면서도 상대를 위축시키는 말투, 타당한 지적인 듯 포장된 인신공격,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가해지는 정서적 압박까지.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교묘하게 타인을 혼내고 있다.

왜 우리는 혼내기를 멈추지 못할까? 그 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이다. 혼내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를 벌하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정의감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채로 말이다. 이는 마치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는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상대방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내가 옳다는 확신에서 오는 만족감, 화를 표출했을 때의 일시적 해방감. 이런 감정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혼내기에 의존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를 혼낸 후 "이번엔 정말 잘 타일렀다"며 뿌듯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들. 하지만 며칠 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다시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게 된다. 변화는 없는데 혼내는 행위만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혼내기'를 성장의 동력으로 여겨왔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엄한 스승 밑에서 고제자가 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격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에는 어김없이 혹독한 훈련과 질타를 견뎌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서사는 혼내기를 필요악이 아닌 필수요소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숨어있다. 혼내기를 통해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고 포기하고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생존자 편향에 빠져 혼내기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인식이 사회 전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직장에서는 "부드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확실히 못 박아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한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집단으로 비난하는 것이 정의구현으로 포장된다. 혼내지 않으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혼내기에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처리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좌절했을 때,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낄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누군가를 혼내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우리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내 말대로 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일까? 솔직히 말하면 후자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하직원을 혼내는 상사들 중 상당수는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전가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 프로젝트가 잘못되었을 때, 실적이 나오지 않을 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혼내기 중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스스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혼내면 일시적으로나마 상대방이 위축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를 성공으로 착각한 우리는 같은 방법을 반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는 점점 줄어들고, 더 강하게 혼내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마치 마약의 내성과 같은 원리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의 혼내기에 반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진다. 더 크게 소리쳐야 하고, 더 심하게 야단쳐야 겨우 반응을 보인다. 결국 부모와 아이 모두 지쳐가고, 관계는 악화된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는 부모는 계속해서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가벼운 지적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더 강하게 질책해야 직원들이 반응한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면 조직 전체가 서로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분위기로 변한다. 창의성과 자발성은 사라지고, 눈치와 회피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혼내기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내가 지금 상대방을 혼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 다음은 대안을 찾는 것이다. 혼내기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말투를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혼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핵심은 상대방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보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의 잘못인가"를 찾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진정한 힘은 혼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능력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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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전 시집 : 진달래꽃, 초혼 -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김소월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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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진달래꽃>을 꺼내드는 순간,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표지에 새겨진 '김소월'이라는 세 글자가 내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그 이름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국어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낭독 소리에 교실 전체가 숨을 죽였던 그 순간들, 칠판에 적힌 시구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100년 전 출간된 시집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650종이 넘게 출간되었다는데, 한 시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서였다. 나 역시 그 수많은 독자 중 하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시어 앞에서 가슴이 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중학교 3학년 봄이었을까. 담임선생님이 <진달래꽃>을 낭독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 보기를 돌같이 하라"로 시작하는 그 시구가 교실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어떤 진동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소월의 힘이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그 절절함과 아름다움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이토록 우아하게, 이토록 애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때부터 나는 소월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등하교길에, 잠들기 전에, 혼자 있는 시간마다 그의 시구들을 되뇌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초혼>을 배울 때는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라는 외침에서 느껴지는 그 절망과 간절함이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강렬하게 박혔다. 비록 연인을 잃은 아픔은 아직 모르는 나이였지만, 그 절절한 부름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그리움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항상 가방 속에 소월의 시집을 넣고 다녔다. 도서관에서 공부에 지칠 때면 몰래 시집을 꺼내 읽었다. 특히 시험 기간의 스트레스로 마음이 답답할 때, 소월의 시는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같은 시를 읽으며 인생의 덧없음과 동시에 그 안에서 찾아야 할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첫사랑을 했을 때도, 그 사랑이 끝났을 때도 소월의 시가 곁에 있었다. "님에게"를 읽으며 사랑의 아픔을 달랬고, "꿈으로 오는 한 사람"에서 그리움의 본질을 배웠다. 소월의 사랑 시들은 단순히 로맨틱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외로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군대에서도 소월의 시집을 들고 갔다. 훈련소에서는 가져갈 수 없었지만, 부대에 배치된 후에는 늘 침대 맡에 두고 읽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소월의 시어로 달랬다. "엄마야 누나야"를 읽으며 고향의 푸근함을 떠올리고, "개여울"에서 고향 강물의 소리를 들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바쁘게 살다 보니 시를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소월의 시집도 책장 깊숙한 곳으로 밀려났다. 그러다 이번에 김소월 전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그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다. 40대가 된 지금 읽는 소월의 시는 20대에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울림을 주었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라는 구절에서 젊음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불운에 우는 그대여"에서 인생의 고난을 견뎌내야 하는 성인의 무게를 느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읽는 "엄마야 누나야"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는 불러지는 입장이 아니라 불리는 입장에서 그 시를 읽게 되었다. 아이의 목소리에서 소월이 그려낸 그 순수하고 애틋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월의 시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 담겨 있다.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아픔, 희망과 절망. 이런 감정들은 일제강점기에도, 현재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애모"에서 느껴지는 간절한 기다림은 오늘날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에서 노래하는 그림자 같은 벗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0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소월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소월의 언어가 주는 음악성도 빼놓을 수 없다.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이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같은 표현들은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우리말의 음성적 특성을 완벽하게 살린 이런 시어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소월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우리말을 사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답게 우리말을 구사했는지 하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우리말로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써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님과 벗"에서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라고 노래할 때, 그 간결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복잡한 감정을 이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소월이 번역한 중국 고전 시들을 읽어보니, 그가 단순히 문자를 옮긴 것이 아니라 원작의 정신을 우리말의 정서로 완전히 재창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창작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두보나 이백의 시가 소월의 손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우리 시로 탄생한 것이다.

바쁜 일상에 지쳐 메마른 감성으로 살아가던 내게 소월의 시는 다시 한 번 위로가 되었다. 특히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소월의 시에서 더욱 깊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이 담겨 있다. "봄"이라는 시에서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라고 노래할 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김소월 전 시집을 다 읽고 나니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소월은 나에게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라는 것이다.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시인이라는 확신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좋아하는 음악도, 즐겨 보는 영화도, 관심사도 모두 달라졌다. 하지만 소월의 시만큼은 변함없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내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소월의 시를 함께 읽고 싶다. 내가 그랬듯이 아이도 소월의 시어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들을 배웠으면 좋겠다. 요즘 아이들은 영상 세대라고 한다. 빠르게 변하는 이미지들에 익숙해져 있어서 시 같은 정적인 문학에는 관심이 적다고 한다. 하지만 소월의 시는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진실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김소월 전 시집 출간 100주년을 맞아 다시 읽은 그의 시들은 내게 청춘을 되돌려 주었다. 나이 든다는 것이 반드시 메마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좋은 시 한 편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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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과잉 사회 - 성비 불균형이 불러온 폭력과 분노의 사회
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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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라 비슨의 <남성 과잉 사회>를 읽었다. 현대 우리사회에서도 문제로 이야기 되고 있는 남녀 성비의 불균형...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읽어 보았다. 1억 6천만. 이 숫자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미국 전체 여성 인구와 맞먹는 수의 여성들이 아시아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라졌다는 표현이 주는 묘한 어감. 마치 어디선가 실종되었거나 증발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태어나지 못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태어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초음파 화면 속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순간 기대감이 실망으로, 실망이 결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결심이 모여 만들어낸 거대한 공백을 생각하면, 개인의 선택이 집단의 재앙이 되는 아이러니 앞에서 숨이 막힌다. 책의 구성이 참 재미있다. 각자의 시간에서 본 관점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다.

의사의 진료실에서.. "축하합니다, 건강한 아기예요." 의사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화면을 응시하는 부모의 표정에서 그는 무언가를 읽어낸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에 대한 당황,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나는 한 산부인과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의학 기술의 발전이 생명을 구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선택의 도구가 되어버린 현실. 덴마크의 두 의사가 혈우병 검사 결과를 알려주며 시작된 성별 감별이 전 세계적 현상이 된 지금, 우리는 과연 의학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잃고 있는가. 매일 진료실에서 만나는 부모들의 눈빛. 때로는 간절함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시선들이 의사로서의 소명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경제학자의 눈으로 본 성비 불균형은 수요와 공급의 문제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든 계산이 비틀린다. 결혼 시장에서 여성의 '희소성'이 높아지면 그들의 '가치'도 올라간다. 경제 원리로만 보면 여성들에게 유리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희소해진 여성들은 상품화되고, 국경을 넘나드는 거래의 대상이 된다. 베트남의 가난한 농촌 여성이 한국의 농촌 총각과 만나는 과정을 수요와 공급의 그래프로 그려보면서, 나는 경제학의 냉정함과 인간적 온정 사이의 간극을 느낀다. 천 개가 넘는 국제결혼 중개업체, 농촌 지역 결혼의 40%를 차지하는 국제결혼 비율. 이 숫자들 뒤에는 각자의 절실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경제 발전이 가져온 역설. 더 잘살게 되었지만 전통적 가치관은 여전히 남아있고, 의료 기술의 발달로 선택권은 커졌지만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한다.

남성 과잉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며, 나는 호르몬이 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잉여 남성들로 가득한 사회가 더 폭력적이고 불안정해진다는 연구 결과들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확인되고 있는 현상이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높은 범죄율, 인도의 여성 안전 문제, 그리고 한국 사회의 변화하는 양상들. 개별적으로 보면 별개의 사회 문제처럼 보이지만, 성비 불균형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된다.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개인의 선택이 집합적으로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주목한다. 각 가정에서 내린 합리적 판단들이 모여서 사회 전체에는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 '합성의 오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페미니스트로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깊은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 분노는 성차별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존재 자체가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다. 태어나지 못한 1억 6천만 명의 여성들.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변화,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꿈과 가능성. 모든 것이 초음파 화면의 한 순간 판단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개별 여성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집단적 폭력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선택을 내리는 주체 중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압박한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구조.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의 내재화가 만들어낸 가장 잔혹한 현실이다.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이 현상을 관찰하면, 전통과 근대성의 충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천 년간 이어져온 남아 선호 사상이 21세기 의료 기술과 만나면서 일어난 변화는 그 어떤 사회 혁명보다도 급진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현상이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나타난다는 것이다. 힌두교 문화권인 인도에서부터 유교 문화권인 동아시아,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인 아제르바이잔까지. 종교와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이것이 단순히 전통적 가치관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오히려 경제 발전과 의료 기술의 보급이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미래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성비 불균형은 앞으로 수십 년간 인류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미 태어난, 그리고 태어나지 못한 세대의 영향은 인구 피라미드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반에 파급될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자기 강화적 순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여성이 희소해질수록 그들의 '가치'는 높아지고, 이는 다시 남아에 대한 선호를 강화시킨다.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상품화는 더욱 심화된다. 한국의 경우, 일시적인 성비 정상화가 저출산 현상과 맞물려 나타났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근본적 해결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한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모든 관점들을 통해 바라본 남성 과잉 사회의 모습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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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묻고 다산이 답하다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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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5년 대선을 앞둔 지금, 진보와 보수의 극심한 대립을 지켜보면서 조선 후기 정조와 다산 정약용의 대화가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역사는 과거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재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찰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주했던 조선의 현실과 우리가 직면한 대한민국의 모습 사이에는 묘한 기시감이 흐른다. 붕당의 대립, 기득권의 독점, 인재의 매몰, 백성의 고통. 시대를 초월한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치 현실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진정한 쟁점은 권력과 이익의 분배인데, 우리는 여전히 이념과 지역감정, 세대갈등이라는 허상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가.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신하인 다산에게 묻고 답하는 글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신창호님의 <정조가 묻고 다산이 답하다>였다.

현재 진행 중인 대선 국면을 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여전히 '인물론'에 매몰된 우리의 정치 문화다. 언론과 국민 모두 후보자 개인의 카리스마, 과거 이력, 스캔들에만 집중할 뿐,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바로 '시스템'이다. 정조가 위대한 군주였던 이유는 그 개인의 탁월함보다는 다산과 같은 유능한 참모진을 곁에 두고 끊임없이 소통하며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며, 백성의 실정을 파악한 후에야 정책을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의 힘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조선시대 전제군주제보다도 더 원시적인 지도자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정조조차도 다산에게 "나라의 폐단도 깁고 보수할 수 있는가?"라고 묻으며 겸손한 자세로 해법을 구했거늘, 우리 정치인들은 모든 답을 안다는 듯 큰소리를 친다. 현재의 대선 국면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가다. 하지만 우리 선거에서는 이런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조와 다산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인재 등용에 관한 것이다. 정조는 지역 인재를 발굴하고 신분제의 벽을 허물려 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런데 20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매 선거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 있다. 특정 지역 출신 후보가 당선되면 그 지역에 예산이 몰리고 인프라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 혹은 우려. 이는 정조가 비판했던 "벼슬이나 녹봉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정조는 "독과점의 폐단"을 해소하고자 했다. 특정 집단이나 지역이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영남과 호남,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인재가 제대로 등용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지역주의적 사고가 정책 검증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후보자의 공약이나 정책보다는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느 정당 소속인지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퇴보다.

정조와 다산이 논의한 주제들을 보면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인재 등용, 경제 정책, 국방, 지역 균형 발전, 교육 등. 200년이 넘었지만 국가가 해결해야 할 과제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접근법은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백성들이 모두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국정의 기반으로 삼았다. 추상적인 이념이나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실질적인 민생 개선에 집중했다. 소금 생산처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경제 문제들을 보라. 청년 실업, 부동산 가격, 양극화, 저출산... 이 모든 문제들의 핵심은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일"과 직결된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의 해법은 어떤가. 거창한 구호와 장기적 비전만 난무할 뿐, 당장 실행 가능한 구체적 대안은 부족하다. 국방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조는 "병사란 100년 동안 써먹지 않을지언정, 하루라도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북핵 문제, 중국의 부상, 미중 갈등 속에서 우리의 안보 상황은 정조 시대보다도 더 복잡하다. 하지만 우리의 안보 논의는 여전히 이념적 대립에 매몰되어 있다.

정조와 다산의 관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들의 소통 방식이다. 비록 군주와 신하라는 위계질서가 있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했다. 정조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다산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다산은 아첨하지 않고 솔직한 조언을 했다. 현재 우리 정치 현실은 어떤가. 대통령과 참모진 사이의 소통은 원활한가. 여당과 야당 사이의 대화는 가능한가. 정치권과 국민 사이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모든 답이 부정적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발달된 정치 제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소통의 질은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SNS와 언론이 발달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사라졌다. 대신 일방적인 선전과 상호 비방만 남았다. 정조와 다산이 "돌려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제군주제의 한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돌려서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우리도 이번 대선을 통해 단순히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정치 문화 전체를 성찰하고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조가 묻고 다산이 답했듯이, 우리도 계속해서 묻고 답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좋은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 "국민과 정치권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200년 전 정조와 다산이 꾸었던 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꿈을 이어받아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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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로가 당신의 위로가 되길 - 치유예술작가협회 12인의 이야기
금선미 외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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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가 필요할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위로를 건네고 있을까? 위로란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위로(慰勞)는 사전적으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로를 어려워하고, 받은 위로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는 위로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위로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책은 치유예술작가협회의 임원 12명이 ‘위로’를 주제로 쓴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각자의 스타일로 자신의 에피소드에 마음과 위로를 담은 힐링 에세이 책으로, 위로의 다양한 측면과 진정한 위로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화두를 던진다.

이전에는 위로란 누군가가 나에게 다정한 말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로의 본질이 '인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삶을, 나의 선택을, 그리고 내가 노력해 온 순간들을 누군가 인정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위로 받는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따뜻함에서 오는 깊은 위로다. 방법이 서툴지라도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정성 있게 마음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내 마음을 잘 전하지 못할까 어색해하고 초조해하며 애태우지 않아도 된다. 딱히 무얼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구나, 저렇구나'를 그냥 온전히 함께 느껴주고 덤덤하게 마음을 담아주고 받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감의 과정에서 진정한 위로가 시작된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굿 앤 배드(Good & Bad)'로 나누며 사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자신의 입장과 필요가 달라지면 끊어내고 모른 척하는 것이라면 굳이 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 관계를 위해 너무 상대방 입장에서만 헤아리며 관계하지 말라는 말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상대방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어떤 관계는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어떤 관계는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아 평생을 함께한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던 우리의 관계 온도가 시간이 지나면 식기도 하지만, 쉽게 잊을 수 없는 이별을 잊지 않으려고 우리는 서로를 기억한다. 이러한 관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책을 읽다보니, 이제는 눈물을 극복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눈물은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수단이자, 나의 내면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글쓰기 역시 자기 위로의 중요한 방법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나의 내면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위로의 과정은 결국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힘으로 발전한다.

​저자는 치유상담 공부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만 아픈 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위로를 나누었고, 비로소 진정한 치유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동시에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픔이었지만, 그 아픔을 통해 더욱 강해졌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을 꼬리표가 아닌, 자랑스러운 나의 역사로 새겨 나가려 한다. 우리의 상처는 때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름이 된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상처를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 다시 위로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극복해야 할 일들도 있고 즐거운 일, 슬픈 일들을 겪고 살지만 다 사람들 속에서 관계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만의, 아니면 나만의 소중한 그 무언가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 소중한 것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만남, 그 시간이 아닐까 한다. 북킷리스트 클럽은 위로와 사랑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할 벗이다. 2030년, 2035년은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바라건대 더욱더 진한 사골국같이 영양가가 넘치고 담백하고 뽀얗게 우러나온 이쁜 독서 모임이 되어 있길 기도한다. 이런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함께 성장해 나간다.

삶을 살다 보면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무심한 태도에 마음이 다칠 때가 있다. '괜찮아'라는 말조차 부담이 되는 날들, 그런 날에 조용히 내 곁에 머물러 주는 문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로는 때로는 화려한 언어나 대단한 행동이 아닌,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위로는 인정과 공감에서 시작하여, 관계 속에서 균형을 찾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깊어진다. 그리고 상처를 통해 성장하며, 일상 속 작은 공동체에서 실천되고, 창조적 관점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결국 삶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창한 조언도, 극복하라는 말도 없이, 조용히 나를 바라봐주는 듯한 글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자기 연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괜찮다고 말해주는 글들을 읽으며, 우리는 조금씩 녹아내린다. 때론 아무 말 없이 공감해주는 존재가, 가장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서로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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